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방송

6.25 초기 전쟁 상황과 딘(william F.Dean)소장, 워커(Walton H. Walker)장군

이장춘 2013. 6. 14. 19:24

 

 

 

어제 6.25발발 63년에 관한 글을 올리면서

별 세 개를 단 철모를 쓴 워커장군사진을 설명없이

 올렸더니 "워커장군이 어떤 분이냐? "고 물어오신 분이 있었다.

“춘하추동방송”  올라있는 글 한편을 안내 해 드렸더니 그 글을 

그분의 블로그에 링크 해 놓고 몇번이고 읽으셨다고 한다. 미 24사단장

 딘(william F. Dean)소장과 8군단장 워커 (Walton H. Walker)장군 6.25

한국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고통을 받았거나  산화한 미국의 장군들이다.

 딘 소장은 6.25 초기 전투에서 적과 맞붙어 싸우다가 길을 잃고 산야를

 헤매던 중 한국의 한 농부의 신고로 채포되어 포로가 되었고 워커장군은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다가 중공의 참전으로 후퇴를 하던 중 한국군

트럭에 부딪혀 세상을 떴다. 맥아더는 잘 알아도 이

두 분은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다.

 

 

6.25 초기 전쟁 상황과 딘 소장, 워커장군

 

 

 

 

서울을 3일 만에 점령 해버린 북한은

 거칠 것이 없었다. UN이 긴급히 한국전쟁에

참여키로 결정했어도 시일이 소요되는 지라 그동안

북한군은 물밀듯이 밀려온 것이다. UN군은 제2차 세계대전

에서 무적의 정예군으로 알려진 540명으로 편성된 스미스부대를

  긴급히 투입했지만 오산에서 적을 만나 150명의 사상자나 실종자를

 내72명이 포로가 되면서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 미군이

 나타나기만 해도 뒷걸음질 할 것이라는 예상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북한군은 남진길에서 딘 소장의 미 24사단과

 만났다. 그러나 24사단으로서도 중과부적이었다. 급해진

딘 소장은 스스로 대전차 무반동 총을 쏘며 적과 대처 했지만 역부족

이었다.  미국에서 주력부대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도 어려웠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딘 소장은 길을 잃고 산야를 헤매던 중 한국의 한 농부의

신고로 포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워커장군은 대구에 8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적을 저지했지만 양편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낙동강 전선마저 위태로웠다.

그 유명한 영천전투가 이때 있었다. 결국 맥아더장군이 직접 지휘하는 UN군

주력부대가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 함으로서 인공기가 올라있던 중앙청에

9.28 수복으로  태극기를 꼽으면서 서울을 다시 찾았고

 그로부터 힘을 얻어 북진을 한 것이다.

 

 

 

 

 

북으로 북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동안

중공군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나타내지 않게

야간을 이용해서 숲속에 숨어 전후방으로 침투했다가 일제히

 공격에 나섰다. 이른바 인해 전술이었다. 나팔을 불며 사방에서 공격

해 오는 중공군에 UN군은 곳곳에서 포위망에 걸리고 어려움을 겪으면서

 후퇴를 거듭했다. 이런 과정에서 미 8군 사령관 워커장군은 세상을 뜬 것이다. 

KBS는 1990년 6.25 40년을 맞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자료를 모아 1시간짜리

 10편으로 된 다큐멘터리 특집방송을 내 보낸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전쟁

초기대전 부근의 전투당시 딘 소장이 포로가 되던 때 육군대령으로

한. 미 연락장교였고 1979년 80년 KBS 기술이사를 역임했던

김종면은 그때 그 상황을 증언 해 주었다.

 

 

 

 

더 자세한 얘기는 이미 올린 글을

연결 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영문자 클릭

 

동영상, 6.25의 해 1950년 영상실록 (딘, 워커장군 얘기)

http://blog.daum.net/jc21th/17780836

 

6,25전쟁 발발 63년

http://blog.daum.net/jc21th/17781780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딘 워커 전우가.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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