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방송

JODK 경성방송국 최초의 방송국 설립 그때 그얘기

이장춘 2014. 5. 21. 10:17

 

 

 

이 나라 방송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최초의 시험방송 1924년 12월 10일 그때의

기념사진이다. 노창성(盧昌成)과 이옥경(李玉景,

노라노(노명자-盧明子) 대를 이어 80여 년간 앨범 깊숙이

간직해 오면서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었던 이 사진을 “방송역사를

 새롭게 써가는 「춘하추동방송」에서 꼭 필요한 곳에 사용 해 달라.”는

당부 말과 함께 이 나라 방송역사에 꼭 있어야 할 몇 장의 사진을

함께 보내왔다. 이 사진속의 노창성(0안)은 이 나라 방송의

 창시자요, 노창성의 부인 이옥경은 방송역사의

첫 머리에 올라있는 아나운서다.

 

 

JODK 경성방송국 최초의 방송국 설립 그때 그얘기

 

 

 이 사진을 보내준 노라노(본명 노명자)는

 1928년에 태어나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디자이너로

 오늘날까지 쉼 없이 왕성하게 활동한다. 이 사진에는 그때

방송이 울려나오던 확성기가 있고, 벽에 쓰인 글자, 앞부분이

 잘려 話 試送과 오후 3시라고 쓴 글자가 보이지만 다른 작은

 글자는 필자로서는 판독이 어렵다. 이 글을 판독하면 좋은

 내용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시험방송 때는

오늘날 일상적으로 말하는 방송을

「무선전화」라고 했다.

 

1924년 12월 9일 11시 30분,

오복점 3층에 설치된 기이한 나팔형

확성기에서 기계적인 소리로 전해진 인사말과

더불어 양악, 국악, 피리소리 등이 흘러 나와 백화점

고객과 지나가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체신국 실험실에서

방송한 무선전화!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이었다. 1924년 초, 일본

총독부가 이 땅에서도 방송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졌을 때 실무자로

 선발된 사람이 체신국 공무과 노창성과 일본 구라마에(藏前)2년 선배인

시노하라 쇼죠(蓧原昌三)다. 기술인 한덕봉이 참여한 것은 시험방송이

시작된 뒤의 일이다. 노창성은 일제강점기 조선방송협회 사업부장,

 함흥방송국장, 제2방송부장을 지냈고 6.25 전시 중앙방송국장을

 거쳐 방송관리국장 재직 중 1955년 세상을 떴다.

 

 시노하라는 마지막 경성방송국장을 지내던 중

해방을 맞아 본국으로 돌아갔다. 1924년이 밝아오면서

이 두 사람이 한 팀이 되어 시험방송 중이던 일본 시바우라

(芝浦) 방송소를 견학하면서 시작된 방송준비는 밤, 낮 없이 진행되어

그해 11월 29일 체신국 관리들과 광화문 구락부라고 하는 체신국 출입기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첫 내부 시험방송을 거쳐 12월 9일 11시 30분! 광화문의 체신국과

 京城府 本町 一丁目에 있는 三越 吳服店(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로 1930년에

 새로 지어 미스코시(三越)백화점이 되었고 해방되어 동화백화점이 되었음)

사이 (間)800m를 무선으로 잇는 역사적인 시험방송이 실시되었다. 12월

9일은 특정인들을 초청해서 실시했고 이어 12월 10일 일반인을

대상으로 오전, 오후 두 차례의 시험방송이 있었다.

 

 

  시험방송 광경 조선일보 1924년 12월 10일자 

 

이날의 시험방송에 관해서 1924년 12월 10일자

 조선일보에 그날의 사진과 함께 「공중에 우는 무성악」

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사진은 판독이 어렵고 기사도 「일본뎐보

통신 경성지국 주최로 10일 오전 오후로 열렸다.」는 것과 주최자인

「일본뎐보통신 경성지국장 吉川과 체신국장 原浦의 연설에 이어 연예 오락

 방송의 순서로 진행되다.」라고 한 행사진행상황 그리고 「말소리와

음악소리가 허공으로부터 들어와서 몇 천리, 몇 만리를 격한

사람에게 들린다는 것은 참 생각도 못할 일이다.」 하는

정도의 짤막한 기사로 처리되었다.

 

이때는 누가 방송국을 설립할 것이냐? 가

결정되지 않았을 때라 신문사 등 민간인들도 방송국

 설립에 관심을 가져서 조선일보사가 12월 17일부터 19일 까지

 하루에 3회씩 모두 9회에 걸쳐 시험방송을 실시했다. 첫날은 수표동에

있었던 조선일보 본사와 관철동의 우미관을 잇는 시험방송이었지만 밀려

드는 사람이 많아 둘째 셋째 날은 지금의 조선호텔 앞에 있던 경성회관

으로 옮겼다. 이때는 조선일보의 큰 지면을 할애해서 날마다 

큰 사진과 함께 대대적인 보도가 이루어져 그때의 

방송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과 시험방송의 

실상을 알 수 있다.

 

 

 

1924년 12월 18일 경성공회당의 방송청취상황  

 

 

기사 제목에는「驚異의 눈」,「驚異의 귀」,

「近世科學의 一大驚異」「線畵로 映寫된 神秘한 無電의 原理」,

 「奇蹟, 神秘」등 쓸 수 있는 극찬의 용어로 장식되고 사진에는「줄업는

뎐화에넉을일흔군중」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신문사 등 민간인의 시험

방송은  서울에서 뿐만 아니라 수원, 인천, 개성 등을 이동하면서

실시되었고 방송국 설립을 희망하는 사람도 많아져

체신국에 방송국 설립허가를 낸 단체나

 개인은 11개에 이르렀다.

 

러나 일본에서 이미 한 도시에

하나의 방송국만 세운다는 관례가 생기고

 또 방송은 비영리사업으로 해야 된다는 총독부의

 방침이 수립되면서 방송국을 설치하겠다고 나섰던 개인,

단체들이 하나의 위원회를 마련, 1925년부터 방송국설립에

나서면서 시험방송도 단일화되었다. 그해 6월부터는 광화문

전화국의 뒤뜰에 있었던 체신국 건물의 서고(書庫)

같은 가옥을 실험실로 개조해서 정기적인

 시험방송을 실시했다.

 

매주 일요일과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

주 4회의 정규방송을 실시했고 우리말 방송은 목요일과

 일요일의 절반정도를 활용했다. 음반방송을 비롯해서 실연방송을

하는 등 방송내용을 다양화 하면서 출력도 총독부에서 만든 5W송신기로

부터 시작되어 일제 50W, 100W, 마르코니 400W로 차츰 늘려 방송에 관한

관심을 높여 나갔다. 낮은 출력에도 전파장애를 받지 않을 때라 서울이나

경기지역은 물론 그 인근의 에서도 들렸고 야간에는 일본에서도

들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6년 2월 15일, 자본금 20만원의 비영리

사단법인 창립을 목표로 한 경성방송국 발기인 총회가 열렸고

 식산은행에서 설립자금을 융자받게 되어 식산은행

안에 사무실이 마련되었다.

 

4월 30일 경성방송국 창립총회가 열리고

7월 1일에는 정동 1번지에 방송국 기공식을 가졌다.

 이 무렵부터 시험방송도 더 강화하면서 지금까지 노창성,

시노하라 등 남자들만의 목소리만의 방송으로는 한계를 느껴

여성아나운서 참여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되었다. 그때는 여성의

사회참여가 엄격이 제한되던 때라 여성아나운서를 채용 하는

것이 여의치를 않은데다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 앵무새

 같은 청산유수의 여성 아나운서를 뽑으려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총독부에서는 노창성의 부인

이옥경을 지목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녀가 일본유학을 다녀온 신여성 인데다가

 음성이나 미모가 출중해서 아나운서로서는 적격이었고

노창성의 말이라면 거절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노창성은 이옥경에게 그런 사연을 얘기했고 그녀는 남편을 돕는

 일이라면 방송국에 나가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1926년 7월,

이 땅에서 최초의 아나운서가 된 것이다.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경성일보사 출신 방송주임이기도 했던 일본인 남자 아나운서

미쓰나카와 함께 번갈아 가면서 사회를 보는 가운데

 이 땅의 첫 방송은 막이 올랐다.

 

사람 목소리가 공중에서 날아온다며

장안의 화제꺼리가 되고 특히 부드러운 여성의

말소리에 잠 설치는 사람도 있었으며 많은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방송을 통해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거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방송국을 찾아와 이옥경을 보려고

 밀치다가 유리창이 부서지는 경우가 생겼고 길을 나다닐 때는 인력거를

 활용해야 할 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옥경은 아나운서라는 새로운

여성 직업이 탄생했다는 대 대하서 흐뭇함을 얘기하기도 했다.

그의 아나운서 생활은 1928년 둘째 딸 노명자(노라노)가

태어날 무렵까지 약 2년간 계속되었다.

 

 

그의 딸 노라노는 말한다.

 

 

「아직도 방송 역사를 말할 때는

반드시 어머니 이 옥경 여사의 이름이 오르고

 KBS 아나운서실에는 최초의 아나운서로 이름 석 자가

걸려 있다. 어머니는 82세로 1982년 별세하셨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돌아가신 해까지 매년 방송의 날이 되면 반드시 KBS 방송국에서 연락이

 와서 특별 TV 방송에 출연 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이 땅의 방송창시자

 노창성은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지만 한 일본인 여사장의

 도움으로 만주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이옥경은 이 무렵에

같은 학교를 다니다가 만난 길고 긴 인연이다.

 

 

 

 

만주에서 학업을 마친 노창성은 조선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 유학을 하게 되어 구라마에 공업대학

(당시 명칭은 전문학교)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총독부에서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1943년 지금은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또는

「항일 단파방송 독립운동」이라고 불리는「단파방송사건」으로 자리를 물러나

 1949년 중앙방송국장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6년간 다른 일을 했지만 그 밖에는

일생동안 방송과 함께 해왔다. 노창성과 시노하라는 구라마에(藏前)선, 후배로

만나 방송기술인으로 출발해서 방송국 설립에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경성방송국 개국 후부터는 하는 일이 달랐고 생각도 달랐다.

 

 

 

 

시노하라는 처음부터 해방 될 때 까지

 기술 총책으로 있었고 「단파방송사건」으로

물러난 경성방송국장 자리를 겸직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방송협회에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에 흩어져 살던 분들을 연결해서 1972년 「조선방송협회」를 결성

하고 해마다 모임을 가져 왔으며,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서 방송을 하던

얘기며 살았던 얘기, 또 패망 후 우리나라에서 철수 하던 얘기, 일본에서

살아온 얘기들을 엮어 1981년, 「조선방송협회 회상기」라는 책을

 발간해서 국내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다. 1970년대 80년대에

 우리나라에도 몇 번 다녀 간적이 있고 정동 1번지에 있는

첫 방송터 유허비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 있지만 1986년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떴다. 향년 90세.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스마트폰이니 카톡이니하여 이 지구

어느 곳에서도 즉각 즉각 서로 통신을 하고있는

 상황도 참 대단한 요즈음이지요. 제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전파를 타고 흘러 나오는 방송을 처음 듣는 국민들의

반응이 상상됩니다. 귀중한 자료를 믿고 맏겨오신 결정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구술은 꾀어야 보배이듯이, 이런 자료들도

공개되지 못하고 깊숙히 간직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노라노 여사님과 춘하추동의 이장춘 국장님의 인연이

 더욱 귀한 인연으로 생각됩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왕수복 아리랑.mp3

 

왕수복 아리랑.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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