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맞아 피난을 갖던 선조가 서울로 돌아왔지만 모든 궁궐이 불타 버리고 갈 곳이 없었다. 이때 행궁으로 사용된 곳이 정동에 있던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선조의 대를 이은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고 경운궁이라 이름 했지만 얼마 안 되어 복원된 창덕궁으로 옮기고 이곳은 별궁이 되었다. 광해군의 폭정으로 반정이 일어나 뒤를 이은 인조가 이 별궁에서 등극하고 왕이 된 후 창덕궁으로 옮겼다. 오랫동안 별궁으로 있던 경운궁은 고종이 아관파천 일 년을 마무리 하고 이곳으로 돌아오면서 정궁 덕수궁이 되어 고종의 최후를 마친 비운의 궁궐이 되었다.
고종의 아관파천 덕수궁 대한제국과 원구단 (환구단) 황궁우
1895년 8월 20일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제4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제도가 일본식으로 바뀌어 갔다.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고종은 러시아와 통해서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다. 1896년 2월 11일 새벽에 있던 일로 이로부터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면서 정사를 보살피고 일본식으로 바뀐 제도를 다시 바꾸어 나간다.
경운궁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던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은 비밀통로로 경운궁을 오갔다는 얘기도 있다. 어찌 되었던 언제까지나 그곳에만 머무를 수 없었던 고종은 1년만인 19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돌아오면서 독립의지를 굳히고 실천해 나간다. 소공동에 있는 남별궁 자라에 화강석으로 3층의 제천단을 쌓고 1897년 9월 17일! 대한제국이 독립국임을 만 천하에 선포하면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광무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그 제천단이 바로 원구단(圓丘壇)이다. 곧이어 1899년, 그 원구단 곁에 8각 3층의 황궁우를 세워 조선의 여러 신위를 모셨다.
그러나 힘이 없던 조선은 열강의 각축장이 되고 일본이 청일전쟁과 1904년의 노일전쟁에 이기면서 한반도에서 일본을 당할 자가 없었다. 1907년 들어 고종은 물러나고 순종이 들어섰다. 조선은 이미 일본천하가 되어 마침내 1910년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 이에 앞서 덕수궁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고종은 여기서 대한제국의 황제됨을 선포하고 현대식 건물 석조전을 지어 새로운 집무실을 마련했는가 하면 1904년 대화재를 맞아 중화전이나 함녕전 등이 불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2층이었던 중화전은 단층으로 새로 지어졌고 -자였던 함녕전은 ㄱ자로 지어져 복구되었지만 바로 순종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타의에 의한 또 하나의 비운을 맞았다.
원래 이 왕실의 땅이었던 옛 경기여자고등학교 자리에는 1897년 선원전(璿源殿)을 지어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제사를 올렸지만 3년 후에 어진들이 모두 소실되는 아픔속에서 음식 가지 수를 줄이고, 가무를 중지한 채 소복을 입고 애도했다. 선원전이 있던 자리에는 흥덕전, 흥복전, 영복당, 수인당 등 신성한 장소로 쓰이던 시설들이 있었다. 옛 흥국사도 이 부근에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시설들은 고종이 세상을 뜬 후 1922년 모두 헐리고 이 터를 통과하는 도로가 생겼으며 일본인 학교, 제일고녀, 덕수, 미술학교, 구세군 본영 등 건물이 들어섰다. 방송국 겅공회 대성당도 이 무렵에 여기에 들어섰댜.
고종은 1901년 황실도서관으로 수옥헌(漱玉軒)을 지었다. 1904년 덕수궁이 불탄 뒤에는 고종의 집무실로 또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다. 1906년황태자(순종)와 윤비(尹妃)와의 가례(嘉禮)가 여기에서 거행되었으며,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었던 비운의 장소가 되었다. 중명전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고종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1919년 1월 21일 이곳 함녕전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망의 원인이 독살이라는 설이 퍼지면서 민심은 흉훙하고 민족적 울분이 치솟아 3.1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속국이 되자 대한제국의 독립을 선포했던 원구단은 헐리고 그 자리에 일본의 철도호텔이 세웠다. 오늘날의 조선 호텔이다. 남별궁과 연계지어 불리던 소 공주로는 그때의 일본총독 이름을 따 하세가와 (長谷川)라고 불리고 대한제국의 흔적은 빠르게 사라지고 일본식 이름과 건물로 바뀌어 갔다.
옛 원구단 자리에 원구단 또는 환구단이라고 소개 되어있는 안내판이나 상징물들이 있다. 요즈음 들렸더니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고 있었지만 이미 거대한 건물이 들어선 조선호텔은 원형으로 돌리기에는 불가능해져 버렸다. 더 자세한 얘기는 예전에 쓴 두 편의 글을 연결 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덕수궁 역사 600년, 조선왕조 5대궁 http://blog.daum.net/jc21th/17781857
역사의 현장 원구단과 조선호텔, 황궁우 http://blog.daum.net/jc21th/17780571
일제강점기 서울 상권중심 “센간마에광장”(鮮銀前)주변 http://blog.daum.net/jc21th/17780574
서울정동, 조선 말기 외교의 중심, 개방의 원적지, 경성방송국 http://blog.daum.net/jc21th/17781699
조상의 얼이 새겨진 옛 정능의 청계천 돌다리 광통교 http://blog.daum.net/jc21th/17780572
조선 명소가 되었된 경성방송국과 옛 정陵 터
위 아래 사진은 1910년 발행된 일본의 장서 에서 복사한 것으로 위는「이태왕전하 구(舊)즉위식장」 아래는「이왕전하의 돈덕전(惇德殿)」이라고 쓰여있다. 즉위식장이란 고종이 환구단에서 황제에 오른것을 의미한다. 일본이 발행한 책자라 막연한 설명을 붙혔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래사진은 돈덕전에 고종황제의 사진을 함께 올린 것이다. 돈덕전은 덕수궁 안에 서양식 건물을 짛고 외국사진을 접대하는 등의 용도로 쓰였다. 지금은 헐린 건물이다. 아래 건물을 로시아 공사관의 일부로 알았던 필자가 무슨 의미로 아래 건물을 돈덕전이라고 썼을까? 궁금했다. 그러던중 "역사학자" 라는 아이디로 댓글을 써 놓으신 분이 계셨다. 아래 사진과 같은 사진에 필자가 아관파천 때의 사진이라는 설명을 붙여 글을 썼더니 사진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이다, 아래 사진이 로시아 공사관이 아니라 책자에서 설명처럼 돈덕전이고 따라서 로시아공사관 이라고 쓴 설명이 잘 못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어서 글을 수정하면서 아래 사진에 관한 의문도 풀렸다. 역사학자님께 고마운 말씀 올립니다.
아래사진이 필자가 잘 못 알았던 문제의 사진이다. 이 사진을 아관파천때의 사진이라고 설명했고 위의 사진 설명에 돈덕전이라고 설명된 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던 것이다. 사진 한장의 잘못 설명으로 가져온 오류의 결과는 중요하다. 그런데 아래사진에 대해서 아관파천때의 러시아 공사관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다. 다행이 필자는 한일합방때 일본이 발행한 사진설명과 역사학자님의 잘못을 지적 해 주신 덕분에 제대로 올릴 수 있게 된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다.
덕수궁 함년전과 고종황제, 대안문, 석조전의 모습이다.
덕수궁과 러시아 공사관은 지금이야 도로가 나 있지만 그 시절에는 작은 길 하나사이에 담으로 막혀 있었다.
대한문은 60년대까지 이런 모습으로 있었는데 서울 시청 광장 확장 공사때 뒤로 물러났다.
총독부가 들어 서기전의 경복궁이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고종황제의 집무실은 이 경복궁의 깊숙한 곳에 있었다. 1909년에 헐렸다가 2007년에 복원되었다. "경복궁" 편에 자세한 얘기가 있다.
경복궁 바로가기 http://blog.daum.net/jc21th/17781718
'
소무 선생님 글
정동 답사를 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덕수궁이라고 불리는게 너무 안타깝 습니다. 막말로 고종궁이라고 부르는것과 무슨차이인가요. ㅠ.ㅠ 경운궁을 상당히 많이 넓히려고 했고 지금의 경운궁은 새발의 피죠. 가슴아픈 역사의 이야기. 다시 사진과 함께 보니 참 실감납니다. 정말 자료 감사합니다. 수업에 사용해도 되겠지요?
답글
고맙습니다. 학교에서 춘하추동방송 글을 수업에 좋겠습니다.
고종황제 국장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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