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방송인 윤기범, 이무근, 정하룡, 전옥배 칠석회

이장춘 2013. 5. 9. 21:25

 

 

 

방송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선배방송인으로부터 후배 방송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송인을 만나고 얘기를

나눈다.  오늘은 1960년대 70년대부터

깊은 인연을 맺어온 선배방송인 네

분의 얘기를 하려고 한다.

 

 

방송인 윤기범, 이무근, 정하룡, 전옥배, 칠석회

 

 

이 네 분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출생연도가 1929년이고 1950년대 공보실시절부터

공무원으로 출발한 분들이다. 정하룡님은 1960년부터

공보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분들은 KBS 공사발족과

더불어 다소 시차는 있지만 지역방송국장을 했다는 것

그리고 1970년 수석 붐이 일었을 때 초기부터

수석에 심취했으며 술과 낭만을 즐겼다.

 

이 네 분 가운데 세분이 방송인 해직

광풍에 휩쓸려 눈물을 흘리며 방송국을 떠나야

했다. 이 네 분은 그토록 가까운 직장동료이고 퇴직

후까지 깊은 우정을 간직한 친구였다. 필자는 이 네 

선배 분들을 존경하면서 깊은 사랑을 받았다.

 

1973년 KBS가 공사로 발족 할 당시

대구방송과장으로 있었던 이무근님은 대구방송국장, 

광주방송과장으로 있었던 윤기범님은 광주방송국장으로

승진해서 보직을 받았고 전옥배님은 잠시 사회교육부장을 거쳐

 그해 7월부터 기획괸리실 관리부장직을 맡았다. 그때 필자는 관리부

 차장으로 전옥배님을 보좌했다. 그리고 전옥배님은 얼마 안 있어

 1974년 3월 1일자로 전주방송국장 보직을 밭았다. 네 분

중에 세분이 대구, 광주, 전주방송국장으로

 재직 하게 된 것이다.

 

75년 2월 다시 자리가 바뀌어 전옥배님이

광주방송국장으로 윤기범님이 전주방송국장이 되었다.

1977년 전옥배님은 텔레비전국장, 윤기범님은 감사실장이 되고

 이무근님이 춘천방송국장, 정하룡님이 제주방송국장을 거쳐 이때 광주

방송국장 보직을 받은 것이다.  공사발족때부터 1978년까지 윤기범, 전옥배,

 정하룡님이 광주방송국장을 계속 이어온 것이다. 전옥배국장이 편성국장을 거쳐

 기획관리실장 재직 중 1980년 방송인 해직 광풍이 불었다. 최세경 사장 때부터

시작된 그 광풍은  최세경 사장시절 세 차례에 걸쳐 휩쓸었고  최세경 사장도 

그 광풍에 휘말려 마침네 그 자리를 물러났다.  후임으로 이원홍사장이

 부임 하면서  마지막 광풍이 불어 KBS의 경우 네 차례에 걸친 광풍에

 부장급 이상 간부사원 절반 가까이 방송국 문을 나섰고 조금이라도

그 정권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의심받은 일반 사원들도

 옷을 벗었다. 필자가 살아남은것은 기적이었다.

 

  그때의 방송인 해직 광풍이라는 것은

이유 불문이었다. 전 사원에게 일괄적으로

사표를 받아 이 사표를 돌려받지 못한 사원은 방송국

문을 나서야 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유나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이 광풍 속에서 네분중 정하룡국장만이

살아남고 세분이 방송국 문을 나선 것이다.

  

1980년대 초 문공회가 구성되었다.

 이 문공회는 그때 방송국 문을 나셨던 분들이

주축이 되었다. 방송국 문을 나선 전옥배 국장은 금광을

 하려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온 재산을 날려 버리고 갖은것이라고는

빚더미 밖에 없었다. 살길이 막막해 졌을 때 모아놓은 수석을 팔아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지만 그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팔팔하던 기백과

용기는 실망과 좌절로 바뀌어 캄캄한 삶을 이어갔다. 이때 전옥배국장의

둘도 없는 친구  박종국이 문공회를 구성하면서 전옥배국장에게  그

 사무국장을 제의 했다. 그것도 대단히 반갑게 맞아 드렸다. 보수가

얼마라는 것을 가릴 것도 없었지만 필자는 그래도 그것을

물어보았다. 70만원을 받으신단다. 그래도

살길은 열린 것이다.

 

이때 문공회에 7석회라는 것이 생겼다.

그 칠석회의 주 멤버가 전옥배 사무국장, 신병운,

윤기범, 이무근, 정하룡, 홍삼룡님이다. 이 칠석회가 주축이

 되어 탐석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수석 전시회도 대규모로 열렸다.

한번은 전옥배 국장님이 필자의 집을 방문해서 필자가 모아놓은 수석

한 점을 신문지로 둘러 가지고 가시면서 몇 월 몇 칠 출판기념회관?

 전시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말씀대로 그날 갔더니 수석전시회가

성대하게 열렸고 필자의 수석이 훌륭한 동철재로 만든 수반에

안겨 그 전시관의 중심에 있었다. 깜짝 놀라 그

수반도 필자가 가져가겠다고 했다.

 

전시회가 끝나는 날 오라고 해서 그날

수반 값을 치르려고 했더니 원가가 28만원이란다.

 필자가 선배님들 뒤 따라 다니며 수석을 채집했지만 깊은 뜻

은 몰라서 수반 값이 그토록 비싼 것은 몰랐다. 그 수반, 그 수석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윤기범 선배가 그런 명석을

 어떻게 탐석 했느냐? 면서 수석지에 올랐다고 했다. 그러나 그 수석지는

아직껏 못 보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1994년 필자가 관재국장에

 부임 했을 때 전옥배국장이 전화가 왔다. KBS사우회 사무국장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사우회 운영재원이 보험료인데 그 보험료가

관재국장인 필자의 소관 업무였고 사우회 내에서는 그

 보험료와 관련해서 우여곡절이 많을 때라 관재국의

 협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관재국장 재직 중

최선을 다해 도와드렸다.

 

전옥배국장님이 겉으로는 내색을

안했지만 마음은 상할 대로 상하고 몸은 부서져

갔다. 이런 과정에서 2000년 72세로 삶의 마지막을 고했다.

전옥배 국장님에 관해서는 써 놓은   다른 글이 있어서 여기서

줄이고 끝에 관련 글을 연결한다. 필자가 2001년 KBS 사우회 이사로

 부임했을 때 문공회에서 부터 시작된 칠석회는 KBS사우회로까지 이어져

전옥배국장이 떠나시기는 했지만 동우회 모임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필자는 사우회 이사 때나 부회장 때나 감사가 되어서나 칠석회

선배님들에게 마음을 쏟았다. 가야 할 목적지를 이분들과

상의했고 이분들이 좋아하는 술 한 잔이라도

 개인적으로 따로 마련했다.

 

이분들이 세상의 좋다는 온갖 술은

다 마셔 본분들이지만 순창 복분자 술은 필자를

통해서만 들게 되셨다면서 제가 나타나면 “순창 복분자 냄새”가

 난다고 농담을 건네시곤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친분이 더 깊어졌다.

필자는 2001년부터 2009년 초까지 사우회 직책을 가지고 사우회와 함께했고

칠석회와 함께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탐석활동이 금지되었다. 그래서

탐석위원히가 문화재위원회로 이름이 바뀌면서 이분들의 사우회 참여는

소원해졌다. 그와 때를 같이해서 정하룡선생이 2009년 말 세상을 뜨신

 것이다.   정하룡선생에 관해서는 필자가 추모사를 써서 사우회

회보에도 올리고 춘하추동방송 블로그에도 올렸다. 얘기가

 뜻밖에 길어졌다. 이미 쓴 얘기를 연결하고 신병운,

윤기범, 이무근 선배 얘기도 다음에 쓸 것이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대공 심리전에 힘을 쏟았던 방송인 전옥배 (全玉培)님

http://blog.daum.net/jc21th/17781209

  

방송인 고봉 정하룡 선배님을 기리며

http://blog.daum.net/jc21th/17780678

 

윤기범, 사진 한 장에서 떠오르는 50여년의 추억을 더듬어, 우제탁 김광일

http://blog.daum.net/jc21th/17781806

 

 

 

  

 

 

공사창립시 광주방송국장

 윤기범에서 그 후임 전옥배국장, 그리고

정하룡국장으로 이어졌다. 그 후임은 김상헌국장으로

 김상헌국장역시 헤직광풍에 밀렸고 그 후임 김용택국장도

광풍에 밀려 광주방송국장 비운의 시대가 이어졌다. 이

시절 5명의 광주방송국장 줄신중에서 4분이 해직

광풍에 밀려 해직율이 80%에 해당되었다.

 

 

 

문공회 사무국장시절 애석인들의 모임 7석회를 이끌며

1989년 문공회 수석전을 열었습니다. 사진은 전옥배님을 배롯해서

신병운, 신정휴, 손석주, 조돈준, 윤기범, 이무근, 김영우, 조오재 김창희

박한준, 이의달, 홍삼룡, 정하룡, 강신철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임국회 추억 조병화시.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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