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피난을 가지 못했던 모윤숙이 9.28수복으로 서울이 탈환되면서 피신 길에서 돌아와 심정을 털어 놓은 그때의 육성이다. 모윤숙은 1930년대 초부터 활동한 문인이자 방송인이고 외교가이자 정치가다. 모윤숙은 공산군의 전면 남침 하루가 지나 6월 26일 고희동, 박종화, 공중인 등 문화 예술인들과 함께 문총비상대책 위원회를 구성하고 즉각 행동을 개시 국민들에게 전의를 고취하는 선전전을 폈으며 KBS 마이크를 잡고 애국시를 스스로 지어 낭독했다.
6.25, 모윤숙 그때 그 육성으로 듣는 실상
모윤숙은 지프차를 타고 아군의 주저항선인 미아리고개 밑에까지 가서 적과 분전하는 국군장병들을 격려했으며 그 목멘 왜침은 최전방까지 들려와 자칫 자지러들려는 장병들의 투지를 돋워 주기도 했다. (사진으로 본 한국방송사 제1권, 한국방송 사료 보존회 발간 참조)
당시의 주일본 김용주 전권공사는 1950년 6월 27일 밤 전화통과 라디오 앞에서 밤 10시경 모윤숙 여사의 애국시 낭송을 끝으로 서울 방송이 끊겨 버리는 상황에 접하면서 즉시 VUNC방송을 추진했다고 했다. 김용주공사가 말한 밤 10시는 일본 현지시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날 밤 급박한 상황에서 KBS는 12시에 방송을 끝낸 9명의 방송기술자들이 어디서든지 방송을 할 수 있는 비상 장비를 군 스리쿼터에 싫고 군 안내따라 한강을 건너려다가 이미 한강 폭파시간이 임박해서 방송장비를 싫은 자동차는 길에 두고 몸만 건너야 했다. 한강다리를 건너자마자 등 뒤에서 터지는 폭파 음을 들었을 때 이때가 새벽 2시 28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동에 있던 방송국은 3시를 기해서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방송국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은 서울이 사실상 점령당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3개월간 KBS 중앙방송국은 북한의 평양방송 산하방송으로 전락되어 북한의 선전도구로 활용되었고 모윤숙은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체 서울 인근의 산속으로 피신했다.
북한 침공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이로부터 숨어있던 공산당원들이나 일부 북한을 동경했던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활개를 치는가 하면 공무원이나 경찰, 군인 또 그 가족들은 숨을 죽이고 피신을 하거나 아니면 붙잡혀 고통을 겪어야 했고 이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해야 했다. 때로는 인민재판이라는 것을 열어서 자기들이 정해놓은 각본에 따라 재판 대상자를 군중들 앞에 세우고 일방적으로 작성한 죄상을 읽어가며 군중 속에서 “죽여라” “죽여라”를 외치는 구령 따라 재판을 진행하는 말만의 재판이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을 연출하며 사지로 몰아갔다.
인민재팡장에 선 소설가 김팔봉과 전재홍
선량한 백성들은 살기위해서 그들의 행동방향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고 "적기가"나 “장백산 줄기줄기...........”등의 노래를 입에 담으며 노래를 따라 불러야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들 팔에도 인공기가 그려진 완장을 차야 했고 선량한 백성의 손에 죽창이 쥐어져야 했다. 반동이다. 반동가족이다. 해서 잡아가두고 평소에 감정이 좋지 않던 사람을 반동으로 지목해서 서로 고자질 하면서 보복에 보복을 낳고 그러다보니 무더기로 학살이 감행되어 “사람목숨이 파리 목숨 같다.” 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무더기로 죽은 시체더미에 함께 있다가 정신이 들어 살아 나온 사람도 있었다.
마루 밑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피신을 하다가 이웃집에 고자질 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잡혀가야 하고, 잠시 피신하려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가 잡히면 죽는다는 엄연한 현실에서 나오지 못하고 며칠이고 굶다가 사경을 헤매는 사람도 있었다. 한강을 건너지 못한 모윤숙이 3개월을 적 치하에서 피신하면서 지내다가 다시 세상이 바뀌어 돌아와 실토한 얘기의 일부를 육성으로 들은 것이다.
모윤숙이 1.4후퇴 때는 후퇴를 했다. 모윤숙뿐만 아니라 90일간의 적 치하에서 그 실상을 보았던 서울 시민들은 다시 공산군이 들어온다는 말에 한강을 건넜다. 갈 곳도 모르고 갖은 것도 없이 무작정 한강을 건너야 했다. 서울은 비고 이곳저곳에 피난민들은 모여들었다. 살려고 피난길에 올랐지만 배고픔과 추위와 때로는 병마에 시달려야 했다.
이것이 6.25고 한국전쟁이었다. 6.25가 일어난 지 63년, 전쟁의 끝이 아닌 휴전이라는 것이 성립 된지 60년이 지났어도 한반도는 두 동강 나 있고 아직도 이 땅에는 6.25 전에 태어난 1,000만명 내외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전쟁에 참여했던 10만의 용사들이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다. 이 땅에서 태어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절대로 6.25를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 음향은 모윤숙의 육성과 함께 애국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고은하님의 낭독으로 올렸다.
모윤숙과 방송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http://blog.daum.net/jc21th/17780780
모윤숙과 노천명, 6.25와 방송 http://blog.daum.net/jc21th/17780860
동영상, 6.25의 해 1950년 영상실록(강동적인 글이 있음) http://blog.daum.net/jc21th/17780836
6.25발발 61주년의 날에 (전쟁 동영상 14편과 함께) http://blog.daum.net/jc21th/17780867
한영섭기자가 남긴 역사의 증언 「흥남철수작전 http://blog.daum.net/jc21th/17781758
한강교 폭파현장을 목격한 6.25참전 유공방송인 박경환님 http://blog.daum.net/jc21th/14921087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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