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살고 있는 방배동 집 부근에 청권사가 있다. 대한민국의 성씨 가운데 김 씨가 천만이 넘고 그 다음으로 이씨가 750만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500만이 전주 이 씨이고 또 그 10%가 효령대군 파여서 대한민국의 단일종파로는 제일 많은 사람들이 이 종파에 속해 있을 것 같은 생각이다. 필자가 효령대군파는 아니어도 집 가까운 곳에 있다는 인연과 KBS 원주방송 국장을 지내고 청권사 문화부장, 대의원, 이사 등을 역임한 이후재 시인의 초청으로 청권사는 물론 신년하례, 효령상 시상 등 여러 행사에도 종종 참여하다 보니 쓸 얘기들이 많아졌다. 사진은 여러차례에 걸쳐 촬영되었다.
청권사(淸權祠) 효령대군 사당 부묘 서울 유형문화재 12호 우면산 올레길 (2)
전철 2호선 방배역 4번 출구로 나오면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2호 청권사가 보인다. 청권사의 정문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3층건물 기념관이 있고 왼쪽으로 아담한 연못이 보인다. 그 연못 뒤로 제실 모련재가 자리하고 있다. 그 모련재 오른쪽에 돌 거북 등 위에 효령대군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오른쪽으로 오르면 잔디밭으로 조성된 효령광장이 있고 여기에 연강단이 있으며 효령대군 비각과 오석에 개겨진 효령대군 송가비가 있다. 여기서 오른쪽을 보면 잘 가꾸어진 계단길이 있다. 이 길을 오르면 효령대군 묘가 있다. 잘 다듬어진 잔디 위에 석등 등 여러 석물이 자리하고 있다.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3층건물 효령대군 기념관을지나 계단따라 오르면 청권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사당이 있다. 지금은 공사중이어서 사진은 그 전에 촬영한 사진을 활용앴다. 그 청권사 옆에 신도비가 있다. 모란재 옆에 있는 신도비 와 더불어 두곳에 신도비가 새워져 잇는 것이다. 계속 올라가면 큰 소나무 군이 있고 그 길을 돌아 효령대군 묘소에 오를 수도 있다.
청권사 정문과 안내판
제실 모련재와 연못
모란재 옆에 효령대군의 업적이 새겨진 신도비와 신도비 내용을 쓴 오석으로 된 비가 있다.
잔디로 조성된 효령광장에 비와 비각이 있고 원래 효령대군 묘소 앞에 있던 비각을 이곳으로 옮긴 연유와 묘소를 가꾼 내역등이 쓰인 안내석과 후손들이 8천만원을 모아 나무를 심는등 묘를 가꾸었다는 헌수비가 있다. 옆에는 연강단과 효령대군을 찬양하는 오석으로 된 송가 석비가 있다. 송가석비는 오석에 글자를 새긴 것인데 사진으로는 잘 보이질 않아 변조 했더니 이런 모양이 되었다. 이곳 효령광장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돌계단 위가 효령대군 묘소다
중앙에 석등이 있고 제단이 있다. 앞에서 보아 왼쪽이 효령대군이고, 오른쪽이 예성 부부인 해주정씨의 묘다.
서울 시에서 새운 유형문화재 12호에 대한 안내게시판이다.
3층으로 된 기념관 1층은 사무실이고 2층에 사무실과 영상실이 있다. 3층 전시실에 들어서니 입구에 효령대군의 큰 영정이 모셔져 있고, 그 옆에 효령대군의 할아버지 태조(이성계)의 어진이 있다. 안에 들어가니 업적을 설명하는 오디오를 들으며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었다. 개인은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자유로히 관람할 수 있고 단체는 사전에 연락 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토요일, 일요일을 포함한 공휴일은 휴무다.
사당 청권사와 신도비다. 청권사 현판은 정조대왕이 내려주셨다.
숭조돈종 (崇祖惇宗)은 전주이씨의 기본 정신이다. "조상을 숭배하고 종친끼리는 항상 두터운 정을 갖고 살아라."는 얘기다.
효령대군의 문화 애호와 효도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고 국가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해 해마다 효령상을 주고 있다. 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대상자을 선발해서 시상한다. 사진은 2011년 13회 효령상 시상 모습으로 이때의 수상자는 문회부문에 금난새 예술감독, 언론부문에 이도형 한국논단 발행인, 사회 봉사 부문에 김길자 경인 여자대학 명예총장, 효행부문에 정동일 사단법인 한국 효도회 회장이각각 수상했다.
사회 봉사 부문 효령상을 받는 김길자 경인 여자대학 명예총장
청권사에서 해마다 정기적으로 여는 행사는 효령상 시상 외에도 신년하례, 효령대군 기신제에성부부인 기신제, 효령대군 묘제, 오태영당 제향, 효령각 참배등이 있고 청권사에서 여는 효령대군 기신제 날에는 인근의 주민들도 함께모여 대군을 추모한다. 위 아래 사진은 2014년 신년하례식모습으로 이 때는 전국의 효령대군파 후손들끼리 새해 인사를 나눈다. 효령대군파가 아닌 필자는 전주이씨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이자리에 처음으로 참여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조선왕조 제 3대 태종의 둘째아들, 제 4대 세종의 바로 윗형 태조때 태어나 91살까지 살며 많은 업적을 쌓고 성종때 세상을 떴다. 이름은 보(補). 초명은 호(祜). 자는 선숙(善叔), 호는 연강(蓮江).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다. 1407(태종 7) 효령군(孝寧君)에 봉해지고, 1412년에 효령대군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세자의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하고 불교를 숭상해서 원각사를 세우는데 공헌하고 관악산에 올라 나라의 평온과 동생 세종대왕의 건승을 비는 등 좋은일들을 믾이했다. 이런 애기들은 다른 문헌에 많이 있으므로 생략하고 2013년 10월 25일에 발행된 "청권사보" 제 92호에 전 KBS 원주방송국장, 효령대군 후손 이후재시인이 쓴 "효령대군이 북을 치는 까닭은?" 이라는 글 이 있어서 그 일부분을 올린다.
....경복궁을 뒤로하고 걸어 나온곳이 지금의 방배동이다. 궁궐과 등을 돌렸다고 해서 방배(方背)가 아닐까? 여기서부터 효령대군의 불자로서의 효령대군의 산행은 출발했다. 산수가 깊고 아름다운 관악산에 올라 대궐을 바라보며 쿵 쿵 쿵 북을 치기 시작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악귀를 물리치고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합니다. 둘째 왕실의 안녕과 성군의 출현을 기원함이다. 샛째 관악산의 기를 받아 무병장수를 기원함이다. 신기하게도 대군의 이러한 기원은 백 퍼센트 목표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효령대군의 이런 기원때문에 그 이후의 조선왕조는 정치적인 안정을 찾아 5백년을 이어나왔고 동생 세종대왕은 훈민 정음을 창제해서 백성들에게 문명생활으리 토대를 만드는 등 우리 5천년 역사에 성군 으로 우뚝 솟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효령대군 자신은 부처님의 음덕과 산의 정기를 듬뿍 받아 90이 넘도록 건강한 몸으로 전국 사찰을 순회하면서 불사를 이루고 배푸는 인생길을 걸어오지 않았는가?
이상 이후재시인의 글에서 인용했다.
아래 사진이 오늘날 관악산 연주대 모습으로 KBS 관악산 송신소장 출신 관주 김광일님이 촬영한 사진이다. 관악산의 연주암과 연주대는 원래 신라 문무왕 17년 (677년), 의상대사가 이 부근에 관악사를 창건할 때 함께 세운 것으로 의상대라 불렀다고 하지만 뒷날 이름이 연주암으로 바뀌었다. 그 이름이 바귄데에는 여러 얘기가 있고 효령대군이 이곳에 올라 왕궁을 바라 보았다는 데서 연주대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이 연주대를 찾는다. 과천에 살았던 필자도 자주 들리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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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효령대군과 제 13 회 효령상 시상 http://blog.daum.net/jc21th/17780598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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