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곽규석 후라이 보이 郭圭錫

이장춘 2015. 2. 20. 12:04

 

 

 

 최초의 연예인 방송 MC 사회자,

그 이름으로 편성된 최초의 프로그램 진행자,

후라이 보이 그 이름으로 제작된 최초의 영화 출연자,  

쇼의 대명사 TBC 쇼쇼쇼의 최초 프로그램 진행자, 최초의

 연예인 목사, 곽규석에게 붙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다.

1960년대 최고의 MC (사회자)로 자리메김 하면서,

라디오, TV방송에서, 영화에서 제일 바쁜

 사람 중의 한사람이었다.

 

 

곽규석 후라이 보이!

 

 

방송이라고는 KBS와 CBS만 있던 시절

 1957년 정동에 있던 KBS에서 성가 합창대원으로

 처음 방송에 출연하고 196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방송전파를

 탔다. 1954년 12월 종교방송으로 선을 보인 CBS가 음악과 드라마에

 역점을 두다가 재미를 주기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이 1961년 12월 24일부터

생방송으로 진행된 "다이얼 Y를 돌려라"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를 통한 방송

 퀴즈프로그램으로 기록된다. 그는 방송에서 진행자의 이름을 따 편성한 최초의

프로그램 「후라이 보이 아워」에서 인기를 모아갔다. "다이얼 Y를 돌려라" 기

독교방송 HLKY의 Y자를 따 이름을 붙인 이 프로그램은 코미디언

후라이보이 곽규석의 코믹한 음성으로 진행되어

 청취자들에게 흥미를 끌었다.

 

 

 

 

 

청취자가 전화로 참여해서

푸는 음악 퀴즈 프로그램으로

이색적인 프로그램이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다이얼 Y를 돌려라"

제작진이다.      프로듀서 김기갑

(해드폰을 낀)과   외부

진행요원들이다.

 

 

 

 

後光으로 표시되는 후라이 보이라는 닉네임은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KBS텔레비전이 출현하면서

연예프로그램의 사회자로 등장했다. 최초의 TV버라이어티 쇼,

"그랜드 쇼"에 연예인으로는 최초의 사회자로 등장한 것이다. 오랜 세월

방송국의 사회는 서명석, 장기범, 임택근 등 아나운서가 담당했지만 1960년대 

들어 후라이보이를 시작으로 오늘날에는 연예인의 사회자가 많이 등장 하고 있다.

후라이 보이가 그 효시가 된 것이다.  1964년 12월 TBC TV가 문을 열면서

대형 쇼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프로그램의 대명사라고 하는

「쇼쇼쇼」다.    이 프로그램을  장기간  이끌어 가면서

후라이보이는 MC 사회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필자가 후라이보이를 처음 본 것은

1964년 7월 1일 국제방송국 개국 3주년 때다.

그날 국제방송국 개국기념식과 곧 이어서 아나운서

언파레이드 등의 공개방송이 후라이보이의 사회로 진행

되었다. 7개 국어로 전 세계를 향해서 방송되는 국제방송국의

개국기념행사 사회는 후라이보이의 우리말과 영어로 진행되었고

각 언어별 아나운서들이 등장해서 7개국  언어로 인사말을 했다.

후라이보이는 우리말과 영어를 섞어가며 전 세계를 향해

그 특유한 사회솜씨로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연출했다.

 

 

 

 

1966년 10월 26일 우리나라 최초의 뮤지컬이

시민회관에서 공연되었다. 곽규석과 패티 킴이 주연으로

등장한 김영수 작 "살짜기옵서예"는 열화 같은 호응 속에 개막되어

4일간 무려 16,000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1주일 공연 계획이었지만

존슨대통령의 방한으로 기념연설을 할 시설이 없던 시절에 시민회관에서

 할 수 밖에 없어 4일간의 공연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최초의 뮤지컬이

처음 공연된 10월 26일은 "뮤지컬의 날"로 제정되었다.

 

 

 

 

랜 세월 노래자랑 사회를 맡아오던

장기범, 임택근 등 이름있던 아나운서들이

떠난 자리에 곽규석이 등장했다. 라디오시대부터

 60년을 이어온 노래자랑 공개방송은 장기범, 임택근,

곽규석, 위키리 등으로 이어오다가 오늘날 송해가 인기를

모으며 30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 프로그램 역시 연예인로는

곽규석이  최초인 샘이다.「후라이 보이 박사소동」후라이보이가 

데뷔한 영화작품이다. 영화에도 그 이름이 붙은 작품이 등장했다.

2역, 3역을 하면서 데뷔작품이 제작되었다. 1967년 3월 18일

동아방송 「스타, 나의 데뷔시절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김상희와 대담을 가졌다.

 

그 프로그램은 방송 된지 50년이

다 되었지만 「민족의 소리 동아방송」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그때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오늘 배경음향은 그 프로그램에서 따 온 것이다.

그 프로그램에서 곽규석은 100편정도의 영화에 출연했다고

 했다.  곽규석은 동아방송에서 1965년부터 1969년까지

"세계의 뒷골목" 프로그램을 성우 김세원과

함게 진행하기도 했다.

 

 

 

 

늘 바쁘기만 했던 영화에서 곽규석의

목소리는 얼굴 없는 성우 김수일 등 목소리로

 대신 들려주었다. 잘 나가던 곽규석이 1970년들어

광고사업에 뛰어 들어 부족한 경험과 불황이 겹치면서

 감당 할 수 없는 빗더미에 올라 시달렸다. 그로부터

기독교에 몸을 담고 활동하다가 마침내 목사가

되고 미국으로 가 목회활동을 했다.



곽규석 : 곽규호 형제의 동시출연 TBC


 

곽규석 동생 곽규호가 있었다. 그도

역시 연예인이었는데 얼굴과 목소리가

 닮았다. 필자가 춘천방송국에 근무 할 때 일선

장병 위문 등 큰 행사가 있을때 초청, 사회를

보았는데 1970년대부터는 소식이 끊겼다.


 

2005. 8. 13. 아멘 넷에서 곽규석님

 곽미희님과 인터뷰한 아멘냇의 자세한 얘기가

있어서 아래 올렸다. 다음은 곽규석 목사가 1984년

직접 작성한 이력서중 요약한 것으로 딸 곽미희님이

아멘넷 인터뷰에서 올린 이력서다.

 

 

곽규석 郭圭錫 이력

 

1928년. 11. 28 -1999년. 8. 31

 

 

[학  력]

 

안청중학교졸업,

서울음악대학중퇴,

 뉴욕한인연합신학대학 졸업

 

[경력]

 

인천내리감리교회 세례후 성가대(47-50),

종군통역(47-50),

공군정훈음악대(52-53),

연에게 진출(1957),

선진광고회사 대표이사(70-74),

서대문순복음교회(74),

연예인교회 개척(76),

연예인교회 장로(80),

뉴욕기독교방송국 국장(82-)

 

(2005. 8. 13. 아멘넷)

 

 

 

1973년 1월 맨 앞이 사회 곽규석, 다음이

 펄 시스터즈, 그 뒤가 쟈니 부러더즈.

 

 

 

 곽규석과  박창학

내가 연출했던 프로그램 MC 3인과 함께


 

박창학 KBS에서 오랜세월 음악,

쇼 프로그램을 을 담당하던 프로듀서이고 그

와 관련되 해박한 지식의소유자이다. 아래 글은

KBS사우회보 한장의 사진에 계재된

방창학님의 글이다.

 

나는 라디오 전성기였던 1960년대

공무원 신분으로 음악 PD가 되어 1998년 3월

명예퇴직하기까지 라디오 연예오락PD의 길을 걸어왔다.

때로는 비서실, 지역방송국으로 외도(?)를 하기도 했지만 이내

라디오로 복귀했고 지금도 내 이력에는 라디오 연예PD라는 타이틀이

 붙어있다. 그것이 자랑스럽다. 그래서 내겐위문공연 사진, 연예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 유난히 많은 편이다. 이 사진은 그 중 한 장으로 1970년대

에서 1980년대까지 내가 연출했던 라디오 연예오락 프로그램

 진행자 세 사람과 찍은 사진이다.

 

 

 

 

 

후라이 보이 곽규석씨가 연예인 생활

을 끝내고 미국에서 목사가 되어 활동하다 잠시 귀

국했을때 KBS TV가 특집방송을 했던 날로 기억하고 있다.

사진 왼쪽은 ‘서수남·정혜경과 함께’를 진행했던 가수 서수남 씨,

 하청일 씨와 듀엣 가수였다. 키다리(187cm) 가수로 알려졌고, 단짝

하청일 씨는 175cm로 작은 키가 아닌데도 키 작은 하청일로

인식될 정도로 키에 관한한 늘 억울한(?) 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두 번 째인 곽규석 씨와는 ‘KBS배 전국

노래자랑’, ‘쇼쇼쇼’, ‘라디오 100분 쇼’ 등 많은

 프로그램을 함께 했다. ‘후라이 보이’라는 애칭을 가진 그는

진행자로서 뿐 아니라 영화배우, 코미디언 등 만능연예인이었다.

그는 1999년 8월 뉴욕에서 71세로세상을 떠났다. 그 다음의 구봉서

 선생과는 남산시절 ‘구봉서의노래선물’이라는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었다.

 키다리 서수남, 후라이보이 곽규석, 막둥이 구봉서, 이 세 사람은 우리나라

연예계에서 내로라하는분들이었다. 그런 분을 MC로 하여 나의 대표

그램을 만들 수 있었던 나, 큰 행운이었고 내 인생

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추억이다.

 

 

곽규석 관련 동영상 보기

 

 

음향을 먼저 끄셔요

 

 

 

 

 

1960년대 최대의 쇼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

 

 

1967년 제1차 경계개발계획이

 끝나고 제2차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던

그때! 그때는 월남파병이 한창이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때 국립영화제작소는 국민들, 그리고 파월

용사들의 사기를 높히고   위안을 주기위해   인기가수

코메디언이 출연하는 쇼 프로그램을  영화로 촬영, 국내

방송사,  극장 등에서 상영하고 월남에 보내어 현지 상영을

하기도 했다.  이 쇼 프로그램은 그때 문화영화 70분을

14분으로 편집한 것이다. 그 시절 대한민국의 톱 연예인

들이 총출연한 그로그램이지만 여기서는 애희

박재란, 이씨스터즈, 최숙자, 봉봉 그리고

구봉서의 코메디을 볼 수 있다.

 

 

 

 

 

형이먼저 아우 먼저

 

 1970년대 한 라면회사 광고가

그 시대를 사신 분들의 머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실제로 형제처럼 지냈던

 구봉서와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그

동영상이 있어서 연걸했다.

 

 

 

 

영화 5인의 해병 Five Marines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쇼쇼쇼 TBC

http://blog.daum.net/jc21th/17782389

 

구봉서, 희극배우(코미디언)

http://blog.daum.net/jc21th/17781517 

 

 

 

나의 아버지 곽규석목사 

 

 

 

 

 

   故 곽규석 목사 

 

 

   아멘넷은 연예계에서 최초로 목사가 된

곽규석목사의 장녀이자 아버지가 창립한 뉴욕

 한마음침례교회의 사모인 곽미희 사모를 인터뷰하고

곽 목사의 크리스챤으로서의 일생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오는 8월 31일은 곽 목사의

6주기여서 더욱 의미가 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이다.

    

 

    곽목사사의 딸 곽미희 사모

 

 모태집안에서 태어난 보수적이며

가정적인 아버지

 

  아버지 곽규석 목사는 굉장히

보수적인 분이셨다. 자식이 연예인이 될까 봐

 극장도 못가게 하시고 무용도 못하게 하셨다. 하지만

시간이 허락하면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도 가는 가정적인

분이었다. 아버지는 모태집안에서 자라 청년시절 까지는

 "인천 내리 감리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하셨는데

군대생활을 거치는 동안 교회를 떠나 생활했다.

 할아버지는 선교사의 사역을 도울 정도로

 신앙이 돈득하신 분이었다.


   사업실패로 빛더미에 앉아 - 고난은 기회


   아버지는 70년대초 광고사업을 했다.

아이디어는 많았지만 사업을 할줄 모르셨다.

 당시에는 오일파동이 일어나 더욱 어려웠다. 아버지는

이때 "하나님 나의 빛을 청산하여 주시면 남은 인생은 주님만을

섬기겠다."라는 서원을 하셨다. 아버지가 광고사업으로 빛을 많이

지고 어려워할때 안면도 없는 서대문 순복음교회의 장로와 권사분이

 찾아와서 성경을 선물햇다. 그때 "내가 예수믿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했다"고 아버지는 말씀 하셨다. 바로 그 자리에서 어머니는

 처음, 아버지는 다시 복음을 받아들였다.


   하용조목사와의 만남


   아버지가 예수를 본격적으로

믿기 시작하자 당시 PD 김경태 장로의

추천으로 영락교회에서 하용조 전도사를 붙여

 주었다. 역시 모태교인인 구봉서장로님의 집에서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구봉서장로님은 잘 안믿었고

사모님의 신앙이 좋았다. 당시의 연예계의 분위기는 대마초

사건등으로 어지러운 상태였고 아버지가 전도하자 고은아,

이종용, 서수남씨등이 성경모임에 참가했고 이것이

 연예인교회 태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연예인교회 개척


   성경공부하는 멤버가 40명을 넘어서자

이를 계기로 76년 연예인교회가 세워졌다. 아버지가

 창립멤버였다. 연예인교회는 지금 예능교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용조목사는 우리를 가족같이 대하여 주었다. 하용조목사가 우리집에

 와서 깨진 미키마우스 시계를 테이프로 붙인것을 보고 놀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용조목사는 대학가는 나에게 축복기도를 해주었고 졸업식 때도

와 주었다. (하용조목사는 2005년 6월 뉴욕교계 최대행사인 할렐루야

대회 강사로 참가하여 개인적으로 곽목사의 따님과 사위인

 박마이클목사와 시간을 보내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소개하는 관심을 베푼다.)


   뉴욕행과 목사안수


   1981년 한국에서의 돈과 인기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머님하고 두 분이서

 무작정 뉴욕으로 떠났다. 아버지는 처음 주선양목사가

운영하는 뉴욕기독교 TV 방송국장으로 뉴욕에서 일했다.

카메라도 만지고 광고도 하는 험한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뉴욕에 와서 고 정달빈목사를 신학교에 자동차로 태워주게

 되었는데 김에 강의도 듣고, 들은 김에 등록도 하라고

 해서 등록을 했다. 그리고 84년 목사안수를 받으셨다.

 주선영목사와 한마음침례교회를 1985년 개척했다.


   성도를 행복하게 하는 목회


   아버지는 목사가 된 후 "내가 목사가

되니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다시 장로로

돌아가 하용조목사 가방을 들고 싶다"는 솔직한 말로

 목회의 어려움을 표현했다. 아버지는 "이민생활에 힘들어

 하는 성도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목회관을 가지고

있었다. 설교방향은 즐거우면서도 포인트가 있게 했으며

 야외 예배에서는 재미있게 게임을 인도했다.(힘센

사람 나오라고 해서 목둘레를 재는...)


   얼굴도 보지 않고 한 결혼


   아버지는 미국을 중심으로

많은 전도부흥집회를 주재하셨다.

아버지는 텍사스 휴스톤 집회에서 한 장로를

 만나 얼굴도 보지 않는 상태에서 장로아들과 나와의

 결혼을 약속한다. 그 장로의 아들이 남편인 박마이클

목사이다. 우리는 한번도 얼굴도 보지 않는 상태에서

서로 결혼을 승낙했고 하나님의 인도로

 결혼하게 되었다.


   췌장암으로 하나님 부르심 받음


   아버지는 갑자기 췌장암 선고를 받으셨다.

그런데 췌장암은 통증이 굉장히 심한데 아버지는

다행히 통증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는 72세의 나이에

1999년 8월 31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3자녀 모두 하나님의 일선군사로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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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목사의 사위 한마음침례교회 담임 박마이클 목사

 


   곽규석 목사는 아내와 사이에서

2녀 1남을 두었는데 아내 곽복화씨는 현재

사위가 담임하는 한마음침례교회에 출석중이며,

장녀 미희는 한마음 침례교회 사모, 차녀 선희는 뉴욕

 미주기독교방송에서 방송선교를 하고 있다.  외아들

재혁은 전도사로 현재 미국 플로리다에 있으며

LGMC(한빛지구촌)에서 문화사역자로

초교파적인 사역을 하고 있다.


  

  

  

  

  

  

  

  

  

 

 

 

 

 

 

동아방송 후라이보이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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