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마리아 열사! 일생동안 애국 애족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과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가 해방을 1년 여 앞둔 1944년 3월 13일, 53세를 일기로 한많은 세상을 뜨셨습니다. 해방된 나라에서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김마리아 열사의 거룩한 정신을 기리는 "순국열사 김마리아 서거 70주년 기념 학술 토론회" 가 2014년 7월 10일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열렸습니다.
순국열사 김 마리아 서거 70주년 기념 학술 토론회
김 마리아 열사
국회의원 황인자 의원이 주최하고, (사) 김마리아 선생 기념사업회와 국가보훈처, 광복회, (사) 3 ·1여성동지회, 황해도민회, 광산김씨 대종회 정신여자 중고등학교 총동문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사)역사.여성.미래 의 후원으로 열린 이날의 토론회에는 국가보훈처, 광복회, (사)3 ·1여성동지회 등 많은 독립단체회원이 참여한 가운데 김정민, 윤정란, 서굉일, 정현주, 박용옥, 양현혜, 전병무님 등의 주제발표와 토론이 있었습니다. 김 마리아 열사에 관해서는 이날 배부된 기념학술 토론회 자료집에 실린 이 화옥 (사)3 ·1여성동지회장의 축사로 애국자 김마리아 열사의 생애를 읽어 볼 수 있어 그 전문을 올렸습니다.
이화옥 3 ·1여성동지회 회장 축사 전문
김마리아 선열의 70주기를 맞아 선열님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이때 그 의미가 더욱 깊습니다. 세계 여성사을 통틀어 볼 때 김마리아 선열같이 오로지 애국심 하나로 적에게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된 육체를 이끌고 한평생(1892~1944)을 국내 국외에서 애국단체를 조직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에 이바지 하는 한편,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을 한다는 일념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일류대학 과정을 거친 여성은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김마리아의 아버지 김윤방
김마리아열사의 아버지 김윤방은 언더우드의 새문안 교회(1887년 9월)나 아펜젤러의 정동제일교회 (1887년 10월)보다 2년 앞선 1885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교회’ 인 "소래교회"를 세우는데 절대적인 역활을 하신 분입니다. 조실부모한 김열사는 넷째 삼촌인 김필순( 안창호와 결의형제지간) 세브란스 외과 의사의 집에서 고모 네 사람인 김구례(김규식부인), 김로득, 김순애(서병호부인) 김필례와 김마리아의 자매들인 김함라(남궁혁부인), 김미염 등 대가족 안에서 성장하셨습니다. 김필순은 신문내(새문안) 교회에서 서병호와 함께 김규식, 최광옥 ,유동렬 이동휘, 이갑 등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운 분입니다 .
김열사는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참여한 직후 선언문을 몸에 숨기고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이를 수백장 복사하여 전국의 학교, 교회 병원 등에 배부하며 특히 봉건사회에서 잠자고 있는 여성의 독립 운동 참여를 촉구하시어 3 ·1운동 여성참여에 지대한 공을 세우시다가 1919년3월 6일 일경에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코와 귀에 고름이 잡히어 심한 두통을 이르키는 병을 얻어 평생을 고생하셨습니다. 5개월 만에 병 보석으로 석방되시자 만신창이의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1919년 9월 19일 협성애국부인회와 대한독립애국부인회를 통합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조선각도에 지부를 설치하여 활동 한달 만에 그 회원이 무려 2천 여명으로 늘어났고 임시정부에 6,000여 원의 독립 자금을 송달하는 쾌거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중순 회원 52명이 일제히 검거되고 일경은 회장 김 마리아로부터 안재홍 등의 청년의열단과의 관련 여부를 캐내려고 온갖 고문끝에 음부에다 화침질을 하는 성고문을 가하여 그녀의 정신을 황폐화시키었고 끝내 사경을 헤매는 몸이 되어 결국 1920년 5월 병 보석으로 병원에서 신음하고 계신 것을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밀사를 파견하여 그녀를 상해로 탈출시켰고, 임시정부는 김마리아열사를 비롯한 여성들의 조국 독립을 위한 헌신을 크게 평가하여 여성의 동등권을 헌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상해로 망명한 김열사는 한국 여자 유학생들을 집결하여 대한여자청년회를 조직하는 한편 자신도 여성 지도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남경의 금릉대학 (金陵大學)에 등록을 하셨습니다. 당시 임시정부는 ‘개조파’와 ‘창조파’간의 노선 차이를 해소하고자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게 되어 김 마리아 열사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 “항일 독립 운동의 정통성은 임시정부에 있어야 함”을 역설하였으나 끝내는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열사께서 1923년 6월에 미국 유학의 길에 올라 동경여자학원에서 배운 짧은 영어와 지병으로 인한 두통에 시달리며 Park University에서 문학사, 시카고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연수하고 Columbia 대학원에서 교육행정학 석사 학위를 획득한 후에도 뉴욕 신학대학에서 3년간 종교교육학을 연수하여 종교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셨다는 사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초인적인 힘의 결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밖에도 열사께서는 콜롬비아 대학원 개강까지 남은 8개월을 뉴욕에서 만남 옛 동지 황 에스터와 더불어 뉴욕에서 활동하는 인테리 여성들을 결집하여 1928년 2월 12일 뉴욕 한인교회당에서 근화회(槿花會)를 발족시켜 단결과 실력 배양 그리고 외교를 통한 독립 지원을 목적으로 삼았고 또 남성 독립 운동 단체들과 연대하여 만주에 있는 조선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뉴욕재만동포옹호회’의 활동에 리더십을 보이셨습니다.
1932년 김 마리아 선열께서는 남은 인생을 조국독립을 위하여 바치려고 귀국하셨습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강요로 서울을 떠날 수 밖에 없어서 함경남도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 교직을 갖고 심신을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중일전쟁의 암운이 짙어지자 일제는 그녀에게 ‘주거제한령’을 내려 그녀의 행동 반경을 더욱 옥죄었고 그들이 가한 정신적인 핍박과 과로로 지병이 악화되어 세 번의 상악골 수술을 받으셨으나 전쟁으로 인한 생필품 부족 속에서 약품을 구하지 못 해 열사께서는 극심한 신경 쇠약으로 여생을 보내시다가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시고 끝내 1944년 3월 타계하셨습니다.
여성 선열들의 빛나는 3 ·1정신을 계승하고 그 뜻을 기려 조국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에 이 토론회를 주최하신 황인자 국회의원님, (사)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 이연옥 회장님과 관계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의 평안과 건승을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2014년 7월 10일 (사) 3 ·1여성동지회 회장 이 화 옥
황인자 의원 인사말
정신여중, 고등학교 총동문회장 이 송죽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회장 신성애
정신여고노래선교단
국회의원 황인자님과 3 ·1여성동지회 임원들이 함께 한 사진입 니다. 앞줄 좌로부터 박옥란 회원, 안진식님, 이근순 부회장, 김종숙 부회장, 황인자 의원, 박용옥 명예회장, 안성자 부회장, 박춘자 명예부회장, 이외련 명예 부회장, 뒷줄 이숙자, 엄정숙 부회장, 이은경 회원, 강영주 이사, 이정자 부회장, 이미섭 이사, 황순희 이사, 한경자 부회장, 고정순 명예부회장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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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회 항일여성 3 ·1여성동지선열추모식 http://blog.daum.net/jc21th/17781926
삼일여성동지회 임원들입니다. 앞줄 왼쪽부터 황순희 이사, 이미섭 이사, 강영주 이사, 이은경 회원 뒷줄 엄정숙 부회장, 안성자 부회장, 박춘자 명예부회장, 박용옥 명예회장, 이외련 명예부회장, 이정자 부회장, 김종숙 부회장, 이근순 부회장, 한경자 부회장님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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