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3일은 KBS가 국영에서 공영으로 바뀐지 42년이 된 날이다. KBS라는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지만 운영형태는 국영에서 공영으로 바뀌었다. 콜사인은 행정명칭인 공사를 빼고 ◆KBS 한국방송◆ 이라고 한다. 옛 중앙방송국을 가르켜 「전 KBS」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KBS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혼동 없으시기 바라면서 오늘 글을 쓴다. 설명을 듣고자 하시는 분은 연락 주시기 바란다,
공사창립 42주년, 한국방송사(韓國放送史)와 민족혼
KBS한국방송, KBS 공사창립 42주년! 1973년이 밝아 오면서 공사창립을 실무 작업을 하던 때가 엊그제 갖기만 한데 4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국영방송에서 탈피해 공영방송으로 발 돋움한지가 42년이 되었다는 얘기다. 공사가 창립되던 해 1973년 급히 선발한 경력 회계직 사원은 물론 1974년에 선발된 제1기사원도 모두 KBS를 떠나고 1980년대 중반에 들어온 10기, 11기도 정년이 되어 사우회에서 만나고 보면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한다.
남산방송시절을 뒤로하고 1976년 12월 1일 여의도시대를 연지도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흑백방송시대에서 그토록 기다렸던 칼라방송시대로 접어든 지도 벌써 35년의 세월이 흘렀다. 올해는 이 땅에서 첫 방송을 내 보낸 1927년 2월 16일부터 88년이 되는 해 이기도 하다. 이 나라 방송역사가 한 세기를 바라보는 시점 이다. 이 나라 역사와 숨결을 같이하며 한민족과 같이 해온 세월, 그 무섭고 험한 일제강점기에도 우리말을 지키며 이어왔다. 우리말을 허용 할 수밖에 없었던 경성방송국 제2放送課, 이곳은 우리말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1927년 2월 16일 처음방송이 실시되었을 때는 일본어 방송과 우리말 방송의 편성 비중이 3 : 1 밖에 안 되고 방송시간 대도 우리말 방송은 듣지 않는 시간이었고 거기다가 쌀 50가마니, 100가마니를 주어야 사는 라디오를 구하기가 어려워 방송을 듣는 우리조선 사람들은 적었다. 방송시간을 2 : 1로 조선말 방송을 늘렸어도 마찬가지였다. 청취료로 운영하는 방송국은 어려움을 겪었고 문을 닫아야 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일본인들은 어떻게든 일본말을 쓰도록 하려고 했지만 우리정서에도 맞지 않는 일본말을 배우려는 사람은 적었다. 방송국을 살리기 위해서는 만 부득이 조선말 방송을 하는 방송국으로 운영 할 수밖에는 없었다.
1933년 새로운 송신소를 세우고 출력도 1KW에서 10KW로 올리면서 두 개의 채널을 만들어 조선어 방송채널을 별도로 마련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방송을 듣는 조선 사람들이 늘어나고 방송국 경영이 제대로 되어갔다. 비록 일본이 자기들의 목적수행을 만든 방송국이라 할지라도 그 방송에서는 우리말과 우리문화를 수용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37년부터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총독부는 우리말 방송채널에 일본어 방송을 섞어 방송하라고 했다.
그때 방송과장은 제 3대 심우섭이다. 심우섭은 상록수 저자로 한때 방송국에 근무한 적이 있었던 심훈의 형님이고 총독과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덕망 있는 거물급 인물이었다. 그 심우섭 과장이 직원들에게 일본말을 방송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총독부를 찾아가 조선어 방송채널에 일본어를 섞는 것은 부당함을 역설하면서 방송과장을 사직하고 만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조선어 방송채널에 일본어를 섞으려는 기도는 흐지부지 되었다. 그는 그의 모든 것을 걸고 우리말을 지키는데 앞장섰다. 2치대전이 본격화 되기전 1940년 우리나라의 모든 민족 신문과 잡지는 폐간하고 선교사는 추방되어 세상은 암흑세계가 되었다. 일본 일방적인 선전을 하면서 전쟁을 위해 혈안이 되었고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모르던 독립 운동가들은 의욕이 상실되어갔다.
이때 방송인들은 멀리 미국, 중국 등지에서 들려오는 자유의 소리를 듣고 독립 운동가들에 전해주어 독립운동의 불씨를 살렸다. 목숨을 걸고 한 일이었다. 이 일로 방송인들을 비롯해서 독립운동가, 전직 언론인, 라디오 가게, 부속품 가게에 이르기까지 350여명이 채포되어 갖가지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으며 심문을 받았고 70여명이 형 언도를 받았다. 그러는 가운데 6명이 옥사자를 내기도 했다. 그때 그 일을 기리고 선열들의 뜻을 기리는 물망 비가 KBS 서 현관 1층 옥상에 있다. 그 지독한 철권정치 하에서도 우리방송인들은 우리말과 우리문화를 지키는 데는 목숨을 걸었다. 우리겨레의 피에 맥맥이 흐르는 민족혼이 살아 있었다.
일본이 세운 그 방송채널에서 소위 신이라던 천황이 인간으로 내려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항복의 소리를 전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었다. 방송국에서 제일먼저 그 소리를 전하고 들었다. 해방 후 무정부 상태가 되면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정파나 단체는 방송을 자기 수중에 넣으려고 했다. 온갖 회유와 협박이 따르기도 했다. 방송인들은 정당한 통치자에게 방송을 이양할 때 까지 몸과 마음을 기울여 방송국을 지켰다. 좌우 대립이 심해지고 정국이 소용돌이 칠 때, 또 이 나라를 강대국들이 신탁통치 해야 한다고 했을 때 결사반대하며 그 대열에 앞장섰다. 최초의 방송기자 문제안은 그러다가 1946년 7월 방송국 기자직에서 파면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다. 1932년 조선어 전용 방송채널 제2방송발족과 지방방송국 건립을 앞두고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이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로 바뀐 이래 26년간 이어오던 조선방송협회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도 계속해서 사단법인체로 운영하려는 뜻을 담아 "대한방송협회"로 이름을 바뀌었다. 그러나 그것은 방송인들의 꿈에 불과했다. 정부는 하루아침에 정부조직법에 방송국을 포함시키고 국영화했다. 그것은 절대 아니라고 반대했지만 이미 대세는 그렇게 되어버렸다. 1948년 10월 초까지 이어오던 사단범인 대한방송협회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청취료제도는 계속 이어오다가 전쟁으로 유명무실화 되고 1952년을 기해서 폐지되었다. 어차피 전쟁 중에는 정부예산으로 운영 할 수밖에는 없었다.
해방되던 때 조선인이 가지고 있던 라디오 보유대수는 1950년대 말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라디오를 만들 수 있는 공장도 없었고 수입도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어쩌다가 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고 들어온 라디오나 외국인들이 가지고 들어온 라디오가 있었지만 또 한편 에서는 낡아서 사용 할 수 없는 라디오가 있어서 결국 라디오 숫자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었다. 해방될때 17만대정도 이던 조선인 라디오 보급대수가 1957년 우리나라에서 라디오를 생산하기 시작하기 전까지 14만대 정도 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해방공간의 혼란기와 6.25 전쟁을 겪으며 라디오는 더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
위는 1952년 전쟁중에 들어와 1956년 속초 이동방송국이되었고 아래는 1957년에 들어와 TV방송을 실시 할때 내부를 개조 1970년대 초까지 TV중계방송차로 또는 TV이동 봉사차로 활용되었다. 아래는 강익수 아나운서를 국장으로 한 이동방송국원들이다.
마땅한 소식원이 없고 즐길 거리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라디오에 귀를 기울여 소식들 듣고 즐겼다. 전쟁 중 모든 소식이 두절되어 가슴 답답했을 때 라디오를 가진 사람은 큰 행운이었고 그 지역의 유지였고 소식의 전달자였다. 국민의 70%가 농어민이던 시절 큰 마을이라고 해 봤자 라디오를 갖고 있는 집은 한두 집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고 그나마도 라디오 한 대도 없는 마을도 많았다.
전쟁의 와중에서 숨을 돌렸을 때 정부와 방송국은 국민들에게 방송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25w작은 송신기를 실은 이동방송차를 들여다가 전국을 돌며 이동방송을 하기도 했다. 라디오를 빌려주고 서울의 방송을 중계방송도 해 주고 현장에서 공개방송을 하기도 하고 현장에서 뉴스를 전하기도 하고 인터뷰도 하며 방송이 이런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 시절의 인기가 높았던 임택근, 강익수, 강찬선, 황우겸, 최계환 등이 동반하면서 현지인들과 함께하며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또 작은 자동차에 이동용 안테나와 송신기를 싫고 다니며 오지마을에서 현장방송을 하기도 했다. 이런 얘기들은 춘하추동방송 여러 곳 에 자세히 쓰여 있다. 우리나라에서 라디오는 1957년부터 삼양사가, 1958년부터 금성사가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 했다.어린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이런 얘기를 하면 잘 믿기지 않는 듯, 또는 아주 신기 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기회가 되는 대로 옛 이야기를 해준다.
없이 살던 시절 우리나라에서 라디오를 만들어 판다고해서 라디오를 사는 사람이 부쩍 늘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라디오는 여전히 귀했다. 정부는 라디오가 보급되어야 국민들의 수준이 높아가고 그래야 나라를 제대로 건설 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농어촌에 라디오를 무상으로 보급하면서 라디오가 없는 집에는 적은 돈으로 볼 수 있는 스피카를 달아주기로 했다. 여기서 “앰프촌”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마을에 하나의 앰프를 가설하고 각 가정에 선을 연결해서 스피커를 넣은 자그마한 상자를 벽에 걸어주었다. 그 스피커도 걸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농어촌 “스피커 보내기”,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시골에서 살았던 필자가 방송국에 들어오기 전 그 스피커를 통해서 방송을 들었고 방송국에 들어와서 "농어촌 스피커 보내기 운동"을 활발히 벌렸다.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국민들은 1960년대 초부터 방송과 가까워졌다.
장기범, 임택근, 강익수, 강찬선, 황우겸, 전영우, 최계환, 이광재, 박종세, 강영숙, 김인숙, 윤영중, 문복순 등 아나운서와 이혜경, 장민호, 구민, 이창환, 오승룡, 고은정, 김소원, 윤미림, 김수일 등 성우, 남인수, 이난영, 장세정, 황금심, 송민도, 박재란 등 가수 등 방송전파를 탄 사람들은 아나운서는 대한민국의 가장 유명한 그룹에 속했고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유명 아나운서가 스포츠 중계나 큰 행사를 중계방송 할 때면 사람들은 라디오나 스피커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길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전파사 큰 스피커 앞에서 발길을 멈추어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다방, 만홧가게 등에서는 라디오 볼륨을 올려 방송을 함께 들으며 박수를 치며 환호를 올렸다. 이때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 대부분의 경기는 이기는 경기였지만 경기가 끝나고 보면 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 중계방송을 듣는 사람들은 경기에서는 이겼지만 국력이 약해서 설움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해서 강국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라가 부강해지면 다 잘살게 되고 스포츠 강국도 되고 심판도 함부로 우리를 얕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한 민국 국민은 눈물겹도록 열심이 배우고 일을 했다.
1956년 잠시 선을 보였던 민간 텔레비전 방송국이 문을 닫으면서 1961년 말부터 KBS텔레비전 방송국이 방송을 시작 했다. 그때 흑백텔레비전 수상기 10,000대도 애 안되었다. 정부가 특단의 조치로 20,000대를 들여와 30,000대정도가 되었다. 인구 3천만에 30,000대니 1,000명에 한 대꼴이었다. 그로부터 3-4년간 텔레비전은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 서울의 송신출력을 높이고 산꼭대기에 TV중계소를 세우기 시작했다. 위성은 물론 마이크로웨이브도 없던 시절, 험한 산 정상 수신, 송신 점을 정해서 중계소를 세울 때 전국의 山 정상을 누벼 송수신점을 찾고 시설을 해서 전 국민이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머리로 생각하고 발로 뛰고 손으로 그 시설을 하면서 피눈물 나는 고생을 했다.
위는 감악산 TV송신소 터를 잡던때의 사진이고 아래는 눈 쌓여 길도없는 고지 TV송신소를 개를 앞세워 길을 찾아 오르는 방송기술인들의 모습이다.
아무도 없는 산 정상에서 걸어서 오르내리며 산 고지에서 방송을 연결해서 시청자들에게 전해 주었다. 물을 제대로 얻을 수도 없어 먼 길에서 길러다 먹고 그나마 겨울에 눈이 쌓이고 물이 얼면 그 물조차 얻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방송을 내 보낼 수 없는 사고라도 나면 피가 마르고 애가 끓는다. 그 눈 싸이고 언 산을 오르내리며 또 그 추운 날 철탑을 오르내리며 고치고 나면 또 문책이 따른다. 그러나 그런 일을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고통을 잘 모른다. 이 나라 초기 TV방송의 역사는 기술자들의 피땀과 눈물이 어려 있다.
이렇게 해서 1970년대부터 TV방송시대를 열어 전국 어디서나 TV방 송을 볼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 칼라방송시대를 맞고 1990년대 위성, CATV시대를 맞았다. 고도화된 컴퓨터와 통신이 방송과 연결되면서 하나로 되어갔다. 통신이 방송이고 컴퓨터가 TV수상기, 라디오다. 손안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생산한 스마트폰이 TV수상기 이고 컴퓨터이고 전화기다. 그리고 그 스마트폰은 5대양 6대주에 보급되었다. 방송의 역사 정보화시대와 함께 순식간에 변해 버렸다. 그 간에 대한민국 국력도 몰라보게 신장되어 세계 10위권을 넘나드는 나라가 되었고 1984년 LA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처음으로 10강에 들더니 1988년 서울 에서 열린 올림픽에서는 4강이 되었고 그로부터 한국의 올림픽 성적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세계는 대한민국을 부러워한다. 필자는 방송이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아 준 일등공신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선진극들이 3,000년의 농경사회와 300년의 산업사외를 겪은 세월을 50년 만에 뛰어넘어 정보화 사회의 리더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방송이 있기까지는 오욕의 역사가 있었고 아직 가야 할 길, 해야 할 일이 많다. 1980년대 방송은 국가권력에 의해서 하나가 되고 정도를 걷던 방송인들을 포함한 많은 언론인들은 등이 밀려 쫒겨나 설음을 겪었다. “땡전” 으로 상징되던 독재의 산물 방송을 비롯한 모든 언론은 일방통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언론을 죽이고 민주주의를 말살 한 것이다.
방송이 제대로 되어야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한 국민들은 방송국의 “시청료 거부”를 앞세워 언론의 자유, 민주주의 부활을 왜치는 국민적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권력을 쥐고 세상을 무소불위로 흔들던 당시의 권력저들은 결국 1986년의 “6.29선언” 으로 손을 들어 민주주의가 부활되었다. 그로부너 방송은 제 자리를 찾아가는 듯 했지만 방송을 장악해서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데 맛들여온 정권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다시 방송을 장악하려는 기도가 있었다. 1990년 KBS사태는 그래서 일어난 것이다.
본 "춘하추동방송"에는 7회에 걸처 "방송민주화의 진통과 1990년"이란 제목을 붙혀 상세히 기록 해 놓았다. 밑에 그 글이 연결되어있다. 1990년 KBS항거를 비롯해서 전 언론은 하나 되어 저항했고 국민들은 박수를 보내며 올바른 방송을 지켜주었다. 지금도 방송에 관해서 여러 얘기들이 들린다. 어떠한 경우라도 대한민국 국민 그리고 세계 곳곳에 살고있는 한겨레 한민족은 그릇된 방송을 바로 잡아 나갈 것이다. 방송인들은 민족혼을 받들어 그 뜻을 지켜나가야 한다. 거기에는 사리사욕이 있어서는 안 되고 또 국민들 눈에 그렇게 비쳐서도 안된다. KBS는 공정방송을 이어가야 한다. 이 나라가 자유민주주를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역사의식과 민족혼을 담아 국민과 함께하는 방송 으로 커 나가야 한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 방송이 되고 국민의 힘을 뒷받침 받아야 한다. 이렇게 될때 KBS는 한겨레 한민족과 함께 영원히 빛날 것이다.
관련 글 보기 영문자 클릭 KBS 여의도 사옥이 건설되던 그때 그 얘기 http://blog.daum.net/jc21th/17781690
KBS 한국 방송공사창립 그때 그 얘기 http://blog.daum.net/jc21th/17780591
항일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 (종합편 2) http://blog.daum.net/jc21th/17780627
방송민주화의 진통과 1990년 ( 1 ) http://blog.daum.net/jc21th/17780624
KBS 한국방송공사창립 40주년 http://blog.daum.net/jc21th/17781645
대한민국 스포츠 50년, KBS TV스포츠방송 50년 http://blog.daum.net/jc21th/17781089 KBS 한국방송공사창립 37주년 기념일에
KBS 한국방송공사 창립 35주년
육성으로 듣는 윤주명, 최창봉 공사창립 그때 그 얘기 http://blog.daum.net/jc21th/17780349
여의도 KBS방송터와 옛 여의도 http://blog.daum.net/jc21th/17780075
여의도 KBS방송터와 옛 여의도 http://blog.daum.net/jc21th/17780075
KBS 방송 개시 86주년 공사 창립 40주년 기념행사와 축시(이경미) http://blog.daum.net/jc21th/17781674
KBS한국방송공사 창립 화보
KBS 김인규사장은 공사창립에 공이 컸던 윤주영 당시의 문화공보부장관에 대해서는 공사창립 37주년을 맞아 그리고 KBS 중앙방송국장으로 공사창립 부사장을 지낸 최창봉님에게는 38주년을 맞아 각각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필자는 공사가 되기전 중앙방송국 대공과에 근무했고 공사발족후 기획관히실 차장으로 공사창립 법규, 사규, 지역방송국 관리, 계열사 관리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위 사진은 공사창립 기념식을 마치고 대공과 직원들이 함께 한 사진이다.
아래 사진들은 KBS초창기부터 오랜세월 TV화면 디자인을 담당한 고 정규봉 사진첩에서 발췌한 것이다. 정규봉선생은 필자와 오랜세원 친분을 이어왔고 세상을 떠나기 전 사진첩과 ID카드등 방송 사료를 필자의 "춘하추동방송"에 넘겨주셨다.
윤후현(팔방미남) 선생님 글
공영방송 KBS의 42년 역사 잘 보았습니다.
1980년 12월 1일 에야 칼러 TV가 방송 되었구만요. 방송이 공정성을 이어 갈 때 그 나라의 민주주의는 살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공직에 몸 담았던 저도 가끔은 KBS가 공영 방송이 된 이 후에도 국영 방송 으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했지 않나 생각을 해 봅니다. 다행이 이 사장님!이 몸담으셨던 춘하추동 방송, 에서 7회에 걸쳐 "방송 민주화의 진통과 1990년!" 이란 제목으로 그때의 상황을 속에서 뒷줄 우측에서 세번째기 이 장춘 사장님!이 아니신지? 짐작을 해 봅니다. 살아있는 KBS 의 역사 교본 같으신 이 장춘 사장님!
1962년 대한민국 땅에 텔리비젼이 10,000대도 안도던 시절 KBS가 TV방송을 실시하고 정부의 특단의 수입조치로 20,000대를 수입하기로 결정하면서 그 텔리비져늘 공급받을 희망자를 모집했다. 그때 KBS가 공개방송 스튜디오로 사용하고 있던 대한공론 3층에서서 희망자를 접수하는 광경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어 차례대로 공개홀에 들어가 접수를 했다. TV방송 초기의 진풍경이다.
1976년 허허벌판이던 여의도에 국회의사당과 KBS 여의도 사옥이 들어 섰다. 이후 여의도에는 동아방송 터가 마련되고 TBC 동양방송이 들어 섰다가 KBS에 통합되었으며 MBC와 SBS가 문을 열어 방송가가 형성되었다. KBS 뒤에 짛고있는 건물은 국회의원 회관으로 뒷날 KBS가 인수, 연구동으로 활용하고 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
'기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KBS대북방송에서 한민족 방송까지 60년 (0) | 2015.03.09 |
---|---|
HLKZ 최초 TV방송국 그때 그 얘기, 위진록 선생님께 보낸 최창봉선생님 편지 (0) | 2015.03.03 |
3.1절! 해방후 첫 삼일절 보신각 종 /2015년 3.1절 96주년에, (0) | 2015.03.01 |
흥남 철수작전 주인공 알몬드 Edward Almond 장군 기적의 배 (0) | 2015.02.27 |
한국방송 88년 특집 JODK 경성방송국 김수일, 안익수, 안정균, 유재창, 김승채, 이장춘 (0) | 2015.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