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이창득 항일단파방송 독립운동 건국포장 이준순 풍전실

이장춘 2013. 8. 23. 03:44

 

 

 

일제 강점기 말 목숨을 걸고 단파방송

밀청사건이라고 불린 지하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창득은 1993년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받았다. 독립운동을

벌리던 때의 이름은 이창득이었고 끌려가 고문을 받으며 옥살이를

하던 때의 이름은 일제가 임의로 만들어 놓은 이름 풍전실(豊田實)

이라고도 불렸지만 해방되어 조국의 품안에서 일을 시작

하면서 이준순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창득 항일단파방송 독립운동 건국포장 이준순 풍전실

 

  

2차 대전 중 가장 강력했던 지하 독립운동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 350여명의 인사가 끌려가

갖은 고문을 받으며 조사를 받았고 지금까지 확인된 수형자가

 78명이다. 이 가운데 6명이 옥 안에서 또는 옥에서 사경에 이르러 출옥 후

바로 새상을 떴다. 그 수형자 가운데 한분, 그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금고형을

 받은 분이 경성방송국 보수과 소속이었던 이창득이다. 1914년 1월 20일

 서울 황금정 지금의 을지로 6가에서 출생, 배제중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에 건너가 나노중학을 수료했다.

 

 

 

 

조선에 돌아와 조선무선공학 라디오 강습회를

졸업하고 서울시내에서 라디오방을 자영하면서 라디오

제조와 고장수리등의 일을 하다가 1938년 4월 조선방송협회

 주지과 직원으로 입사했다. 라디오를 자유자재로 만들 줄 알았던

이창득은 단파수신기를 만들어 해외방송을 들었다. 해외방송을

들을 수 있는 단파수신기였지만 겉으로는 국내방송을 듣는

일반라디오와 똑같이 제조되어 헤드폰을 통해서 들을

때는 국내방송을 듣고 있는것처럼 보이던

그 라디오를 만들어 활용했다.

 

미국이나 중국에서 들려오는 방송은

일본이 일방적으로 펼치는 선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본은 백전백승을 외치며 일본의 전쟁대열에 나서 줄 것을

호소하지만 해외에서 들려오는 단파방송을 들으면 일제는 패하고

우리가 힘을 모아 일제에 항거 하면 독립의 날이 멀지 않았다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방송국 동료직원들끼리 극비리에

얘기를 나누고 그 얘기들이 주위에 알려지고 또 독립

운동가 들에게 전해져 독립운동 기초로 삼았다.

 

 

 

 

밑도 끝도 없는 소문 속에 당황한

일제가 방송국을 덮치고, 독립 운동가들을

채포했으며 라디오 상회, 부속품상회 모두 핍박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 1943년 5월 30일 이창득의 집을 습격해서 라디오 등을

압수하고 이창득을 채포했다. 한달 여가 지난 7월 6일 사상범이라는 

어마 어마한 죄목을 붙여 구속 기소되었다. 비밀리에 일방적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1943년 9월 2일 8개월 금고형을 받았다. 복심을 신청했지만

 받아드려지지 않아 그대로 8개월의 금고형을 살고 1944년 6월 2일

 출옥해서 국내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던 이창득은 만주로

거기에서도 라디오를 만들어 해외방송을 청취하며

지내다가 해방된 후에 국내에 돌아왔다.

 

 이창득은 1966년 한국방송인 동우회(방우회)가

 창립되던 때로부터 방우회 회원으로 활약했고 1987년

첫 방송터 유허비나 단파방송 연학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여의도 KBS에 세운 물망비 건립에 힘을 보탰으며 그 기공식

이나 준공식에도 참여했던 인사로 1993년 광복절을 맞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1994년 12월 세상을 뜨시기

까지 나라사랑, 방송사랑에 힘을 기울이셨다.

 

이창득의 아버지 이동선은 흥사단

창단요원이다. 이창득이 출생하기 직전 상해로

 가 10여 년간 임시정부에서 이 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한 독립 운동가다. 이창득은 대를

이은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수형자중 유일하게 징역형이 아닌

금고형을 받은것도 이와 유관 할 것이라고 한다.

    

이창득에 관한 내용은 보훈처 공적심사

 기록서도 있지만 그 이전에 유병은선생이 쓴 “일제하

경성방송국 단파방송연락운동에 자세히 나와 있다. 단파방송

연락운동가들을 자주 만났던 유병은 선생은 각종 신문조서나 재판

기록, 또 본인과 주위 분들의 증언을 정리했고, 2007년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 발간한 한민족 독립운동사 자료집 70 중 한권의

 책으로 "대일항쟁기 단파방송 사건" 이 발행되어 있다.

이밖에도 여러 문헌들이 있음을 본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성명

이창득

생존기간 1914. 1.24 ~ 미상
출생지 서울
운동계열 국내항일
훈격(연도) 건국포장 (93)
공적내용 서울 사람이다.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保修課) 기술원(技術員)으로 재직 중이던 1942년 12월, 외국의 단파방송을 수신하여 서울 아현동의 동지에게 "일본은 물자가 부족하여 패전할 것이고 연합군이 조선독립을 지원할 것이므로 독립의 호기를 맞아 조선인은 협력해야 한다"는 요지의 방송내용을 전했다는 이유로 피체되어, 1943년 9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무선전신법, 육군형법, 해군형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29일 경성복심에서 금고(禁錮) 8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에 수여하였다. 註·判決文(1943. 10. 29. 京城覆審法院)

 

 

 

관련 글 더 보기

 

 

일제강점기 단파방송 독립운동가 이창득의 재판원부

http://blog.daum.net/jc21th/17780943

 

일제강점기 단파방송 독립운동 수형자 명단

http://blog.daum.net/jc21th/17780946

 

 

  

 

 

 

1981년 10월 24일 우이동 계곡, 그로부터 벌써 3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이인과 검거선풍-1.w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