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덕수궁 역사 비운의 경운궁

이장춘 2013. 4. 20. 07:11

 

 

 

역사의 구비 구비마다 행궁으로

정궁으로 별궁으로 이어져 온 경운궁, 덕수궁은

불탔고 이 자리에서 나라 빼앗기는 도장을 찍으면서

슬픈 운명 속에서 조선왕조 마지막 왕, 그리고 대한제국 최초

 황제 고종황제는 순종황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여기에 유폐되었다가

의문의 세상 떠남을 가슴에  안아야했다. 그날의 경운궁이 아직 완전 복구

되지 못한, 아니 영원히 복구 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을 찾고 사랑한다. 그 사연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대한민국을 잘 모른 사람도

 이곳을 사랑하며 찾는 가운데 이제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기다리고 있다.

 


덕수궁 역사 비운의 경운궁


 


  

 

 

조선왕실과 정능의 인연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가 그토록 사랑했던

강비의 능을 이곳에 마련하면서 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고 3년이 지나던 해 계비 강 씨를 현비로

책봉 했다가  5년 8월 13일, 질병으로 세상을 뜨자 10일간 朝市를

정지케 하면서 애통해 하다가 다음해 1월 3일 이곳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정릉이라 정하면서 이 일대를 정릉이라 했고 후에 약칭 정동이 되었습니다.

물정자 정능은 맑은샘이 있었던데서 유래된것이라고 라는 분도 있습니다.

경복궁에서 바라 볼 수 있는 이곳 정능에 능을 마련하고 이곳을 지금으로

말하면 성역화 했습니다. 정능리에서도 신덕왕후의 정릉과 그 동측

정릉의 供養寺로 새워진 흥천사가 있는 정동언덕 일대를

따로 皇華坊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여기에 조선왕조 제7대 임금의 손자로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던 월산대군이

8대 예종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사정이야 어찌되었던 성종에게 양보하고 뒤로 물러나,

많은 토지를 물려받는 등 실리를 취하면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고

대를 이어 후손들이 이곳 정능 넓은 땅 넓은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선조대에 이르러 누구나 잘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주

까지 피난을 갔었지요. 돌아와 보니 궁궐은 불타고 마땅히

정사를 돌볼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궁으로

 자리잡은 곳이 이 월산대군의 집이었습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이 이 행궁에서

즉위했습니다. 3년여 이곳에서 정사를 보던 광해군은

창덕궁이 완공되면서 1611년 10월 창덕궁으로 옮기고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이라고 불렀습니다. 조선 역사상 왕 칭호를 못받은

두 분중의 한분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폐위되고 인조가

이곳 경운궁에서 즉위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창덕궁으로 돌아가면서 오랜세월 별궁 경운궁은

 별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경운궁에 고종이 돌아왔습니다.

창덕궁에서 명성황후를 일본인들에게 시행당하는

아픔을 겪으며 불안과 마음 둘곳 몰라하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면서 창덕궁으로는 다시 돌아 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1896년 2월의 아관파천이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을 보내다가 경운궁을 찾았습니다. 1897년 2월이었습니다. 경운궁은

 러시아 공사관, 미국공사관, 영국 공사관, 프랑스 공사관과 한 동네이고

 회현동에 있던 독일공사관, 명동의 청나라 공사관, 남산의 일본공사관

과도 모두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이 안전

하고 또 외교활등을 하기도 좋았습니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정궁으로의 면모를

갖추어 갑니다. 정전인 중화전을 경복궁이나 창덕궁

처럼 2층으로 올리고 여러 전각을 지었으며 현대식 건물

석조전과 중명전을 지었습니다. 임금님들의 신위를 모시는

선원전, 흥덕전, 흥화문을 세우는 등 원래 2만평이던

경운궁을 4만평으로 늘렸습니다.

 

위에 보시는 사진이 덕수궁을 촬영한 최초의

사진이라고 합니다. 중화전이나 함녕전, 석조전 등이

세워지기 전이라 작은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고종이 경운궁에서 집무하던 1902년의 사진이라고

 알려진 경운궁에는 중층으로 된 중화전이 있고 왼쪽에

궁의 관리들이 사는 집을 볼 수 있습니다.

 

 

 

 

숭례문이 불탄지 1년을 맞아 2009년 1월에 공개된 사진 한장이

 있다. 1883년 제물포에서 조선 최초의 무역회사인 '세창양행'을 설립한

독일인 에드바르트 마이어의 후손들이 간직해오다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에 의해 발견됐다.며 공개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보면 정동과

덕수궁의 모습이 선명하고 2층으로 된 중화전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경운궁이 2004년 불에 타 버렸습니다.

 원인이 뭐라고 발표되었건 간에 일본의 행위라고

의심받기에 충분했고 고종을 비롯해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허둥지둥 피신했지만 경운궁의 아픈역사와 우리민족의 비운은

깊어만 갔습니다. 중화전, 함녕전을 비롯해서 고종이 힘을 기울여

축조한 주요 전각들이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중명전등에서 집무를 수

행해야 하는 어려움은 계속되고 2년여에 걸쳐 급히 중화전, 함녕전이

준공되었지만 옛날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중층의 중화전은

단층으로 바뀌었고, -자로 되어있었던 함녕전은

ㄱ자로 오늘까지 전해 옵니다.

 

 

 

중   화   전

 

 

 

 

 

 

함   녕   전

 

 

 

 

1899년 6월 8일 독일 황태자 하인리히가

고종황제의 초청을 받고 함녕전을 방문했을때의 사진

으로 불타기전의 함녕전이고 황태자는 이곳에서  고종황제와

 오찬을 같이했습니다. 한.독 수교 125주년 수교기념 사진전에 출풍

되었던 작품입니다. 이 함녕전은  1897년 창건되어 불탄후  중건해서

 순종이 왕위에 오른후 잠시 순종의 거처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순종이 창덕궁으로이어하면서 계속 고종이 머물다가

1919년 승하하셨습니다.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20로 지정되었습니다.

 

 

 

 

 

석   어   당 

 

덕수궁의 주요 전각으로 석어당이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2층건물로 1904년 불탄후 중건된

건물입니다. 석어당은 임란 때 선조가 피난으로부터 환도해서

 승하할 때까지 16년간 거처하였던 곳이며 이곳에 유패되었던

인목대비가 인조반정으로 정원군의 아들 인조가 즉위

하면서 광해군을 이 건물 앞뜰에 꿇어 앉혀

 죄를 책한 곳이기도 합니다.

 

 

 

 

 

덕   홍   전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우측(동쪽)에

자리한덕홍전은 편전(便殿)으로 사용한 건물입

니다.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된 함녕전과 나란히 남향으로

지어졌으며 정무를 맡아보던 곳입니다. 이 건물도

 1904년 소실되었다가 복원되었습니다.

 

 

 

 

광   명   문

 

 

 

 

대한문으로 들어가 덕수궁을 걷다보면

광명문이 있습니다. 현재 이 광명문은 나홀로 건물

처럼 있고 그 안에 자격루와 신기 전기화차, 흥천사종이

있습니다. 자격루는 초등학교때부터 배운것이라 생략하고

 신기 전기화차, 흥천사종의 설명을 붙혔습니다. 

 

 

 

 

아래 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때 광명문

전경사진에서 처럼. 이 광명문은 원래 함녕전의

 정문이었습니다. 1936년에서 38년 사이 석조전 서관을

증축할 때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인화문, 대안문, 대한문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인화문이었습니다.

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는것이 원칙이었지만 이미

민가가 들어 번잡하다는 등의 이유로 현재의 대한문

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어느때 어떤 이유로

바뀌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대한문은 원래 대안문이었지만

국호따라 대한문이 되었습니다. 원래부터 궁이 

아니었던 곳이라 그 앞이 좁고 민가들이 들어 서 있었지만 

전차길을 비롯한 도로가 나고 또 1926년 총독부나 경성부청 터를

 닦으며 길이 넓어져 민가들은 철거되고 덕수궁의 담도 뒤로

물러가고 담장의 모습도 때에 따라 바뀌었습니다. 

 

 

 

 

1968년 서울 시청 광장을 조성할 때

도로가 크게 바뀌면서 담은 물러가고 대한문은

그대로 있어서 이상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대한문은

결국 1970년 이전공사를 실시해서 오늘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1910년에 발행된 일본장서에 있는 대안문 시절의

행사 사진인데 설명이 없이 서울 구 황성의 정문이라고만

쓰여 있어서 내용은 나름대로 짐작이 가지만 내용을 쓸민큼

확하지는 않아서 차츰 내용을 쓸것이다.  사실 필자가 이런

글까지 쓰리라고는 생각치 않고책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복사 해놓은 것이어서 추후에 더 보왼 할 것입니다.

 

 

석    조    전

 

 

 

 

중화전 옆에 순 서양식 현대건물로 세워진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되어 1910년에 준공된 건물로

원래는 임금의 집무실 등으로 활용하기위해 심혈을 기울여 지은

건축물이었지만 이 건물이 준공될때는 이미 나라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조선왕조 마지막 비운을 담은 건축물이 되어 사실상

크게 활용되지 못하다가 1933년에 이 왕실의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미술관이 일반에게 개방되었습니다.

 

 

 

 

 

3층 석조 건물로 정면 54.2m,

측면 31m이며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 거실,욕실 등으로

 설계 되었고 앞면과 옆면에 현관이 있었습니다.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건축양식을 따른 석조전은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건축도 중요했지만

정원을 꾸미는데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아래는

미술관으로 활용될때의 모습입니다.

 

 

아래는 전시실 내부의 보습입니다.

 

 

 

 

 

 해방된 나라를 미국과 소련이 남한과

북한을 나누어 점령하고 신탁통치 운운 하면서

이 나라 운명을 얘기하던 미, 소 공동위원회(1946년)가

열린 곳이기도 했고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1992년부터 2004년까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다가

2005년 국립 고궁박물관이 건립되면서 옮긴후 잠시 국립 근대미술관 으로 되었습니다.

지금은 옛날의 모습으로 되 돌리기 위한 공사를 진행하고 있어서 올해 말(2013년)에는

옛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서쪽에 지은 서관은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

으로 1936년 착공해서 38년 완공되어 본관과 함께 이왕직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8·15광복 후 동관의 부속건물로 사용되다가 1998년 12월에 개관되어

덕수궁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덕수궁 뒷쪽 얘기를 하겠습니다.

야산으로 조용하기만 했던 경운궁 뒷면은

1,800년대 후반 새로운 외교가가 되어 미국, 영국,

러시아, 랑스 등 외국 공관이 들어서면서 모습이

바뀌어 갔습니다. 고종의 아관파천때 까지만 해도 이곳은

산이 들러싸여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작은 길이 있었습니다.

고종은 그 자리에 선원전을 짛고 조상들의 신을 모신

신성한 장소로 가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마저

원인 모르게 불타버렸습니다.

 

 

선    원    전

 

 

 

 

나라가 망하고 누구하나 돌보지 않다가

1920년대에 이르러 일본은 이곳에 큰 길을 내고

땅을 팔거나, 빌려주거나, 일본인 학교를 지었습니다.

일본인을 위한 국민학교와 제일고녀, 그리고 미술학교 등을

세웠고 그 무렵, 영국성공회와 구세군본영, 방송국 등이 이곳에

세워졌습니다. 이로부터 덕수궁 후면이 완전히 잘려나갔습니다.

이땅이 미국 소유가 되어 대사관을 짛는다고 하다가 반대에

 무딪혀 무산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지난날

써서 올린 글을  연결합니다.

 

 

 

 

역사의 구비 구비마다 행궁으로

정궁으로 별궁으로 이어져 온 경운궁, 덕수궁은

불탔고 이 자리에서 나라 빼앗기는 도장을 찍으면서

슬픈 운명 속에서 조선왕조 마지막 왕, 그리고 대한제국

최초의 황제이자 마지막황제 고종황제는 여기에 유폐되었다가

의문의 세상 떠남을 가슴에 안아야했다.  그날의 경운궁이 아직

완전 복구되지 못한, 아니 영원히 복구 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을 찾고

사랑한다. 그 사연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또 대한민국을 잘 모른 사람도 이곳을 사랑하며

찾는 가운데 이제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기다리고 있다.

 

못다 한 얘기는 차츰 할 것이고 이미

 써올린 다음 글에도 있다. 세계문화 유산으로

덕수궁과 이산가족 찾기 영상이 지정되기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덕수궁 관련 글 보기

 

고종의 아관파천과 덕수궁, 대한제국과 원구단 (환구단) 황궁우

http://blog.daum.net/jc21th/17781701


서울정동, 조선 말기 외교의 중심, 개방의 원적지, 경성방송국

http://blog.daum.net/jc21th/17781699


조상의 얼이 새겨진 옛 정능의 청계천 돌다리 광통교

http://blog.daum.net/jc21th/17780572


cbs사우회 눈내리는 덕수궁과 정동 길

http://blog.daum.net/jc21th/17781533

 

 

 

 

 

 

 

 

고종황제의 국장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이산가족 찾기, 덕수궁.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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