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방송인협회

꿈 많던 그때 그 시절 그사람들 복혜숙 여운계 오현주 (아씨 동영상) / 양방수님 글, 사진

이장춘 2014. 4. 15. 03:39

 

 

 

오래전에 양방수 미주방송인협회

총무국장님으로부터 이메일 한편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시절, 그사람들, 이분들은 복혜숙, 오현주, 여운계

등을 일컿는 말입니다.  꿈많던 시절 양방수님의 꿈이 무엇이었

는지를 말해주는 사진과 글입니다. 그때 그 시절 그 사람들 글과

사진은 양방수님이 보내오신 그대로 올렸습니다. 이 글에 맞는

노래를 찾다가 지금 듣고 계시는 노래를 찾았습니다.  이 글과

 너무 잘 어울리는 듯 합니다. 노래부르는 분 성함을

쓰고 싶은데요.......................

 

방송의 역사를 쓰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 사진과 글을 받으면서 양방수님과 많이 통함이

있었고 친근 해졌습니다. 20대의 꿈많던 시절의 빛바랜

사진 이제 양방수님도 70이 넘으셨어요. 20대에 촬영한

 사진을 세월이 지나 70대에 보는 감회! 누구나 생각 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젊은시절 꿈에 살다가

 나이들면 추억에 산다"  딱 맞는 말입니다.

 

 

세분 방송과는 깊은 인연있는 분들입니다.

 

 

최초의 영화배우이고, 최초의 방송극

 출연자 복혜숙!  방송계에서는 "방송할머니"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시대를 살아오신

 분들에게는 모두에게 익숙한 분입니다. 오현주 한시대를

풍미한 미인이지요. 그가 1959년 미쓰 진으로 뽑히면서 광화문을

중심으로 세종로, 태평로, 종로거리에서마 퍼레이드를 벌리던 시절 그를

보러 나온사람들로 연도를 매웠습니다. 지금은 그리 할 수도 없고 그리 하지도

 않지요. 영화계에서 방송계에서 늘 바쁘게 활동했습니다. 그 시대에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여운게! 1950년대 학생시절부터 TV에 출연하면서 시작된

연에인으로서의 인생은 방송이나 TV, 영화 등늘 바쁘게 살다가 가셨

습니다. 가시던 그해! KBS는  연기대상 공로상을 수여했습니다.

일생동안 온갖 힘을 기울인 분에게 주는 상(賞)입니다.

 

 

1957년 사진 한장을 올렸습니다. 복혜숙, 김영수. 김희갑등, 그때 그 사람들이 방송극(라디오 드라마)을 녹음장면  

 

 

 

꿈 많던 그때 그 시절 그사람들 / 양방수님 글, 사진 

 

 

 

 

 

   

빛 바랜 50년전의 사진첩을

 정리 하다 보니 주마등 처럼 스쳐가는

꿈 많던 그때 그시절 함께 활동하던 추억어린

장면이 떠오른다. 이 사진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사람은 무엇을 생각 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한데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살았는지 자문해 본다.

 

여운계, 오현주. 복 혜숙여사 이분들은

 한 시대를 불처럼 꿈을 이루고 살다가신 분들

이라고 생각 되어진다. 여 운계(呂 運計, 1940년 2월

 25일)여사는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무학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인문과학대학 국어국문학과를 다닐때에

영화에 출연하기 위하여 열심히 현장을 뛰었다고 생각 되어진다.

무학여자고등학교 재학시절 방송반 및 합창반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학시절에는 대학극회 단원으로 연기 활동을 시작하여

박근형과 함께 대학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다.

 

 

 

맨뒤 검정 옷을 입고 바라 보는 여운계 여사의 모습

 

 

1962년에 실험극단 단원으로 지내다가

같은해에 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하였다. 이후

1964년에는 TBC 공채 탤런트에 다시 합격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일일 연속극 《눈이 나리는데》(극본 한운사, 연출 황운진)의

 시골 다방 마담역으로 안방극장에 데뷔했던, 呂 運計여사도 2009년 5월

 22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003년 9월 15일부터 2004년

 3월 23일까지 방송된 문화방송의 대하드라마《대장금(大長今~극본

 김영현, 연출 이병훈)에 정말금(丁末今, 큰상궁)역으로 열연한

 여 운계 여사의 모습은 아직까지 대중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사진으로 본 여운계 연기인생

클릭 사진으로 본 여운계 연기인생 48년

 

 

 

한국의 美를 세계 만방에 자랑했던

미스 코리어 오 현주 여사다. 미스코리아는

1957년 5월 19일에 서울특별시 중구의 서울 시립극장

에서 열린 첫번째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로 본선에는 예선을

 통과한 7명이 참가하였고 첫 대회부터 진 당선자는 미스

유니버스에 참가하는 영광을 차지 하였다. 헉 춥고도

 추운 겨울 한편의 영화 제작을 위해 김포공항에서

 추억어린 사진이다. 헉

 

 

오른쪽부터 오현주, 복혜숙, 양방수

 

 

 이듬해 1958년 5월 2일에 서울특별시

 중구의 대한극장에서 열린 두번째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였고, 세 번째 1959년 미스 코리아는 1959년

 5월 25일에 서울특별시 중구의 서울시립극장에서

 열린 세번째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이다.

  

 

오현주(왼쪽)와 양방수

 

 

제 2,3대 국회의원을 지내신 오 위영

선생님의 2남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오 현주

 여사는 1959년 이화여대 재학 당시 패션 디자이너 노명자

(노라노)씨의 눈에 띄어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했다. 163㎝에

45㎏의 몸매와 빼어난 미모의 오 현주 여사는 3회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眞으로 뽑힌 뒤 같은 해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에

출전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인기상과 스피치상

 4개 부문 상을 휩쓸었다.

 

   

 

 

 

眞에 당선된 오 현주 여사는 미스 유니버스에

참가하여 3개 부문에서 입상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진(眞)을 거머쥐고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미(美)를 알렸던 오 현주 여사도 2010년 5월

11일 오전 2시15분 숙환으로 자택에서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클릭 미스 코리아 오현주 관련 이미지 

 

 

한국영화의 어머니로 불리는 복혜숙(본명

 복마리아)여사는 1904년 4월24일 동대동에서 후일

감리교목사가 되는 아버지 복기업씨와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셋째딸로 태어나셨다고 한다. 1919년 이화여자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한

복혜숙 여사는 수예선생이 될 생각으로 16세에 일본에 건너가 요코하마 기예학교에

 들어간 복혜숙 여사는 뛰어난 솜씨로 만든 물건을 내다 팔아 적지 않은 용돈을 벌었지만,

그 돈으로 극장에 출입하면서 각종 공연과 영화에 빠지고, 무용수가 되려고 사와모리 무용

연구소에 문하생으로 들어가 반년 동안 궂은 일을 했다고한다. 그러던 중 소식이 끊긴 딸을

 찾으러 일본에 온 아버지에 의해 고국으로 끌려왔다고 한다. 귀국한 뒤 아버지가 세운

 강원도의 금화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서울로 올라가 1920 

당시 단성사의 인기 변사인 심 덕경씨의 소개로 김 도산씨를 알게 되고,

1921년 복 혜숙 여사는 복마리아라는 이름을 이 혜경으로 바꾸고

김 도산이 이끄는 신극좌에 입단하게 되었다고한다.

 

 

 

 

1924년 일본에서 유학한 현철이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를 세우자 복 혜숙 여사는

이곳에 들어가서 우리나라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 배우학교는

입센의 <인형의 집>을 공연하고 내분에 쌓인 채 문을 닫게 되지만

 복혜숙 여사는<인형의 집>에서 노라로 출연해 호평을 받고 이월화가

 빠진 토월회의 전속여배우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이때 예명도 이혜경에서

 복혜숙으로 바꿨다고 한다. 복혜숙 여사는 토월회가 공연한 <춘향전>의

 '춘향' 역으로 이월화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됐지만, 내부의 문제로

인해 토월회는 휴면기에 들어갔고 복혜숙은 무대를 떠나

조선권번의 기생으로 일하며 영화에 출연했다.

 

복혜숙 여사는 비중 있는 역으로 처음 출연한

영화는 <농중조, 1926년>였고, 그 뒤, 복혜숙 여사는

 <홍련비련, 1927년>, <낙화유수, 1927년>, <세 동무, 1928년>

등의 작품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다. 복 혜숙여사는 <아리랑, 1926년>의

 신 일선씨와 함께 20년대 최고의 스타로 변신하였다. 복 혜숙 여사는 1928년부터

 8년간 비너스라는 다방을 운영했는데 비너스에서는 낮에는 차를 팔고, 저녁에는 바를

운영하며 춤을 추는 무도장을 겸했는데 조선총독부에서 무도장을 허가하지 않자

 1937년 1월 '삼천리'에 복혜숙 여사를 비롯한 서울의 유명한 기생들이

 '서울에 댄스홀을 허락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고 한다.

   

비너스를 운영하면서 복 혜숙여사는 1929년

 다시 문을 연 토월회의 무대에 섰고, 영화에도 계속

출연 하면서 1926년부터는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에서

 방송극을 쓰고 출연을 했고. 30년대부터는 <그대 그립다> <종로행진곡>

유행가 음반을 취입하였다. 한마디로 이 시기 복 혜숙여사는 다방면에서

 최고의 인기와 함께 여성으로서 선각자의 길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평생을

배우로 살며 무대와 카메라 앞에서 살아온 복 혜숙여사는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마지막 영화는 <이장호 연출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 1981년>

였다. 말년에 창덕궁 낙선재에 출입하면서 이방자 여사와 칠보

 장식물을 만들며 소일했던 복 혜숙 여사는 1982년 10월

5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동시대를 살았던 여배우들이 어렵고 힘들게

여생을 보냈던 것에 비하여 복 혜숙 여사는 후배

영화인들의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평소

 후배들에게 어머니라고 불리었던 복혜숙 여사는 평생 한국영화를

지켜온 한국영화의 어머니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미스 코리아 오 현주 여사의 사진 더보기 싸이트는 아래를 크릭 하세요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5we&logNo=150082780798

 

 

TBC-TV에 출연한 문화인들 우로부터 오현주(미스 코리아) 한사람건너 조경희, 유한철, 사회 박종세,
 
 
1970년 돌풍을 일으킨 TBC TV 마지막날 좌담회에 나온 복혜숙, 여운계여사 
 
 

 

 

아씨 프로그램에서 열연하는 김희준과 여운계탤런트

 

 

 

 

 

 복혜숙, 여운계 동영상 1970년의 돌풍 TBC아씨

 

 

전           편

 

 

 

후             편

 

 

 

 

아씨를 끝내면서 출연진 특집좌담

 

 

 

 

 

여운계 여사가 세상을 떠난 2009년 그에세 연기대상 특별공로상이 추서되었다  

 

 
 

 

해운대 엘레이지.mp3

 

 

  

해운대 엘레이지.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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