방송인물

임택근 아나운서 그때 그 목소리, 대한민국 성우 1기 윤미림님 글

이장춘 2015. 3. 10. 11:26

 

 

 

한 해 시차가 나는 사진, 성우와 아나운서

연말특집 언파레이드를 마치고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아나운서와 성우는 같이 방송국 전파에 목소리를 실어보내고

얼굴없는 목소리로 방송을 내 보내던 시절, 아나운서는 방송의

얼굴이라 했다면 성우는 방송의 꽃에 비유하기도 했다. 시청자들은

 두 분야 다 방송국 직원으로 생각하는 분이 많아도 안에서는 성격이

좀 달랐다. KBS와 CBS만 있던시절 KBS아나운서는 국가공무원

이고 성우는 출연료를 받는 연예인이다.   아나운서는 

뉴스와 중계방송 등을 주로 하고 성우는 드라마에서

연기와 프로그램의 낭독 등 주로 한다.  

  

아나운서는 한 방송국의 속원이지만

성우는 전속성우를 제외하고는 방송국 경계의

 벽이 없이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운서와 성우는 방송국에서 활동하며 자주 만나고,

방송에 참여하며 청취자들에게 인기를 모은다. 임택근 아나운서는

1951년에 들어와 대한민국 국민들이 다 아는 유명 아나운서였다. 성우

윤미림은 1954년 8월 국군방송실에서 부터 시작해서 1954년말 대한민국

성우 1기 KBS성우 공채(그때는 방송연기 연구원이라 했음)로 방송에

 참여하면서 그 시절 톱 크라스 성우였다. 대한민국 톱 크라스 성우

윤미림의 임택근 아나운서에 관한 글은 더 흥미롭다. 임택근의

그때 그 목소리와 윤미림이 쓴 그 글을 옮긴다.

 

 

 

 임택근 아나운서  윤미림 -대한민국 성우 1기-님의 글

 

 

윤미림님은 자신의 방송생활을

◆아픔의 시간들이란 제목으로 49회에

걸쳐 쎴다. 이 글은 ) 그 글중 45회와 46회 일부의 

"아나운서 이야기 1 - 인기",제목의 글이다.

 

 

 

 

방송 인기면에서만 보면,  한국에서

아나운서를 오늘과 같은 인기직종으로 만드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인사는 임택근(任宅根)아나운서를 꼽고

 싶다. 물론 지성과 인기를 겸비한 다른 이들도 많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방송국하면, 젊은 임택근 아나운서를 떠올릴 만큼, 그는

인기절정이었다. 그 인기가 얼머나 대단했느냐 하면 연말 특별프로

공개방송에서,임택근 진행자를 향하여, "사회자 임택근 씨, 노래

 한 곡 불러봐요"! 하고 프로진행과는 관계없는 요청이 방청석

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와 함께 일어날 정도였다.

 

패기와 젊음이 넘치는 언변,

귀티나는 인물,그는 참으로 인기 절정의

 방송인이었다.그 방송인의 장점은 또 있었다.

겸손이었다. 20대 젊은 나이에 인기가 높으면 오만해지기

쉬운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대인관계가 예의 바르고 부드러

웠다. 같은 방송국에 몸을 담고 마이크 앞에서 방송하는 입장이면서도

성우들이 소속된 연출계와 아나운서실 직원들과는 드라마 녹음할 때

앞뒤 소개멘트를 넣을 때 만나는 일 외에는 평소에 업무상 접촉할

필요가 없었다. 방송국에서의 신분도 성우들은 KBS의

전속이긴 했어도 월급이 없는 프리랜서였으며

아나운서들은 공무원이었다.

 

방송국 복도나 스튜디오에서

 만날 때 아나운서들이 드라마 파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저 이는 겸손하다, 저 사람은 성격이

부드러운 가보다, 하고, 인기와 인간성이 어떤 관계로 작용하는가를

속으로 생각해보기도 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며 잠깐잠깐 반성하기도 했다. .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자주 얼굴을 대할 기회가 많다보니,

나 나름대로 인상에 남는 일들이 있다. 피상적인 관찰이 될 수도 있겠으나

 성우였던 내가 바라본 몇 분 인기아나운서들과 드라마와 얽힌

아나운서들의 얘기를 조심스럽게 소개한다.

 

 

 

 

스포츠 중계로 인기절정에 오른

임택근 아나운서 1958년 5월 24일 토요일

개막하여 6월 1일 일요일 저녁 7시 폐막식까지 9일

 동안 도쿄에서 제 3회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렸다. 스포츠에

소질도 없고 무슨 일에든지 경쟁을 무서워하는 나는 룰도 모르는

 스포츠 중계는 관심이 없었는데, 우연히 그 날 5월 29일 목요일 낮

 12시경부터 연출계 벽 위 부분에 부착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동경의

마라톤 경기 중계를 듣게 됐다. 경기는 상당히 진행된 상황

이었다. 임택근(任宅根) 아나운서 중계였다.

 

남이 써준 대본이나 원고를 읽는 것도

아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5월 하순의 한낮

 따가운 태양아래 땀을 뻘뻘 흘리면서 혼신의 힘으로 달리는

우리 선수들의 모습을 현장에서 보고 느낀 대로 고국 청취자들에게

알리는 중계방송. 임 아나운서의 힘찬 목소리와 순발력은 대단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으로 가슴 뛰게 하는 중계방송이었다. 결승지점인 도쿄

 요요기 메인 스타디움이 가까워오자,    그때까지 뒤쳐져 2위를 달리던 우리

이창훈(李昌薰) 선수가 최후의 힘을 다한 역주 끝에 앞으로 나서기 시작,

수 만 관중이 숨을 죽이며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스타디움

그라운드를 돌아 1착으로 골인테이프를 끊으면서

 실신, 들것에 실려나갔다.

 

 

제3회 아시안께임에서 골인지점을 향해 달리는 이창훈 선수의 모습

 

 

그리고 조금 후 이창훈 선수가

정신을 차려 시상대에 오르고 애국가 

연주와 함께 태극기가 게양됐을 때,   감격한

임 아나운서가 목멘 소리로 외치는 "대한민국 만세!"를

 들으면서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 저 정도의 능력이라야 방송할

 자격이 있는 거야! 참으로 훌륭한 중계였다. 마이크 앞에서 웃는

연기가 안 돼 고민이 많았던 나로서는 그렇게 중계방송을 잘하는

아나운서가 무척 부러웠다. 스포츠 중계를 끝내고 귀국한 그

아나운서를 아래층 아나운서실 앞 복도에서 만났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왜 그렇게 방송을 잘하느냐고,

마치 따지는 투의 말이 튀어나왔다.

 

 "어쩜 그렇게 방송을 잘하세요?

방송을 위해 태어나셨나봐요!"

 

 

내가 얼마나 그 스포츠 중계에 감동했으면

그때까지 별로 대화해 본 일도 없는 젊은 아나운서에게

어디서 용기가 나서 그런 칭찬을 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멋쩍고 부끄럽다. 그러나 사람들의 느낌이나 평가는 비슷한 모양으로,

임 아나운서를 칭찬했던 나의 표현을 다른 이들은 제 3회 동경아시아경기대회

중계방송 이전부터 사용하고 있었다. 방송을 위해 태어난 사나이 월간 {방송}

1957년 12월 특대호 아나운서 프로필 임택근 편의 제목이었다. 복도에서

 내가 그렇게 감격한 인사를 건넸던 임택근 씨는 내가 칭찬했던

 그 날 오전 다른 직원과 함께 연출계에 들렸다.

 

조남사(趙南史)연출계장님에게 일본에서

무사히 중계방송을 마치고 귀국했다는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조 계장 님과 악수를 하는 젊은 아나운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렇게 다른 부서 책임자에게도 깍듯하게 인사 다니는 걸

 보면, 저이는 가정교육이 참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부서 계장을

찾아 인사하는 장면을 보면서 느낀 그런 인상은 아주 가벼운 것이었는데

그 이후 10년을 여러 방송국에만나는 아나운서들을 보면 언제나

나는 임택근 아나운서를 기준으로 예의를 평가하게 됐다.

 

성우들도 그렇지만 같은 방송국에서 인기 직종에

사하는 사람들의 언행은 본인이 의도하든 안 하든, 그들

 인간성의 일면을 나타내며 주위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됐다.

1950년대 후반 20대의 임택근 씨는 아나운서라는 직업의 지명도를

높이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인기 최고의

아나운서였다.  본인의 저서 [방송에 꿈을 심고 보람을 심고](문학사상사,

 1992)에는 자신의 일이라 그런지 인기에 관한 설명은 별로 없다. 하지만

정말 그 아나운서의 인기는 하늘만큼 높이 솟아 있었다.

 

 방송 하면 사람들은 임택근 아나운서를

 떠올릴 정도였다. 그 만큼 임택근 아나운서는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았다. 스튜디오에 드라마

앞 뒤 소개멘트를 녹음하러 와서도 임 아나운서는사람들을

대하는 매너가 참으로 부드러웠다. 간혹 드라마의 녹음 장면을

보고 싶어하는 친지라도 찾아오면, 그 손님들을 데리고 와서 성우

들에게도 자기 친지들을 일일이 소개하며 분위기를 편안하게

이끌었다. 내가 보기에는 임 아나운서는 인기 있다고

 절대로 오만하지 않는 겸허한 방송인이었다. (계속).

 

아픔의 시간들 (46)

 

아나운서 이야기 2 - 노력임택근 아나운서는

후에 MBC와 경향신문 사장 직무대리를 역임했다.

 

 



임택근 아나운서 2016년 6월 4일의 모습을

올렸습니다. 임국희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 취임후

MBC 신사옥을 방문한 자리에서   임국회장, 맹관영

 아나운서와 함께 촬영산 사진입니다. 임택근 아나운서

 한국아나운서클럽 3대회장을 지내셨습니다.  



관련 글 보기 영문자 클릭

 


1기 성우 윤미림이 말하는 그때 그시절 1954년 군방송실

http://blog.daum.net/jc21th/17782583

 

성우 윤미림님, 최초의 멜로드라마 청실 홍실 출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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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시간들 더보러가

MBC 문화방송 아나운서 그 이름(명단) 그 얼굴 사진

http://blog.daum.net/jc21th/17782218


멜번 올림픽과 임택근 아나운서 방송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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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 공개방송 스무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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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상 최 장수 프로그램 노래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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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후현 (팔방미남) 선생님 글

 
제가 듣기로 임택근 아나운서,는 서울 시내를

무개차를 타고 가면서, 길 양쪽 건물에 써   있는 글씨를

 다 읽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 배우 손지창과의

부자 관계가 소문나면서 더더욱 유명세를 탔지요. 한국 방송사에

영원한 이름 석자'를 남기신,   임택근 아나운서,...지금도.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

하십니까?여기는 일본 도꾜 국립경기장 입니다. 지금부터 영원한

 숙적이며, 세기의 대결인 우리 한국대 일본, 일본대 한국,

 축구  결승전 경기 실황을   이곳  됴꾜 국립경기장

 으로 부터 고국에 계신 여러분,에게 직접

 중계 방송 해 드리겠습니다.


어둠이 짙어가는 이곳 도꾜 국립경기장,

날으는 새들도 밤이 되면 다 제각기 자기 집을 찾아

간다고 했습니다.만 고국을 따나와 이곳 도꾜 국립경기잠에
있는 한국 임원 선수들, 밤이 깊어가는 것도 어둠이 묻혀 가는 것도

 아랑곳 하지않고, 오직 이겨야 한다!는 그 하나의 필승의 신념만으로

굳게 뭉친 우리 한국 임원 선수 들에게 아낌없는 응원의 박수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말슴 드리고 있는 순간 경기 시작 되였습니다.

 일본 진영을 향해 힘차게 데쉬해 가는 백 남버 11번, 우리의

차범근 선수...."임택근 아나운서   소식 감사합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사장님!..

 

 

유경환(유카리나)여사님 글

 

전국적으로 온 국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그 시절 젊은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였던 분이지만, 뒤늦게 밝혀진

 가족사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지요. 하지만,

 당사자의 생을 통해 양심의 벌?을 받으며

 사죄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래는 1959년 남산 스카이 라운지에서 있은

성우 송념모임에서의 추억의 사진이다. 왼쪽부터

장민호, 이혜경, 김수일, 홍은순, 이미경, 방송관리국장

이규일, 구민, 고은정, 최길호, 한분건너 전성천공보실장,

 한분건너 최을선, 이경희, 방송과장 노정팔, 최옥경,

천선녀, 오승룡, 중앙 방송국장 이운용님.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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