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과 독립운동 단파방송 청취사건

이장춘 2013. 5. 3. 21:23

 

 

 

서대문 향무소!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치가리는 대명사다. 구치소에서

고문에 못이겨 사경이 이르고 재판을 받아 옥살이를 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살아졌던 그곳, 형무소가 지금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탈바꿈해서 모든사람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이

역사관을 돌아보다가 필자에게는 특별한 테마를 발견했다.

 "단파방송 청취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인 그 테마,

위 사진이 그 테마내용이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과 독립운동 단파방송 청취사건

 

 

필자는 여기서 "단파방송 청취사건"으로

 이름해서 전시한 내용을 " 단파방송 독립운동"

이라는 내용으로 40여편의 글을 써, 본 "춘하추동방송"

블로그 한테마를 설정해서 글을 올린적이 있어서 이곳에 와

위 전시 모습을 보고  그때의 애국지사들이 받았을 고문현장을

모형으로나마 돌아보고 또 선열들이 생활했던  감옥을 목격하며 

감회가 한층 더 새롭다. 전시내용을 처음 보신 분들은 내용을

이해하시기 어려운 부문이 있으실 것이기때문에 나름대로

알기쉽게 사진을 편집하고 내용을 붙인다.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해서

모든 민족지 신문과 잡지가 폐간되고

해외방송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를 몰수해서

암흑세계를 만들고 일방적인 선전만을 일삼던 일본에

항거 방송인들이 행외방송을 듣고 독립운동가들에세 그리고

이웃 친한사람들에게 알려 독립운동의 기초자료로 제공되고 또 해외의

세상 돌아가는 소문이 퍼지면서 일본을 어렵게 했던 이 일이 탄로나 1943년

1년간 400명에 달하는 인사가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으며 고통을 받았고

 80명에 달아는 인사가 형 언도를 받게 되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6사람의

 옥사자를 낸 지하독립운동 그 일을 일컬어 "단파방송 청취사건" 또는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이라고 한다. 이분들 가운데 네분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세분이 포상을 받았다.  2012년

11월 17일 73주년 순국선열의 날에 애족장을 받은

이근창 애국지사도 여기에 해당된다.

 

 

 

 

개성방송국 직원들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이사진은 실은 1943년 경성방송국 지휘소(지금의 조정실)

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춘하추동방송에서 여러차례 소개된 사진이다.

 이이덕, 김두식, 이남용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역사관에 전시된

내용에는 세번째 분이 성기석이라고 소개되어있다. 이이덕은 개성방송소 소장으로

 단파방송 청취사건의 핵심인물이었다.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사경에 이르려 가석방

되었지만 얼마 안있어 세상을 떴기에 옥사자로 분류되고 있지만 아직 포상은 없다.

성기석 역시 이 사건의 핵심인물로 2년형을 받았다가 형기가 만료되기전 해방

되어 해방되던 다음날 석방되었다.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이남용은 우여곡절끝에 형은 면했지만 어려움을 겪었다.

 

 

 

 

 

 

1964년 9월 20일자 실린 송남헌의 글.

조선일보 지면 화면 통해 큰글씨로 자세히 볼 수

있다. 단파방송 청취사건 핵심인물로 8개월의 형을 받았다.

주변에서 포상신청을 하라고 했지만 입법의원 비서실장을 지내던

시절 김구선생님 따라 남, 북을 넘나들며 뜻밖의 문제가 된 일이

있어서 포상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분이 쓴 자서전

내용이 있고 KBS에 방송출연 육성도 있다.

 

 

 

 

 

 

1944년 6월 14일자 중경 임시정부에서

방송을 하고 있던 그때 국민보에 난 기사내용

다. 알아보기가 힘들것 같아 선명한 화면으로

했지만 완전하지는 않아서 다음 들리는

기회에 내용을 더 보완 할 것이다.

 

 

 

 

 

 

애산여적에 올라있는 글.

이인선생은 허헌, 김병로와 함게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고 변호사 개업을 했지만

그 사무실이 실제로는 독립인사들의 연락사무소였다.

암흑세계가 되었을때 해외의 유일한 소식원이 방송국에서

단파라디오로 들은 해외소식이었다. 건국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이인님은 신문지상에 그 내용을 기고했고 저서 애산여적에

그 글을 올렸다.  끝 부분에 그 글을 연결했다.

 

 

 

 

 옥중에서 촬영된 이 사진들은 필자가

처음본다. 송진근은 1936년부터 경성방송국

아나운서로 있였다. 이 사건으로 1년형을 받았지만

유치장에서의 기간을 포함하면 2년여을 감옥에서 보냈다.

비록 죄수복은 입었지만 당당한 모습을 볼 수있다.

이 일로 경성방송국을 떠났지만 해방 후에도 

방송출연 등 방송국과 인연이 있었다.

 

 

 

 

 

 

아동문학가 송남헌 방송국과

독립운동가와의 연결고리가 되어 연락책을

맡았다.핵심인사 송남헌은 해방후 이 일을 널리

알렸고 자료를 모으는 유병은 선생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단파방송청취사건을 재 정립하기 위한 세미나에도

 참여했고물망비를 세울때도 참여했다. 조선일보에

기고되어 이곳에 전시된 위의 글을

 쓴 주인공이다.  

 

 

 

 

허헌! 필자가 언급하지 않아도 다 아는 인물이다.

북한정권 창설을 주도한 김일성 다음가는 인물로 6.25 직후

익사했다. 북한의 거물급 인사라 입에 오르 내리는 것이 금기시

되기도 했던 허헌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서 헌신한 인물

이다. 단파방송 청취사건으로 2년형을 받아 옥살이를 하던중 몸이

허약해져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해방될때까지 얽메인 상태로

지냈다. "단파방송으로 해외소식을 알지 못했더라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을것" 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다음은 2015년 7월 24일

KBS사우회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돌아보고인수회원이

집필해서 2015년 8월호 회보애

실린 내용이다.

 

 

항일기치 높이 든 방송인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2층 민족저항실.

이곳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료를 비롯해

 단파방송 밀청사건 자료들이 벽면에 전시돼있다.

가로 1.2m 세로 3.5m의 벽지에 사진과 함께 사건의

내용이자세히 적혀있다. 광복70년 이제는 그 때의 아픔이

 아물 만도 한데 그 흉터가 더 깊어지는 것만 같다. 7월의 뜨거

운 태양도 아랑곳없이 이곳을 찾는 발길이 뜨겁기 때문이다. 학생

들의 무리가 제복차림의 학예사를 따라 민족 저항실로 들어섰다.

그들은  단파방송 밀청사건 전시자료 앞에서 발을 멈췄다. 부평

고등학교 일어동아리 학생들이라고 했다.그들의 눈동자는

 경성방송국 청사와 밀청사건을주도했던 방송국

직원, 사건 판결문에 집중됐다.

 

 

눈빛과 눈빛이 부딪침 속에서 가느다란

 수군거림이 귀에 들렸다. “방송 들었다고 잡혀갔대.”

어린그들 눈에도 일제의 만행이 수긍이 안 가는 모양.

이렇듯 일제는 식민통치를 위해 철저하게 민족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틀어막았다. 이때 일어선 선열들이 KBS전신인

 경성방송국의   이이덕, 성기석, 김동하, 염준모 등을 중심으

로 한 기술직 직원들. 이들은 자체 제작한 단말 기로 중경방송과

미국의 소리(VOA)방송을 몰래 청취해 승기를 잡은 연합군

소식과 일본군의 불리한 전황을 전파했다.

 

일제가 우리민족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 신문잡지를 폐간하고 방송은

오로지 제국주의 선전도구로 전락시킨 후라 방송

인들의 단파방송 밀청은 임시정부의 활동이나 연합군의

전황을 들을 수 있는 비밀 통로였다. 특히 이들은 중경방송의

 임시정부 활동과 독립군 활동소식,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2000만 동포에 고한다' 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몰래 전파해 국내의 독립 인사들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송한 '미국의

소리'방송은 자유의 종소리와 함께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지금부터 미국에서 보내드리는 자유의 소리 방송을…” 라는

투른 우리말 멘트와 함께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비밀조직들이 일본군 정보를 빼내 연합군에 제공한다는 내용과 산서성 등

북중국일대에서 유격전으로 독립군이 일본에 타격을 주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독립군이 하나의지휘체계로 단일화 했다는 등의 중경

방송을 단파수신으로 국내에 전파했다.

 

 

허나 이러한 활동도 오래가지 못했다.

1942년12월말 낌새를 눈치 챈 일본 고등계 형사의

 미행에 꼬리가 잡혔다. 이 사건으로 무려 150여 명이

검거되어 조사를 받거나 구속 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때 검거된 경성방송국 기술직 직원인 이이덕, 성기석,

김동하, 염준모, 박도신이 유죄판결을 받아 복역했다.

또한 아나운서인 송진근, 이계원, 손정봉, 서순

원, 이현, 박용신, 서정만이 구속됐지만 송진근

과 손정봉, 박용신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편성원인 이서구, 모윤숙, 김동익, 김정관,

제현이 체포됐으나 양제현만 유죄판결을 받았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 연구원 간 참조).

이 사건은 방송인들이 국권을 빼앗겨 노예 신세로 전락한 민족에게

자주의식을 전파한 독립운동의 큰 모멘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전시실 2층 민족저항실에 보관된 단파방송

밀청사건 자료는 당시 경성방송국 청사 사진을 비롯해 체포됐던 기술직

직원들의 단체 사진, 중경 단파방송 내용을 소개한 1944년 6월

4일자 국민보 기사, 단파방송 밀청사건을회고한 조선일보

 기사(1964년 9월 20일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직업

능력 신고수첩, 국사편찬위원회의 판결문

발췌록 등이 보관돼 있다.

 

 

서대문 형무소, 1908년 건립 당시에는

 정치범수용을 위한 감이었지만 지금은 일제의

국권침탈을 증언하는 역사관으로 변신했다. 독립투사들

의 옥사와 작업실, 형틀과 교수대 그리고 현장의미루나무가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어린 고등학생들의 눈을 의심케 했던

 일제의만행, “방송 들었다고 잡혀갔대.” 이것이 일제가

한반도 침탈과 식민지 정책의 실체였다. 그것은

다시는 그런 치욕의 역사를 쓰지 말라

는 광복 70년의 생생한 증언이 아닐까.

 

 

 

서울 형무소 역사관 찾은 KBS사우회 임원진

 

 

 

더 자세한 내용은 본 블로그

태마 "단파방송 독립운동"에 있고

그 중에서 몇편을 연결한다.

 

 

항일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 (종합편 2)

http://blog.daum.net/jc21th/17780627

 

이인선생님이 쓰신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

http://blog.daum.net/jc21th/17780693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과 송진근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0214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핵심인사 송남헌

http://blog.daum.net/jc21th/17780559

 

허헌님과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http://blog.daum.net/jc21th/17780556

 

단파방송 독립운동, 단파방송 밀정사건, 문인수, 이휘웅, 홍종혁

 http://blog.daum.net/jc21th/17782947


한양도성 역사탐방 (3) 돈의문 서대문 독립문

http://blog.daum.net/jc21th/17781835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역사의 뒤안길도 다시 돌아보는
    자료들입니다. 어느 시대건 이런 분들이
     계셨음에 고개 숙이게 됩니다. 단파방송 청취사건
    이라는 말조차 처음 들으니...........
    .
    답          글
    .
    일제강점기 말
    암흑기에 있었던
    조선 어학회 사건과 더불어
    큰 지하 독립 운동이었습니다.
    작년 11월 17일 73회 순국선열의 날에
    단파방송 청취사건으로 이근창선생님이
    대한민국 건국 애족장을 받았습니다.

    그 아들도 잘 몰랐던 그 일
    사망지가 현저동 101번지였다는
    제적등본을 들고 저를 찾아온
    80대의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때 13살의 어린 소년이     자라고 나이들어    
    80대의 노인이 되어 이근창선생님의
    서대문 형무소에서 용수 쓴 모습을 기억해내고
    이근창선생님의 제적등본을 발부받아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노인도 저를 모르시는 분이었지묘.
    사방 팔방 그 일을 알아달라고 웨쳐도
    아는 사람이 없고 응답이 없었습니다.
    거러던중 성도 이름도 모르는 저를
    찾아 오신것입니다.

    그로부터 저 이장춘이
    이근창 및 선생님의
    공적을 찾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습니다.

    KBS에서 저녘 9시 특집뉴스를 내 보내고
    그날 중계방송까지 했습니다.
    중계방송에 나온 성기영아나운서와
    사진을 촬영하며 그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 보람으로 밤낮없이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유카리나님이 찾아 오셔서
    힘을 넣어주시니 늘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것이지요.
    고맙습니다.

    제가 할 일이 있으면 하겠습니다.
    유카리나님이 하시는 일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돕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심을 빕니다.

           

          소나무 선생님 글



          대단하십니다. 서대문형무소는

          1912년에는 서대문감옥, 1908년 10월 21일

           준공했던 신식(개량식) 감옥으로 당시에는 경성감옥.

          실제는 10월초부터 이강년, 허위 의병장 등 한성감옥에서

          이감, 순국 1호 의병장 이강년(10월 13일), 순국 2호 허위(10월

           21일)...현재 서대문형무소에는 1호로 왕산 허위라고 거짓말하고

           있다. 왜? 광무황제    (고종:조선총독부에서 이태왕의 시호)가

          퇴위 직전에 도체찰사로 전 선전관 이강년을 임명한 사실이

          드러날까 식민사학자들이 은폐했던 것. 13도창의진

          이인영도 광무황제의 밀칙으로 총대장이 됐던 것

          ...국사편찬위원회는 숨기고 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