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호주인 로스가 촬영했다고 소개 된 이 사진을 보면 남산으로부터 남대문을 지나 서쪽으로 휘감아 돌다가 인왕산으로 접어드는 이 성곽의 그 오른쪽이 정동으로 그 시절의 정동모습이 확연히 나타나있다. 이해를 돕기위해 정동부분을 오리고 덕수궁과 영국공사관 경성방송국이 같이있는 사진도 함께 본다. 이 사진들은그 시절 우리나라에 와 있던 외국인들이 촬영한 사진이다. 남산에서 촬영한 사진도 정동이 가까운 모습으로 선명하게 촬영되었다. 빌딩 숲도 없고 공기도 맑아서 이겠지만 촬영도 잘 했고 오늘까지도 변질되지 않게 잘 보존되었다. 몇 장의 사진과 함께 개방초기의 정동에 대한 얘기를 해 보려고 한다.
위 사진의 대안문은 지금의 대한문으로 덕수궁의 정문이다. 한독수교 125주년 기념전시회에 나왔던 사진이다, 아래 사진도 같은 전시회에 나왔던 사진인데 위에서 볼 수 없는 경성방송국 안테나가 보인다. 두 사진 사이에는 상당한 시차가 있어 보이는 사진이다
서울정동, 조선 말기 외교의 중심, 개방의 원적지, 경성방송국
조선말기 우리나라 인천항의 개방으로부터 외국의 문호를 연 것이고 그 항구를 개방하면서 외국인 들의 발길이 찾아들기 시작한 곳은 서울정동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정능이 있던 곳이어서 붙혀진 정동은 조선말 서양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새롭게 부상한 곳이다. 덕수궁과 야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 1882년 조. 미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이 영사관을 연 이래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공사관이 들어서고 정동교회, 배제학당, 이화학당, 그리고 그 인근의 새문안교회등이 이곳에 자리했으며 한, 일 합방이 이루어진 뒤에도 대한성공회, 구세군, 방송국, 학교 등이 이곳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미국은 명성황후의 친척 민계호의 집을 사고, 그 주변을 더 사서 공관으로 활용하고 관저로도 썼다. 곧이어 문을 연 영국이나 불란서도 이곳에 공관을 마련했고 러시아도 1890년 이곳에 공사관을 세웠다. 정동인근의 회현동에 마련된 독일공사관과 남산에 마련된 일본 공사관을 제외한 주요 공관이 정동에 자리 잡았다. 남산에서 남대문을 지나 서쪽으로 뻗은 성곽의 오른쪽이 정동이고 덕수궁 담길 따라 동쪽으로 가면서 프랑스, 러시아, 미국, 영국의 공관이 들어서면서 이곳에 정착하는 외국인도 늘어나 미국과 수교조약을 채결한지 10년 만에 50명의 외국인이 살게 되었고 이 땅에서 서양세력과 청나라, 일본 세력이 각축전을 벌리면서 이곳은 외교의 중심,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1년간 집무를 보던 아관파천이 있었다. 이때 고종에게 도움을 준 러시아 공사의 처형이기도 한 독일인 손 탁은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땅과 저택을 기반으로 이 땅에 처음으로 서양식 손 탁 호텔을 지어 정치, 외교의 중심적 역할을 했고 또 정동구락부라는 이름이 붙여 지면서 서양인들은 이곳에서 만나 중요한 얘기들을 나누었다. 외국공관들이 들어서고 외국인들이 살면서 조용하기만 했던 정동은 새로운 면모로 변했다.
1885년에 선교사 아팬샐러에 의해서 최초의 서양식 교육을 위한 배제학당이 들어서고 정동교회가 들어섰다. 정동인근에 세운 새문안 교회와 연희전문을 세운 언더우드박사도 1885년 아팬셀러와 함께 인천항에 도착했다고 전해진다. 1886년 5월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부의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가 서울 정동의 자택에서 한 명의 학생으로 수업을 시작한 것이 이화악당의 시초다.
1900년대 들어 일본인 학교 제일고녀가 섰으며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1945년 10월 경기여고가 이곳으로 이사 왔음), 또 그 옆에는 1912년 제일 여자 보통학교 (덕수 초등학교 전신)와 미술여자 학교가 자리하면서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2년에는 영국 성공회의 대성당이 들어섰고 1926년에는 구세군 대본영이 들어섰다. 이 무렵에 1926년에는 새로운 명물 방송국이 지어지고 1927년 2월 16일부터 이곳에서 우리나라 첫 방송을 내 보냈다. 현재 덕수초등학교 교정에는 첫 방송 터 유허비가 서 있고 해마다 원로방송인들이 이곳을 찾아 그날을 기린다.
이 땅에 처음으로 방송국이 들어설 때는 덕수궁, 덕수초등학교, 일본인학교 제일고녀, 미술여자학교, 대한 성공회, 영국공사관, 구세군 본영, 조선일보와 경계를 같이했고 미국공사관, 러시아 공사관, 프랑스 공사관, 배제학당, 정동교회, 이화학당 등이 같은 정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시설들이 오래된 덕수궁을 제외 하고는 대부분 1880년대 우리나라가 문호를 개방하던 때부터 1920년대까지 건설된 시설들이었다,
정동시절 경기여고 모습
선원전과 경기여고 터
덕수 초등학교 전신인 제일 여자 보통학교와 길 하나 사이로 일제 강점기 제일 고녀가 있었습니다. 원래일본인 자녀가 주로다니는 학교로 지금으로 보면 중. 고등학교인 샘입 니다. 1908년에 창설되어 다른곳에 있다가 1922년경에 이곳으로 욌습니다. 이 일본인 학교는 해방되면서 사라지고 그 해 10월 계동 창덕여고(헌법재판소) 자리에
있던 경기여자고등학교가 이곳으로 왔다가 1970년대에 강남으로 가면서 미국 소유가 되었 습니다. 미국이 이곳에 대사관을 짛는다고 하자 덕수궁터에 대사관을 짛을 수는 없다고 반대 하고 나섰습니다. 법율에 따라서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곳이 덕수궁의선원전, 흥덕전 터임이 밝혀져 2005년 2월 미국 측이 정동 일대 땅 7천800평을 내놓고 대신 한국측은 용산의 캠프 코이너(Camp Coiner) 내 2만4천평을 새 터로 제공키로 합의함으로써 수년을 끌어온 `경기여고 터 미 대사관 신축' 논란이 일단락되었습니다.
땅을 돌려받는 대로 선원전 흥덕전 같은 주요 전각과 아관파천(俄館播遷) 길에 대한 복원에 착수할 것이라고 합니다. 선원전(璿源殿은 1897년 고종의 명으로 건립되어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제사를 올리는 신성한장소였으며, 3년 후에 선원전에 화재가 발생해서 어진들이 모두 소실되자 고종이 음식 가지 수를 줄이고, 가무를 중지한 채 소복을 입고 애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50년 넘게 자란 아끼고 아끼던 경기여고 교정의 회화나무가 시위중에 불타 잎이 나지않더니 그 뒤 다시보니 잎이 피어 반가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때 그 경기여고 사진을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여사님 엘범에서 찾아 올립니다. 노라노 여사님은 해방되던무렵 이곳 경기여고를 졸업했습니다.
위 도면은 일제 강점기 방송국과 덕수초등학교 등이 있었던 정동 도면으로 덕수 초등학교 운영위원장 정찬우님이 보내주셨고아래는 서울시 역사 박물관에서 촬영한 옛 방송국 주변을 형상화한 도면입니다.
남산에서 본 정동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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