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

이승만 건국대통령, 독립운동

이장춘 2013. 8. 18. 14:30
  
 

이승만! 그의 일관된 정신은
독립정신이고
애국 애족정신이었다.
국내, 외에서 50년 동안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5년 10월 16일 광복을 맞은 조국에 첫 발을
내 디디면서
 첫 마디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였고       1960년 4월 26일
마지막
남긴 말은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
에서물러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이승만의 일관된 정신이요
삶의 표상이었다.
「고집 센 독재자」였다는
 말을
 듣는 것은 그의 일관된 생각의 실천력과 강력한
리더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의 일관된
생각과 강력한 실천력,
애국애족정신이
바탕이 되어 대한민국이
올바른
민주공화국으로 출발한 것이고
바탕위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는 것, 민주주의 기본정신이다.

그 바탕위에서 오늘의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실현된 것이다. 그의 긴
인생역정에서
비판 받을 일이 있어도 50년의
독립운동, 3년간 해방공간에서의
역할, 건국대통령
으로   나라의 초석을 놓은 일등은 역사에 길이 남는
공적(功積)이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독립운동시
VOA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서 한 이승만박사의
성과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 고 문제안선생님이
생전에  필자에게 들려준
이승만
박사를 처음
보았을 때의 얘기다. 
애국가는
천재
성악가 김천애 목소리다.

   

이승만 건국대통령, 독립운동
 
 

 
 
이승만 박사! 이 땅의 근대사를
움직인
가장 영향력 있었던 인물 중의
한사람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라고 불리는
명성황후 시해로부터 시작된 그의
독립운동은
1945년 이 나라가 광복을 맞을 때까지 이어졌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던
이승만은 7년 옥고 끝에 풀려난다.
국내에서 행동반경이
좁아진 이승만은 
미국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길고 긴 외국생활이 시작되고
미국대통령에게 조선황제의 밀서를 전하는가
하면 미국에서도 수재들미 모인다는 조지 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프린스턴 대학을 다니며 단기간에 학사,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는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 중국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국무총리로   추대 받았지만 대통령제를
추구하는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직제를 대통령제로 바꾸도록
해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 받아 취임한다.
이승만의 대통령제 선호는 그의 정치 지론이 되었다.





상해에서 그의 뜻을 펼치기 어려움을
알았던
이승만은 미국에 머물러 세계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그가 지향하는 바는 폭력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외교활동을 통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일본을 제압해 나가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서
임시정부의 기본방침과 다소 거리가 멀어진

 이승만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일제가 이 땅에서
물러갔을 때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부상되었고 3년간의
해방공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나라 실질적인 통치자 하지장군도
그 앞에서는 작은 인물이었다. 이승만이 국내에
 돌아와 최초의 기자회견을 했을 때 현장취재를 하며 목격한
문제안 기자는 이승만을 보는 순간 하늘에서 온 신선을 본 것
같았고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하지장군이었는데
이승만
앞에서는 게걸음 치는 것을 보고 이승만의
존재가무엇인가를
알았다고 했다.

미국의 신탁통치에 과감히 맛 섰으며

공산주의와는 타협을 거부했다.
 




동, 서 냉전 속에서 남한을 지배하는
 미국과 북한에 진주한 소련의 틈바구니에서
하나 된 나라, 나된 정부수립이 불가능함을 알았을 때
남한만이라도 단독 민주정부를 수립해야 된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겨 UN의 동의를 받고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1948년 5월
 10일 민주적인 국회의원선거를 거쳐 소집된 국회에서
초대 국회의장으로 나라의 틀을 놓은 헌법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 7월 17일 헌법을 공포하고 방송국
간부들과
 함께 한 사진 왼쪽은 홍양명 방송국장,
뒤는 송영호 편성과장,
오른쪽은  이정섭
조선방송협회 회장.



대한민국 최초의  내각 첫 국무회의 1948년 8월 6일


그 헌법에 따라 선임된 초대 대통령이
되어
 나라의 틀을 놓아갔다. 그래서 이승만을
건국대통령
이라고 한다. 건국정부가 수립 된지 2년이
채 못되어 일어난
북한의 전면남침은 이승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물밀듯이

 밀려오는 전선 앞에서 대전으로 갔다.

대전으로 간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6월 27일 사람들은 대통령이
서울에 있는 줄 알았다. 서울방송에서
 대통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한민국 국민이여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UN이 참전 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어왔고
UN 참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북한은
UN이 참전한다는 소식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할 것이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침략자 북한군에게 겁을 주고 아울러
우리 동포들을 안심시키려던 그날의 방송은
결국
 6.25기간 중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실책의
하나로 꼽혔다.
그날의 방송은 이승만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김장흥 경호관,
대전방송국의
방송책임자 (국장 부재중방송과장) 네 사람이
문을 걸어
잠그고 전화회선을 통해서
생방송으로 진행 한 것이었다.

그 방송을 중계한

 서울방송의 방송요원들도 방송이
나가기 전까지 중요한 방송임을
알았지만
누가 무슨 내용의 방송을 하는지를 몰랐다.
그 방송을 듣고서야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에서
방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승만대통령의
방송으로 우왕좌왕하던
서울 시민들은 피난길을 늦추고
그러는 사이에 북한군은
 방송이 있었던바로 그날 밤
서울시내에 진입해서 방송국을 비롯한
모든
중요시설 들을 점령해 버리고 그러는 중에
한강이 폭파되어 버린
것이다.

북한군이 그토록 폭풍처럼 몰려올
것이라는 것을 이승만 대통령도
서울시민도
잘 몰랐을 것이다. UN군이 참전하는 것 미군이
나타나는 것,
그것만으로도 주춤거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북한군은 오산에서
만난
미군 스미스 부대를 일거에 격퇴하며
 남쪽으로 향했다.     
 UN군의 주력부대가 인천 상륙작전을
 벌릴 때까지 어려움을 겪다가   수도 서울을 탈환하자
북진을 거듭해서 통일을 이룩하려던 이승만에게
전선이 용이한
것만은 아니어서 결국 휴전으로
이어지는 상황에 이르자 휴전을 반대했다.

그는 특유의 놀라운 기치를 발휘했다.
6.23 반공포로의 석방이다. 휴전협정
최대
쟁점중의 하나였던 반공포로 석방은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의 최측근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통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실현한 것이었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국제사회는 이승만을 제거하라,
한국을 포기하라는 소리가 높아 졌지만
 이승만은 그 앞에서 당당했다.

그 무서운 국제적인
 여론 앞에서 

“한국 전쟁 재발 방지를 보장하라”
“한국
경제부흥을 보장하라”

그러기 전에는 휴전을 할 수 없다.
이승만의 굽힐 줄 모르는 주장이었고 결국
국제사회는
 이승만의 주장을 받아드리면서
휴전협상은
 마무리되었다.

  잿더미위에서 부흥은 시작되었지만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다. 전쟁에 지치고
 배고픔에
 시달린 백성들은 실의에 빠졌다.
이런 가운데
1956년 대통령선거가
다가왔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라는 깃발을 내건
민주당신익희 후보에게
 
민심이 쏠렸다.

이미 80세가 지난 이승만대통령을
가르쳐 야당 유세장에서는
 이승만대통령이
인(人)의 장막에 귀와 눈을 가려 볼 수도 없고
들을 수
없게 되어 세상물정을 몰라 백성들이 어려움에
빠져있다고
공격하면서 때로는 노망을
했다고 노골적으로 쏘아댔다.

 민심은 야당에게로 돌아 섰지만
 신익희 대통령후보가 선거 열흘을 앞두고
호남선 열차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떴다.
 진보당 후보 조봉암이 있었지만 이승만의 적수가 
못되었다.         
선거결과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 되었지만   신익희 후보에게
갈   표가
 
기권하거나             조봉암에게 돌아가
조봉암도 유효표의
30%를 얻었다.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후보가
당선되었다.
80이 넘은 노령의 대통령이
언제 변고를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유당은 불안했다.

 이런 가운데 다시 4년이 흘러
1960년
선거를 맞이했다. 이번에는
민주당 조병옥 대통령
후보가 선거 한 달을
앞두고 미국에 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세상을 떴다.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당선되는데
별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대통령 유고시에는 부통령이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되어 있어서 85세가 넘은 노령의
대통령이 언제 어찌 될 줄을 모른 상황에서
 자유당은
불안했다. 자유당 이기붕 부통령 후보를 당선
시키기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기붕후보는
이승만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국방부장관,
서울시장, 국회의장 등을
 지내는 가운데
큰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보내면서 강력한
후계자로 부상했지만
부통령에서 낙선하면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해서
당선되기에 이르렀다.
국민들은 그 선거가 부정
선거임을 잘 알았다.
부정선거를 다시 해야 된다는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남원에서 마산에 가 학교에 다니던 김주열군의

시체가 물위에 떠오르면서 부정선거 규탄의
소리는 더 높아만 갔다.

전국의 학생들이 데모 대열에
참여하면서 부정선거 규탄은 대통령의

 하야요구로 이어졌다. 교수들 까지도 학생들의
하야요구를 지원했다.
이기붕을 당선시키려는
자유당의 부정선거는 결국 대통령의
 하야로
연결되었다. 그 데모대가 경무대 턱 앞에서
대통령하야를 부르짖는
 모습을 목격
하면서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물러난다.” 말을
남기고

그의 독립운동의
근거지 하와이로 떠난 지

5년만에 1965년 7월 19일
외로운 생을 마감했다.

 


장례는 간소하게 하라는 유언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졌고    동작동
국립묘지에 뭍혔다.
그 부근에 살았던 필자는
그 묘지에서 프란체스카여사를 
종종 보았다.
그때 프란체스카 여사는 날마다     그 묘지를
찾는다고
했다.      해방공간에서 이승만이
활동했던 이화장은 이승만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었지만

2010년 폭우로
큰 피해를 입은 이래
2013년 8월 18일
현재 문을 열지않고 있다.
그 기념관이 있는 마을은 이화마을이란
 이름이
붇고 
옛날의 판자집, 브로크 집은 정비되어
낙산
공원과 한양도성 순례길로
찾는이들이 많다. 
 



 이승만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고
 이승만 대통령을 어렵게 한 그 대표적인 장본인
이기붕은 1960년 이승만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한지 이틀이 지나 4월 28일 자신의 친 아들이자 이승만대통령의
양 아들 이강석의 총탄에 맞아 그 가족들과 함께 숨을 걷우었다.
이강석 자신도 스스로 쏜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떴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글로 쓰기전에
동영상 한편을 연결한다.  이 동영상은 필자가
엠파스에서 글을 쓰던시절 제작해서 "이승만 독립운동
그때 그 목소리"! 라는 제목으로 올린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춘하추동방송" 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카페나 블로그에도
여러곳에 이 동영상이 올라 있음을 본다. 스크랩 등 정상적인
방법으로
올린 동영상도 있지만 비공식적으로 다운받아
올린동영상도 있다.

경무대에서 그 목소리를 찾아
레코드를 만들어 보급하는데
기여한
 1957년 당시 경무대를 출입했던 한영섭기자는
친지들로부터 이 동영상을 받을 때마다 
흐뭇한
마음이라고 하셨다.  
 


동영상 보기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 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서울로 옮겨왔다.
처음에는 한문을
배웠지만 1894년 배제학당에 들어가
1년만인 다음해에 졸업하고
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李承晩
에게 충격을 주어
국모를 살해한 원수를
갚고 국왕을 구출해서 친일적인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지명수배를당했지만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때부터 서재필박사가 이끄는 독립협회
간부로, 독립협회가 발행하는 협성회보 주필을 맡아
일본의 행위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면서 자주독립을
외쳤다. 이를 못 마땅히 여긴 황국협회 무리들은
이승만이
입헌군주제를 추진해서 국가를
전복하려한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1898년
사형선고를 내렸다.
 
 


형은 무기로 감형되고 또 7년으로
단축되어
1904년에 풀려나 그해 겨울에
고종황제의
밀서를
들고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대한
민국의 독립을 역설했지만
이미
국권이기울어 진 뒤라 뜻은
 이루지 못했어도
그로부터 미국생활은 시작 되었다.
     


 
 
1907년, 조지워싱턴대학을 거쳐,
1908년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1910년    영세 중립론 이라는 제목으로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5년간에
 미국의 학사와 석사,
박사학위를 받은
전무 후무한
사례를 남겼다.
 
 

 
 1910년 한일합방이 있자 국내에
돌아와 후진을 양성해보기도 했지만 일제가 
105인 사건을
만들어 어려움을 맞았다. 이미 국내에서
 
발붙일 곳은 없었다.
1912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해방될
때까지 나라 안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1914년 “한국 태평양 지”를
발간했고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면서 그해 4월에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국무총리로 추대되었다.
국무총리라는 직책을       
못 마땅
하게 생각해서
스스로는 대통령이라고 했다.
         1920년
임시정부
6차 의정원에서 헌법을바꾸어
대통령제를 채택하면서
 1920년
대통령에 추대되었다.
 




세계정세의 흐름으로 보아 중국에만
머무를 수 없다고 생각 한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은
1921년 미국에 가서 돌아오지 않고 외교활동을 벌려 나갔다.
이로 인해서 임시정부 안에서 문제가 생기고 이승만을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도록 했지만 대통령직을 물러난
뒤에도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1940년대 들어 임시정부 구미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위원장을 맡아 구미 각 나라를 대상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에 매진했고 국내. 외를
대상
으로 단파방송을 한 것도 이 무렵    1942년 중 후반
부터였다.            1942년
 8월 29일부터 V. O. A의 한국어
단파방송시간이         마련 되면서   이 방송을
통해서
세계정세와        임시정부를   비롯한    광복군의
활동 등을   알리면서
      국내외 동포들이
항일운동에 나서 줄 것을 호소했다.
  

 
 
 

이승만 박사의 방송소식은 알게
모르게퍼져
연합군이 이기고 일본이 진다는
얘기와 함께 대한민국이
독립 될 것이라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소문의
진원지를 찾던 일제는
결국 방송국과 국내 애국지사들,
심지어
 라디오 판매상인들
까지 고문을 하고
감옥살이를 시켰다.     
이른바 단파방송
밀청사건이고
지금은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이라고 한다.

  이승만 박사의 방송 내용대로 얼마 안 있다가
대한민국은 독립 되었다.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을
떠난 지 34년 만에 1945년 10월 16일 조국 땅에 돌아왔고
다음날 11시 반, 귀국 뉴스가 윤용노 아나운서 목소리로
KBS전파를 타면서 국민들은 비로소 애국지사
이승만 박사가 돌아 왔음을 알았다.



그날 저녁 8시 반 KBS방송은
이승만의
특별방송이 편성되었다.
그 유명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방송 연설이 있었다.
충청남도
 목천에 있는
 
 독립기념관에 있는 비碑다.
 




김구선생님이 이끄는 임시장부가
11월
23일에 돌아오고 그 다음날 11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에서 또다시 "뭉치면
살고
해치면 죽는다. "는 연설로국민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고이때 이 말은 국민의 구호가 되었다.  3년간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동영상 이승만대통령 46주기 추도식
 2011년 7월 국립현충원
 
 


이승만 기념회 자문위원
정흥숙 박사님께서 2023년 8월
18일이 글을 이승만 기념회 카톡방에
올리시면서    다음 글을 남기셨기에 
기록으로 남기고자 올렸습니다.
  
 
이장춘국장님! 대단하신 이장춘국장님!
이 방대한 자료를 질서정연하게 정리해주셔서
한국의 근대사를 공부할수 있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주어 애국심을 드높여 주어야
합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방대한 자료를 어떻게 이렇게 많이
모으셨나요? 몇 개의 방송국 국장역할을
혼자 하신것에 감탄과 감동이 큽니다.

이 방송을 통해 이승만대통령을
향한 존경심과 애정과 그리움이 더 커졌
습니다!
이장춘박사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
주셔요. 한국역사의 증인이시고 우리들의
스승이십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제가 고1 입학해서 얼마 안되어 4.19가
일어났고 그 이후로 많은 데모가 일어났던걸로
기억합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국가를 위해 많은
큰 일들을 하셨고 저는 단지 그분이 대통령으로서 하야하여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 대통령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많은 것을 공부하였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어찌하여 외국여자와 결혼을 하셨을까?가 늘 마음속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런 것을 스스로 이해 할 수 있을만큼 세월이
흘렀군요. 온 나라의 어린이가 다 아들 딸인것을......... 양자가 왜
필요했는지, 좌지 우지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입니다.
김명희 여사님 젊은 시절을 여기서 뵈니 반갑습니다.
김여시님께는 귀한 사진이겠습니다.

 
 
 두기고 선생님 글

 끝이 안좋아서 그렇치 이승만대통령의
업적은
전세계적으로 없습니다. 토지개혁과
교육개혁 한미동맹등의
업적은 전세계적으로 없죠.
그때 우리나라 주변국가는 모두 다
소련에
의해 공산주의국가가
됬습니다. 유일하게 oecd 130개국에 129위 130위
경제의 나라가
 지원해주는 나라가 된것은 건국당시 이승만대통령의
노력으로
된겁니다. 얼마나 부자들이 말안듣으면 독자적으로라도

 강행했겠습니까. 링컨보다 휠씬 위대한 대통령이죠
 
 
애신각라 선생님
2018.11.16 22:31

안녕하세요 선생님!
잘 지내시는지요? 예전에
댓글로 김대중 대통령을 무작정
옹호하고   박정희 대통령님 비난한
내용을 적은 것 같아 다시 들렀습니다.
근현대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두 분 때문에      우리 대한민국이 존재
하는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과거
윗 세대 분들의    노고를 다시한번
기억하며        항상 감사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이승만대통령 글 더보기 (영문자 클릭)   
  
동영상, VOA 이승만박사 최초방송 육성과 단파방송 연락운동
 http://blog.daum.net/jc21th/17780208
 
동영상,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46주기, 프란체스카 6.25 일기장
http://blog.daum.net/jc21th/17780895
  
이승만 박사 귀국 (1945년 10월 16일) 과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 문제안의 육성 회고담
http://blog.daum.net/jc21th/17783354
 
이승만 대통령 추억의 사진 모음
 
 이강석 (이승만대통령 양아들)과 남산방송인들
http://blog.daum.net/jc21th/17781270
 이승만 건국대통령, 독립운동http://blog.daum.net/jc21th/17781841



남산방송국을 개국하던때 오재경 공보실장의 도움을 받으며 준공 테잎을 끊는 모습






KBS남산방송국 개국식날 기자들과 만남.
KBS 한영섭, 한기욱 기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한영섭기자는         최초의 방송종군 기자로 
2023년           6.25 73돐에 정부로부터
6.25참전 영웅칭호를 받았습니다. 




KBS 장기범, 임택근 아나운서와 담소하는 모습





이승만 대통령 기념우표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추모하는 우표가 미국에서 발행 됐습
니다. 이 우표는 골든애플즈라는 우표제작
대행사가 만든것. 이 우표들은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에  기증 될 예정입니다.
한중광님 페이스 북에 올린 글 

 주  
 
이 사진을 페이스 북에 올린
한중광님 글에
국내에서 있어야 할
일들이 국내에서는
등한시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댓글들이 있습니다.  














위 아래 사진은 이승만대통령 부자가
 대통령과  이강석 육군소위로 만나는 장면입니다.
육군본부 의장대에 재직했던 이강석소위가 이승만대통령
출입국장에 나와 아버지 이승만대통령에게 예를 갖추는 장면,
그 시절 이강석소위와    절친했던 방송선배로부터 특별히
받은
 사진으로 필자는 이런모습의 사진을 처음 봅니다.





위는 이승만대통령과 프란채스카
여사 내외분과 이기붕, 박마리아 내외분,
아들
이강석의 만남입니다. 이강석은 이기붕의
친아들
이고 이승만대통령의 양아들입니다.


이승만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김명희 여사 그리고 아들 이인수님
부인 조혜지 내외분 원용덕장군 손녀 원길자
님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김명희 
여사 소장 사진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이승만과 문제안.wma

 

 

 
이승만과 문제안.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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