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

KBS 청와대 출입기자 이석희님이 본 박정희 대통령

이장춘 2012. 1. 11. 05:57

 

 

이석희님은 1970년대 청와대를

출입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을 자주 접하던 분으로

 40년전 그때의 취재수첩을 더듬어  몸소 채험한 얘기를

 2011년 12월 글로 썼습니다.  그 글을 저에게 보내 오시면서

 단 <註>와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KBS 청와대

출입기자 이석희님이 본 박정희 대통령◈

이라는 제목으로 옮깁니다.

 

 

 

<註>아래 글은 '대한언론인회'에서 오래 동안

언론에 몸담았던 70세 이상의 老客들의 글을 모아

'언론인을 통해본 오늘 날 한국 현대사'를 실록으로 만든다며

 원고를 강권하다시피 해서 쓴 글이다. 언론계란 곳이 才才多士들이

즐비한 곳인지라 원고를 올리기가 망서려졌지만 史記에 기록돼 있는

家貧思良妻, 國亂思良相(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게 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훌륭한 재상을 생각하게 된다.)는 글귀를 생각하며

 40년 전 취재수첩에서 朴正熙 大統領에 관한 이야기 몇 가지를

 정리해 기고했다. 책에는 제목을 "내가 본 박정희 대통령"

이라고 바꿔놓았더군요.

 

 

KBS 청와대 출입기자 이석희님이 보았던 박정희 대통령

 

 

<40년 전 취재 수첩> 2011.12

-朴正熙 大統領 에 관한 이야기-

 

 

 

 

나는 처음 朴正熙 대통령을 뵙는 자리에서

 느꼈던 강렬했던 그의 첫인상을 40년이나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뵙게 된 것은

지난 1972년 5월 16일이었다. 나는 그해 4월 18일부터 청와대 출입

기자로 청와대에 나갔지만 대통령께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고 오찬에

참석한 날은 5.16혁명 1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朴 대통령은 그날 시민회관

(지금의 세종문화 회관)에서 있었던 5,16기념행사가 끝난 청와대 본관에서

 기자들에게 오찬을 베풀었다. 나는 새로 출입하게 된 신입기자로서 대통령께

신고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선(?)도 뵐 겸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마주보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날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5.16혁명에 관한 것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은 혁명에 얽혀있는 秘史들을

생생하게 들려주었고 육영수 여사는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그리고 남편의 내조자로서 겪었던 아슬아슬하게

불안했던 당시의 心境을 감추지 않고 들려주었다.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비화 가운데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되는 것은 이미 혁명의 大勢는 기울었는데도

 명확한 태도 표명을 하지 않고 엉거주춤하고 있던 당시 장도영(張都暎) 육군참모총장을

 설득하던 때의 얘기였다. 혁명을 주도하고 있던 朴 少將은 백태하 대령과 함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찾아가 당시 상황과 혁명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張 총장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나오자 평안도 출신의

 白 대령이 권총을 장전(裝塡)해 張 총장의 배를 찌르면서 “총장 이 쌔끼야,

하간 안 하간!” 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는 대목이다.

 

 

 

 

대통령을 마주보고 앉아서 생사를 걸었던 당시의

비사들을 들으면서 나는 그의 두 눈에서 철철 흘러넘치는

담력(膽力)을 뼈 속까지 느꼈다. 그 자그마한 체구에서, 조그맣고

새카만 얼굴에서, 아니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엄청난 담력을 누가

거슬릴 수 있겠는가? 혁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모든 사람을

제압하는 박정희의 카리스마가 저기에 있구나 하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4년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한 현장에서 2분 만에 다시 연단에 서서 연설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生死를 초월하는 남다른 담력이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저격범 문세광이 붙잡히고 장내가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을 때 연단 뒤쪽에 엎드려 있던 대통령은 다시

연단 마이크 앞에 나와 섰다. 그리고 더욱 또랑또랑 하고 힘찬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 하던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그는 5분 넘게

연설문을 끝까지 읽고는 "감사합니다."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 순간

그 상황에서 만약 대통령도 혼비백산(魂飛魄散)해서 경호원들의 부축을

받고 얼빠진 모습으로 퇴장했더라면 국가 전체에 미치는 분위기는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엉망이 됐을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국정 최고책임자의 즉각적인 판단과 一動一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깨워준 일로 기억된다.

 

 

 

 

국가 안위와 직결돼 있는 안보 외교 국방문제 등과

 관련해서 박정희 대통령은 누구에게든 한 치의 양보도 없었고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목숨이라도 바칠 각오로 임했다. 예를 들어서

일본 측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는 독도 문제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단호한 태도는 1965. 6. 15, 미 국무부 문건 제364호에서도 확인 된다. 시효가 지나

 2006년 기밀문서에서 해제된 미 국무부 문건 제364호에 따르면 일본은 미국에

 로비를 하여 1965. 5. 17, 존슨 대통령이 방미중인 박정희를 만났을 때

 “독도를 일본과 공유하라, 공동 등대를 설치하라”는 등의 압력을

넣었지만 박정희는 이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 마디로 거절했다.

 

 

미국이 힘으로 밀어 붙이려 하자 박정희는

 장관급 회담을 거절하겠다며 맞섰고, 미국대사는 ”박정희는

그 무엇으로도 독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며 밀어 붙이기가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본국에 보고하여 결국 이를 포기하게 된다는사실이 기록돼

있다. 미국과 일본의 막강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우리의

영토권을 지켜낸 결과 1965. 6. 22. 체결된 한일어업협정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전제하에 체결됐던 것이다.

 

 

그런데 1998.11.28. 김대중 대통령이 서명한

소위 新 한일어업협정은 어떠한가? 그 때 새로 그은

 ‘배타적 경제수역’(EEZ)에서는 독도가 한일공동 관리수역에

들어가 우리 땅이라는 근거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3천 여척의

쌍끌이 어선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선박 및 어구류 제조업체들이 날벼락을

맞았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어민들의 원망을 외면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어선들을 북한에 주자고 했다. 심지어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방송금지곡’으로 지정해 못 부르게 하는가 하면 1999년 12월 kbs, sbs, mbc 등

 방송 3사가 합동으로 우리나라 땅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새 천년의 해를 촬영하려고

독도로 향했으나 해군 군함까지 출동시켜 이를 막았다. 방송사들은 할 수 없이

울릉도에서 촬영한 사실이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김대중이 독도를

 일본에 팔아먹었다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북한이 저지른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때 있었던 일이다.

1976년 8월18일 오전 10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안에서

전방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 보니패스 대위와

발레트 중위 등 2명이 북한 인민군이 휘두른 도끼와 방망이로 무참히 살해된

 사건이 터졌다. 대한민국은 이내 아수라장이 돼버리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입만을

주시했다. 박정희 입에서 튀어나온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다”, 이 한마디가 국민의

 공분에 불을 댕겼다. 박정희는 미국에 말했다.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은 미군이

아니라 우리 한국군이 끝내겠다." 미국도 깜짝 놀랐다. 박정희의 응징 의지가

 저렇게 강할 줄이야! 한국군이 JSA에 들어가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시작

했다. 바로 그때 집무실에서 대통령에게 보고를 마치고 나온

 당시 민정수석 박승규씨는 “박 대통령 집무실에

철모와 군화가 놓여 있었다.

 

 ”북한에 대한 응징을 대한민국 국군통수권자인

바로 자신이 진두지휘하겠다."는 듯한 결의에 차 있었다고 전했다.

북한군이 가지치기를 막거나 도발해오면 ‘황해도 사리원’까지 치고 올라가는

 계획을 한미 간에 완벽히 세워놓고 실천에 들어갔다. 미국은 F-4, F-111 전폭기

 2개 대대 증파, B-52 폭격기 출격,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는 한반도 해역으로 항진

중이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급박한 상황이 되자 김일성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이름으로 유엔군 사령관에게 사과문을 보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김일성의 완전한 굴복으로 이틀 만에

 끝이 났다.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날 뻔한 위기는 그렇게 막이 내렸다.

 

제 나라 안보는 제 나라 국민이 지켜야 하고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철모 쓰고 군화 신고 전장에 나가 죽을 각오를 하는 결의가 

당시 안보 국방의 가장 튼튼한 버팀목이었던 것이다. 지난 1973년 6월 23일에

 발표한 우리의 평화통일 외교 정책 선언은 한국 외교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는 ‘할슈타인 원칙’에 따라

우리는 ‘북한을 승인하는 나라하고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방침이었으나 6.23선언으로 폐쇄적인 외교정책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외교 정책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을 확정하기 전 박정희 대통령은

 그 해 1월부터 6개월 가까이 매주 수요일 오후 2시 청와대에서

국가안보회의 소위원회를 주재했다. 회의는 중앙정보부가 제3세계

국가 등 관련 동향을 분석 보고하고 안보회의 멤버들의 거리낌 없는 토의가

이루어지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으리만큼 이상한 것은

 대통령이 빠지지 않고 참석해 메모까지 해가며 경청을 하면서도 거의

대부분 말 한 마디 없이 회의를 끝낸다는 점이었다. 대통령은

 회의가 진지하게 진행되도록 자리 잡고 있을 뿐, 실제로는

한 마디 말도 없이 토의 내용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모범 수강생 같아 보였다.

 

그런 식으로 6개월 동안이나 회의가 진행된 어느 날

대통령이 긴 회의를 마무리 하면서 딱 한 마디로 결론을 내렸다.

“문을 여시오!” 박정희 대통령의 이 결정으로 우리 정부는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을 채택하고 남북간의 외교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이다.

6개월 동안의 자료수집과 끊임없는 토론 분위기 조성, 6개월 동안에 걸친

대통령의 黙言傾聽과 결단...흔히 볼 수 없는 국정운영

스타일의 백미(白眉)였다.

  

 

 

미국 다글라스 社의 중역인 데이빗 심프슨 씨의

회고담이다. 그는 우리 군이 미국으로부터 M16 소총을

 이전받게 됨에 따라 대통령에게 리베이트를 주기 위해 더운 여름철에

청와대를 방문하게 됐다.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된 심프슨씨는 무더운 집무실에서

 노타이 샤츠 차림으로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 열심히 메모하며 왼손으로는 부채질을 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보게 됐다. 대통령은 손님을 보자 예의를 갖추기 위해 양복 저고리를 입으며

에어컨을 켜라고 비서관에게 지시를 하면서 “나 혼자 있는 넓은 방에서 "에어컨"을 트는 것이

 낭비인 것 같아서요...“라고 말했다. 심프슨 씨는 그제야 한나라의 대통령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심프슨씨는 한국방문 목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한국 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준비해온 수표가 든 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며 “이것은 저희들의 작은

 성의표시입니다.“하고 말했다. "이게 무엇이오?" 박정희대통령은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흠..100만 달러라...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돈이구려.." "각하! 이 돈은 저희 회사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대통령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보시오! 하나만 물읍시다."

 

"이 돈 정말 날 주는 것이오?"

"맞습니다. 각하!"

"대신 조건이 있소.“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자, 이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 돈이오.“

”내 돈을 가지고 당신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당장 이 돈의 가치만큼 총을 가져오시오.“

 

“난 돈 보다는 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해주리라 믿소" "당신이 나에게 준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당신 돈도 아니오. 이 돈은 지금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형제, 내 아들들의 피땀과 바꾼 것이오.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이 돈만큼의 총을 우리에게 주시오."

나는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그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각하...반드시 100만 달러의 소총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나는 그의 웃음을 보았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한 아버지의 웃음을..그에게는,,,

한국 국민들이 자신의 형제들이요 자식들임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봤던 여러 후진국의 대통령

들과는 분명히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워낙 겸손하신 이석희님인지라 글은

저 보라고 보내셨지만 이곳에 올리는 것은

어쩔런지 몰라 망설이다가 이석희님 블로그에서

사진 몇장 슬쩍 훔쳐다가 같이 올렸습니다.  이석희님

 블로그를 가실 분은  아래 영문자를 클릭하셔요.

아울러 그동안 제가 올렸던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동영상을 링크 해 놓았습니다.  

 

 

이석희님 블로그 바로가기  

 

http://blog.naver.com/wiselydw/30128519726

http://blog.naver.com/wiselydw/30128043212

 

 

동영상 모음

 

KBS 여의도사옥 준공식때의 동영상 / 1976년 12월 1일

 

 

 

KBS 남양송신소 준공때의 동영상 / 1962년 9월 10일 

 

 

 

박정희 대통령 방송인연 사진을 모아

 

 

 

빅정희 대통령 최후의 일터 KBS 당진송신소 준공실황

 

 

 

5.16부터 송요찬 내각수반 임명까지

 

 

 

삽교천 행사와 서거

 

 

 

 

 

 

 

 

1987년 정구호 KBS사장님과 김학영, 김광식, 이석희,

이범경, 최진성, 양회선, 장영길, 이장춘, 김성옥, 박미정님 등

 본사임직원과 광주 전남 관내 방송 간부들이 남농 허건 기념관을

방문하고 촬영한 사진이고 아래는 유달산에서 목포시가지를 배경으로

 이석희님과 최진성, 이상덕, 이장춘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송장길 Jhanggil Song선생님 글



이석희 님은 성정이 바르시고
일 처리가 반듯하고 깔끔해서
늘 동료와 후배들에게 귀감이었는데

그 곧은 심성과 시선으로
한국사의 주요한 한 페이지를
기록해 놓았네요

사초들과 함께 나름 소중한

 자료로 여겨지기 바랍니다



 

 

미주지역 대상 위성방송 송출 개시식 모습입니다. 이석희, 권영원님등이 스위칭하고 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아 의악새.mp3


? ???.mp3
1.72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