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이광재 아나운서가 쓴 그때 그시절 1960년대 회고록 (3)

이장춘 2015. 1. 21. 11:06

 

 

 

방송국 사정을 잘 모른 일반청취자들이

 아나운서가  방송국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

 1956년 KBS 아나운서가 된 이광재가 4년만에 선배아나운서

들을 뒤로하고 임택근 아나운서와 함께 로마 올림픽 중계방송을

 1964년 임택근 아나운서의 뒤를 이어 KBS아나운서 실장이

 되었다. 1970년 미국의 소리방송 VOA 아나운서로 파견 될때

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광재 아나운서가 2,000년 

KBS 저널 1월호부터 10월호까지 10회에

걸쳐 회고록을 남겼다.

 

국내방송 15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영향력이  컸던만큼

 방송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크다고 볼 수

 다.  이광재 아나운서가 남긴 10편의 글 가운데

 첫번 글과 두번째 글은 올려드려서 그 글을 연결

 드림과 동시에 저널 8월호에 실린 글 중 일부를 올려

드린 적이 있지만 오늘 그 글 전문을 올립니다. 나머지

글도 기회되는 대로 올리려고 합니다. 이 글이 실린 

 2000년 1월분부터 10월까지의 KBS 저널은 KBS

벙송박물관 준비팀에 보존되어 다.   

 

 

이광재 아나운서가 쓴 그때 그시절 1960년대 회고록 (3)

 

 

 먼저 이광재 아나운서 사회로 진행된

 1968년 연말결승 백만인의 퀴즈공개방송 모습을

보시겠습니다. PD 김찬수, 문제를 역는 신원균, 김소원님

등의 모습이 보이고 진열된 상품모습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동영상은 KBS박물관에 있는데 음향이 재생되지 않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영상에 마우스 대시고 두번 클릭

하시면 전체화면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동영상 보기

 

 

 

 

 

이광재 아나운서 회고록 KBS저널 2000년 8월호

 

 

1960년대 라디오 최장기 프로그램

 ‘백만인의 퀴즈’는 내가 10년 동안 진행을 맡았다.

나중에 ‘퀴즈 열차’로 프로그램의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이 프로그램 진행을 하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당시 ‘백만인의 퀴즈’는 출연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 만큼

 경쟁이 치열했는데, 이는 상품(?)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매월 퀴즈

왕을 한 명씩 선발하여 최종적으로 연말 결선에서 한 해의

퀴즈 왕을 뽑는데, 퀴즈 왕에게는 TV 한 대가 상품으로

 주어지는 그야말로 인기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느 해인가 강원도 홍천의 두메 산골에 사는

 50대 중반의 출연자가 퀴즈 왕이 돼 TV를 받게 됐다.

내가 수상 소감을 물으면서 “그 마을에도 전기가 들어옵니까”

라고 물었다. 그 당시 우리 나라는 서울 경기 일원 지역만이 TV시청이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러자 그 분이 말하기를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렇다면 “TV를 가져가도 쓸모가 없으니

 원하신다면 2등 상품과 바꿔드릴까요?”라고 물었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 수상자가 못내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촛불을 켜면 안 됩니까?”라고 하여 장내가

삽시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분은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웃음이 그칠 즈음 “촛불을 여러 개 켜 놓으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또다시 말해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그러나 웃음으로 그냥 넘기기에는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다. TV 방송 초창기 무렵에는 프로 권투나 

레슬링 중계가 있는 날 저녁의 시내 각 다방에서는 중계

방송이 있다고 써 붙여 놓고 다방 출입자들에게 입장료를

 받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먼 옛날 이야기 같지만

엊그제 일같이 생생히 떠오르곤 한다.

 

그 시절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경인 마라톤 경기 중계 방송 실패담 한 가지.

내 성격이 원래 빈틈이 없는 편이라 실수가 적지만

 경인 마라톤 중계 방송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인천 부둣가

에서 출발해 서울 중앙청 정문까지의 코스인 경인 마라톤 중계는

출발 지점에서 골인할 때까지 2시간 10분 정도가 걸렸는데, 다른 스포츠

종목과는 달리 뛰는 선수들을 뒤쫓아가며 방송을 해야하는 관계로 어려움이

많았다. 경인도로는 지금처럼 고속도로가 아닌 구도로였으며, 곳곳에 포장이

 안 되고 공사 관계로 파헤쳐진 구간이 유난히 많았다. 선수들을 뒤따르며

중계 방송을 해야 하는 나는 중계 차량이 비포장도나 공사 구간을

 지날 경우 차량이 흔들리는 관계로 안테나를 손으로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해야 했으므로

매우 신경이 쓰였다.

 

가두에 나온 시민들은 마라톤 선수들을

 열심히 응원했으며, 중계 차량을 신기하 듯 바라

보기도 했다. 동인천, 소사, 오류동을 거쳐 영등포로 들

어서니 가두의 시민들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귀에 대고

내 중계 방송을 들으며 선수들을 열렬히 응원했다. 중앙청을

목전에 두고 지금의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 앞을 지날 때쯤

돼서일까, 거의 경기가 끝나 갈 무렵이었을 것이다.

 

워낙 긴장을 한 탓인데다 계속해서

쉬지 않고 중계를 하여 갈증이 심하게 났다.

렇다고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는 상황이 됐다.

그러다 보니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착시 현상이 나타나

 선두에 뛰고 있는 김봉래 선수가 두 명으로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골인 지점 300mm를 남겨 놓고 있는데 내 눈에는

 300mm가 30mm로 보였던 것이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지금 김봉래 선수 결승 지점까지 30mm를

 남겨 놓고 있습니다.

 

마지막 기력을 다해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숨가쁘게 뛰고 있습니다”라고 중계 방송을

했다.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앗, 실례했습니다.

김봉래 선수 300mm를 남겨 놓고 있습니다.”라고 곧바로 정정

멘트를 내보냈으면 좋았는데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김봉래 선수가

너무 지친 나머지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진땀이 비 오듯 흐르고

내 조급한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경기를 취재하던

 스포츠 기자들이 신문사 책상 앞에서 라디오를 통해 흘러

나오는 내 중계 방송을 들으며 기사를 작성하고

있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다음 날 일제히 터져 나온 마라톤

중계방송 기사에서 나는 호되게 질책당했다.

“이광재 아나운서의 국민학교 산수 선생님이 어떻게

가르쳤길래  미터 감각이 그렇게 없는 것이냐”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스포츠 중계를 생방송으로 진행하다 보면 가끔씩

 이런 실수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내 경우는 사정이 좀 달랐다.

이름이 알려진 아나운서인데다 팬들도 많아 작은 실수라도

하게 되면 곧바로 기사 거리가 돼 신문의 방송평에 크게

실렸다. 말하자면 유명세를 치르는 것이었다.

 

조금 덜 알려진 아나운서의 경우 실수가

 있더라도 그냥 넘어가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스포츠 기자들은 용납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하찮은

일을 가지고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고 속도 많이 상했지만

유명세이려니 하고 그냥 넘기다 보니 나중에는 그런 일에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만성(?)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유명세가 더욱 가속화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박신자 일행 농구선수단 환영회 출처:서울시 언론담당관 촬영일:1967-05-07

 

 

박신자 선수의 전성기 시절,

여자 농구 경기의 경기장은 언제나

 관중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의례히 상업은행과

제일은행이 결승전에서 맞붙곤 했다. 어느 때인가, 서울

 운동장에서 박신자 선수가 뛰는 상업은행과 제일은행의 여자

농구 경기가 열렸다. 농구 경기 중계를 위해 일찍 서울 운동장으로

가야 했는데, 때마침 중요한 긴급 뉴스가 생겨 뉴스를 끝내고 경기장

으로 가야 했다. 경기장은 이미 초만원이라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문도 이미 굳게 잠겨 있었다. 문 앞에는

경기를 보려는 또 다른 인파로 내내 북적이고 있었다.

 

중계 방송을 해야 하는 나는 문을 계속 두

드려 보았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왜 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KBS 중계 방송팀이라고 했더니, “KBS 중계 방송팀 다 들어와 있어. 더는

필요없어”라고 하는게 아닌가. 갑자기 혈압이 올랐다. 반말투로 지껄이는 소리가 

영 신경에 거슬렸다. 내가 “당신 누구야?”하고 소리를 지르자 문 안에서 “너는 누구냐?”

라며 도리어 큰 소리로 나왔다. 하는 수 없이 창피를 무릅쓰고 “나 이광재 아나운서다”

라고 맞받았다. 그제서야 저쪽에서 “그러면 진작 말할 것이지”하면서 문을 열어

주었는데, 그곳에 주최측인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이 턱 버티고 서 있었다.  

장기영 사장은 아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무슨 일이든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선에 나서는 경영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후 장 사장은 부총리가 됐다. (계속)

 

 

오랜세월이 지나 쓴 글이라  이광재 아나운서

회고록중 퀴즈열자와 백만인의 퀴즈방송기간의 순서에

착오가 있는 듯합니다.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원래 퀴즈열자로

편성되어 임택근 아나운서 사회로 진행되었던 공개방송은 「퀴즈열차」는

임택근 아나운서가 MBC로 떠난후 이광재 아나운서사회로 진행하다가 1967년

11월 프로개편에서 「백만인의 퀴즈」로 바뀌고 월요일 오후 8시부터 45분간

방송되었습니다. 「백만인의 퀴즈」는 A마이크, B마이크로 나뉘어 벌리는

 퀴즈 프로그램으로 월말께임에서 우승하면 라디오 한 대가 주어지고

 연말께임 출연 자격을 얻어서 연말에 우승하면 텔레비젼

 한 대를 주었습니다. PD는 이상익, 김수웅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광재 아나운서 영면. 1950, 60년대 국민의 벗이었던 인기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1394

 

이광재 아나운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http://blog.daum.net/jc21th/17780853

 

이광재 아나운서의 KBS시절 방송 회고록 1 

http://blog.daum.net/jc21th/17780729

 

로마 올림픽과 이광재 아나운서의 중계방송 추억 회고록 2

http://blog.daum.net/jc21th/17780285

  

이광재 아나운서, 김무생 아나운서의 생생한 체험기록

http://blog.daum.net/jc21th/17781605

 

이광재 아나운서와 김무생님의 방송추억, 아나운서 생활

http://blog.daum.net/jc21th/17781589

 

임택근, 전영우, 이광재, 박종세, 1960년대 방송 4사 대표 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1011

 

백만인의 퀴즈 퀴즈열차, 그때 그 영상과 음성(최규락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