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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복순 아나운서와 1950년대 라디오방송(2)

이장춘 2013. 3. 10. 22:03

 

 

 

문복순양도 두번 깜짝이다.

마이크를 통해서 들은  그녀의 목소리가

 하도 고와서 신인이라기에 한번놀란다...........

단정하고 지성적인 그의 용모와 탄력성있는 몸매에

두번다시  깜짝 놀란다. 그래서 문복순양도 「두번까 ㅁ 짝」

놀란다. 문복순양이 마이크앞에 서게 된것은 작년가을 「아나운서」

모집때 응시 함격 하였을때 부터이니 아직도 신인이라 하겠으나

그러나 그녀의 티끌하나 없는 청순한 목소리는 천진난만한

어린이를 다루는 「어린이 시간」,「아나운서」로서

이미 장래를 약속하고 있는 귀염동이이다.

 

 

 

 

 단기 4291년 12월 16일, 서기로는

1958년 12월 16일 한국일보에 큰 지면을

 활용해서 실린 그때의 문복순 아나운서를

잘 묘사해 놓은 글 한토막을 인용했습니다.

(1948년 9월 25일부터 1961년 12월

말까지 단기 연호를 사용했음)

 

  

기록으로 본 문복순 아나운서와 1950년대 라디오 방송

 

 

 

 

국민들이 접할 마땅한 매체가 없던시절

라디오는 늘 친구이고 새소식전달자이며, 노래나

드라마 만담, 어린이 시간등을 들으며 살던시절 그 방송을 통해서

들려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친근한 벗이습니다. 얼굴을 볼 수 없던

라디오방송 시절 그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펴며

잠못이루는 젊은이들도 심심치 않게 있던 시절 여성 아나운서들은 늘 인기를

 모았습니다. 중앙방송국에 한, 두명의 여성 아나운서밖에 없던 1940년대를

지나 6.25전쟁이 휴전으로 이어지면서 중앙방송국에는 강영숙, 김인숙,

 윤영중, 장금자 아나운서기 들어왔고 1957년 네명의 

여성 아나운서가 들어왔습니다.

 

 

 

1957년 연말특집 아나운서 언파레이드를 마치고

촬영한 사진으로 문복순 아나운서가 입사한후 최초로 촬영한

사진이기도 합니다. 앞줄 오른쪽부터 장기범, 민병연, 강영숙, 황우겸,

김인숙, 최세훈, 송석두, 윤영중, 이현숙, 장금자, 송영필, 뒷줄 왼쪽부터 

 박종세, 광재, 임택근, 강찬선, 임동순, 문복순, 강익수, 최계환.

하얀색이 1957년 신입사원으로 5명 모두 참여했습니다.

 

 

 

 

문복순, 민병연, 이현숙, 송영필 아나운서가

그 주인공이고 한사람의 남성 아나운서가 함께 들어와

 5사람의 아나운서가 입사했지만  남성아나운서 송석두는 곧

 기자로 전직했습니다. 2013년 2월 23일 방우회 총회에서 만나

그때의 회고담을 들려주며 네명의 신입 여성 아나운서 틈에

 남자 한사람만 있다보니 옮기고 싶은 마음이

 들어 전직했다고 술회했습니다.

 

1957년을 계기로 여성 아나운서가 많아지면서

그 활동영역이 넓어져 대부분의 프로그램에서 부드럽고

 감미로운 여성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음악프로그램이나 어린이 방송은 여성아나운서의 몫이 많았습니다.

 여성 아나운서의 숫자도 적었고 KBS 방송을 거의 독점하던 시절,

인기와 함께 신문이나 잡지에도 기사가 자주 올랐습니다.

시절에는 신문의 지면을 활용해서 프로그램의 내용을

싫고 공개방송 일정을 싫었습니다.

 

 

 

1958년 12월 16일자 문복순 아나운서에 관한 기사가 실린 한국일보입니다.

 

 

 

 

문복순 아나운서가 참여했던 장수프로그램 

희망음악회의 내용과 문복순 아나운서에 관한 내용이 실린

일요신문 지면 두편을 올렸습니다.  (위, 아래 사진) 「6년의 나이를

자랑하는 SA 희망음악회 흐뭇한 흐름에 달콤한 사연을 얹어주는 문복순 

아나」라는 사진설명이 눈길을 끕니다.  문복순 아나운서가 담당했던 그 많은

 프로그램 가운데서도 재직기간 6년 중 3년간이나 방송했던 희망음악회를 통해

 청취자들과 더욱 가까워지면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1956년 6월 KA의 유일한

 리퀘스트 프로그램으로 탄생한 희망음악회는 처음에는 매주 토요일 7시 20분부터

 25분간 방송하면서 한주동안 들어온 엽서를 정리해서 그 내용에 따라 곡을

고르고 사연을 엮어 방송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날이 갈수록 청취자

들의 관심이 높아져 들어오는 엽서가 폭주하고 사연도 다양해져

 방송시간대가 골든아워인 9시 10분에서 40분까지 30분간

으로 바뀌었다가 또 40분으로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때 어려운 일이 많았어도 청취자와 일체감이

되어 큰 보람을 느꼈던 문복순 아나운서는 5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때 그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시그널 뮤직, 우리말로는 가을낙엽이나 고엽이라고 변역되는

 피아노곡 autumn leaves를 들을 때면 젊었을 때의 열정과

낭만에 젖게 된다고도 하셨습니다. 오늘 배경음악은

 그때 그 시그널 뮤직을 골랐습니다.

 

 

 

 

문복순 아나운서가 담당했던 희망음악회나

폭풍의 언덕」「시를 찾아서」등 연속낭독은 그 시절의

인기프로그램이었고 비중있는 프로그램들이었습니다. 철조망 넘어

멀리 멀리 메아리져 북한땅을 향해서 방송되는 자유의 메아리는 북한

동포들에게자유대한의 소식을 전해주고 희망을 안겨주는 뜻있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위는 1962년 1월 12일자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오늘 배경음악은 1950년 60년대

 자유의 메아리 시그널 입니다.

 

 

문복순 아나운서 그때 그 시절 사진과 함께

 

 

1950년대 여성 아나운서의 사진들!  

60년의 세월이 흐른 앨범속에서 춘하추동방송의

간곡한 부탁에 마지 못해 빛을 본 사진들! 이 사진들이 

개인적으로는 추억이 깃들여 있고 정겨움이 있는 사진이고 

또 춘하추동방송에서는 여성 아나운서들이 몇분 안되던 시절의

사진이라 방송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런 사진을

 대하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사진을 제공 해 주신 분들에게는 더 없는

 고마운 마음을 갖습니다. 여기에는 문복순 아나운서 얫 사진들과

기록을 중심으로 올리지만 또 다른 문복순 아나운서의 글에는

요즈음에 촬영한 사진을 중심으로 올립니다.

 

 

 

 1960년 12월 24일 명동성당 성탄미사를

중계방송하는 문복순 아나운서(1)와 송한규(3)

 아나운서, 엔지니어 유진동(3번) 박한준

(4번)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정동에 방송국이 있던시절 스튜디오

안에 턴 테이블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산으로 오면서 턴테이블은 스튜디밖 조정판이

 곳으로 옮겨졌습니다. 턴테이블이 스튜디오

 안에 있던시절 얽힌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1958년 방송문화상이 발족하면서 장기범아나운서가

보도부문의 제1회 방송문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날 시상식이

끝난후 장기범 아나운서와 1.최계환, 2.강익수, 3.김인숙, 5.윤길규

 방송과장, 7.문복순, 8.민병연, 9.강찬선, 11.이규영,

 12.황우겸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입니다.

 

 

 

강찬선 아나운서와 함께 한 문복순 아나운서입니다.

 

 

 

문복순(3) 아나운서와 1.송석두, 2.이현숙, 4.강찬선, 5.민병연, 6.송영필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입니다.

 

 

 

각군 사령부 사령관들과의 좌담회  방송으로 문복순 아나운서(6) 사회로 진행되었습니다.

 

 

  

 그시절 함께 아나운서 생활을 했던

문복순 아나운서와 김인숙, 박종세, 민병연

 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입니다.

 

 

 

 

문복순 아나운서가 담당했던 프로그램 중

대북방송의 간판 프로그램이었던 자유의 메아리를 

 빼 놓을 수없습니다. 자유의 상징인 갈매기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시그널 멘트 “압록강 두만강 까지 멀리 멀리 울려 퍼지는

 자유의 메아리......” 정감 있는 대중가요와 함께 공산권의 모든 실상을

 파헤치고 자유세계의 소식을 전하던 대표적인 장수 프로그램 자유의 메아리

였습니다. 하루에만 해도 몇 번씩이나 되풀이해서 날마다. 방송되었던 자유의

메이리를 1년간이나 담당했고 또 다른 여러 프로그램의 대북방송을 담당하면서

 북한에 그 명단이 실렸다는 소문을 듣고 통일되기 전에는 고향인 개성에

갈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기도 하셨답니다.

 

해방공간의 김내(래來)성 작, 이백수

 낭독 인기를 모았던 진주탑으로 부터 시작되어

오랜 세월 1급 성우들이 정성을 기울여 청취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던  연속낭독에   아나운서가 참여 한 것이

그때로서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지만「폭풍의 언덕」등

몇 편의 명작소설이 문복순 아나운서의 낭독으로 방송

되는 동안 청취자들의 반응은 좋았습니다.

 

 

 

 

개성에서 태어나 개성여자고등학교에

다니다가 불시에 6.25가 일어나 개성을 나온 후

서울에서 살면서 이화여자대학교를 나오고 1957년 KBS 공채

아나운서가 되어 6년간의 아나운서 생활을 하던 중 결혼생활에 접어

들어 1963년 방송국을 떠났습니다. 라디오 시대에 아름다운 음성을 바탕으로

 선발된 아나운서였지만 그 미모 또한 뛰어나 TV시대에까지 이어졌다면 더 돋보이는

아나운서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TV에서도 잠시 그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그 기간이 짧았고 또 수상기가 30,000대밖에 되지 않던 시절이라

 TV화면에서 그 모습을 보신 분들은 그리 많지를 않아 아쉬움이 있습니다.

문복순 아나운서가 TV온파레이드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여난 1962년 KBS TV 온파레이드 입니다.

 

 

 

요즈음은 어떤 일을 하시느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개성은 당분간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어도 인연은 깊어 늘 개성을 생각하며 살고 또

남한에 있는 130명의 개성여고 동창회 회원들이 회장을 맡아

 달라고 해서 그 일도 하고 있고 성당 일에도 힘을 기울인다. 고

 하셨습니다. 아들 이기상씨는 SBS, EBS등 방송국에서 MC로 

활약하고 있고 장기범 아나운서의 부인 박종설여사와는 

이화여자대학교 동기동창으로 오랜 세월 친분을 유지

하면서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아래 영문자를

클릭하시면 문복순 아나운서

 얘기가 더 있습니다.

 

 

1950년대 아나운서 문복순, 김인숙, 송영필, 윤영중, 전영우 아나운서입니다.

 

 

 

  1958년 연말특집 아나운서 언파레이드를 마치고 촬영한 기념사진입니다,

앞줄 왼쪽부터 1.송영필, 2.강익수, 3.장기범, 4.임택근, 5.박종세, 6.최세훈, 7.이규영,

8.강영숙, 9.전영우, 10.황우겸, 11.유석춘, 12.강찬선, 13.김동만, 14.최계환, 15.최두헌,

16.문복순, 17.장금자, 18.유창경, 19.이광재, 20.한경희 21.김준철, 22.최만린,

23.이현숙, 24.윤영중, 25.조영준, 26.이본 아나운서입니다.

   

 

1958년 봄 남산 중앙방송국 스카이라운지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민병연 아나운서와 장기범 아나운서실장을 비롯한

아나운서들, 그리고 이승만대통령의 아들 이강석이 함께 한 사진이다.

1.최두헌,  2.유창경, 3.최세훈, 4.한경희,  5.민병연, 6.문복순, 7.황우겸,

 8.장기범, 9..이강석, 10.강익수, 이강석은 틈이나면 남산에 있는 방송국을

들렸다. 이강석과 남산의 방송인들과 촬영한 사진이 많다. 

 

 

 

정동에서 남산으로 방송국을 옮기고 

낙성축하연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1.이상만,

2.이보라, 3.김소원, 4.최무룡, 5.신원균, 6.윤일봉,

7.이용훈, 8.이규일, 9.김인숙, 10.황우겸, 11.문복순,

12.강영숙?, 13.민병연, 14. ?님입니다.

 

 

 

  

 

 

1957년말부터 중앙방송국 제1방송이 남산으로 옮겨 방송을 했지만

해외방송이나 대북방송등을 하던 제 2방송은 여전히 정동 옛 사옥에서

내 보냈습니다. 정동사옥에서 방송을 하던 아나운서는 잠시 남산 아나운서실을 

떠나 있는 겅우가 있었습니다. 위 내용은 일기 형식으로 방송관현 잡지에 실린 

문복순 아나운서에 관한 내용이고 아래 사진은 국제방송국에서 해외 청취자

들에게 홍보용 또는 수신보고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보내는 1962년의

 팸플릿입니다. 외국어 아나운서들과 문복순 아나운서의 모습입니다.

 

 

 

 

뒷줄 왼쪽이 문복순 아나운서이고  

이어서 배덕환아나운서와 일본어 정춘희(여),

손상욱아나운서,앞줄 왼쪽은 이우백 일본어 

아나운서(대일계장)입니다.

 

 

 

  1962년 텔레비젼이 새로 발족해서 방송요원을

 양성하던 시절 대규모의 강습회가 있었습니다. 원로방송인들이

강사진으로 참여했을때 문복순 아나운서도 그 강사진의 일원이었

습니다. 1962년 4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참고로 그시절 동아일보신문지상에 실린 공개방송 안내 기사 두편을 올렸습니다.

위는 1962년 1월 20일자이고 아래는 1962년 4월 11일자 신문기사내용입니다.

 

 

 

 

문복순 아나운서 글 더 보기 영문자 클릭

 

 

문복순, 1950년대 인기 여성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1431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자유의 메아리 씨그날.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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