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TV 만대이던 시절! 그로부터 50여년 반세기가 지났다. 세계에서 15번째 아세아에서 일본, 필리핀, 태국에서만 TV방송을 하던 시절, 1956년 우리나라에서 "황태영"이라는 한 민간인이 TV방송을 한다고 HLKZ 방송국을 세워 방송을 했지만 14인치 적은화면의 수상기 3,000대 정도가 보급되었을 뿐이었다. 그것도 처음에는 300대 정도를 요소 요소에 비치하는 등 대부분 특수한 경우에 비치하고 방송을 하면서 수상기를 보급하려는 것이었지만 TV가 사치품으로 인정되면서 관세도 늘어나고 여러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 수입도 어려운데다가 14인치 수상기 한 대에 쌀 70가마니 값을 주어야 하니 수상기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다.
흑백TV 만대이던 시절 KBS TV방송을 시작하던 때
개인으로는 TV방송국을 더 이상 운영 할 수 없어 당시 막강하던 장기영선생의 한국일보사에 넘겨 신문사에서 맡아 운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수상기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어서 3,000대 정도의 TV로 방송국을 운영하게 되니 운영이 어려웠던 것은 예나 다름없었다. 때마침 1957년 9월 15일부터 미군에서 TV방송 AFKN을 세워 한국에서 TV방송을 내 보내면서 PX를 통해 TV수상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바람직 한 것은 아니었어도 수상기 보급의 숨통이 트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안가 1959년 2월 방송국에 뜻밖의 화재가 발생해서 방송을 할 수 없게 되면서 미군의 TV방송국 AFKN 시설을 빌려서 겨우 명맥을 유지 해 나갔다. 당시 TV방송국 운영 주체 측에서도 운영이 어렵기만 한 TV방송국을 복구 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없어 세월만 흐르다가 4.19가 일어나고 5.16이 일어났다.
이에 앞서 당시의 공보실장이던 오재경은 1959년 신년사를 통해 국영 TV방송 설립의 의지를 피력하면서 TV방송 설립을 추진해서 대통령의 허락을 얻은 상태였지만 송인상 재무부 장관의 어려운 재정상황 등으로 재정지출을 할 수 없다는 상황에 부딪쳐 실현이 지연되던 중 오재경 실장이 물러나면서 TV방송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2년 후 5.16이 일어난 직후 오재경 실장이 7월에 다시 공보부장관으로 취임하면서 제일먼저 추진 한 일이 TV방송국 실현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 “춘하추동방송” 블로그 카테고리 “남산시절” 편에 있어서 그 글을 연결한 것으로 가름 한다.
KBS TV방송을 시작 할 때 흑백 TV수상기는 8,000대에 불과했고 미군이 가지고 있는 수상기를 합해서 10,000대 정도 보급되었다. 방송을 해도 수상기가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긴급히 20,000대의 수상기를 무관세로 수입 추진해서 1차로 1962년 1월에 7,600대를 보급하고 2차로 6월말부터 8월말에 걸쳐 12,400대가 도입되어 9월부터 보급 되면서 30,000대 정도의 TV수상기가 되었다. 1963년 1월부터 TV방송 운영 임시조치법이 시행 되면서 수상기 한대당 100원의시청료를 받게 됨에 따라 수상기를 등록한 결과 모두 32,097대가 등록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까지 수상기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이때 수상기 한대 값은 14인치 약 35,000원, 24인치 55,000정도였고 쌀 한가마니 값이 3,000원 정도였을 때여서 24인치 수상기 한대에 쌀 18가마니 값이었다. 뒤의 얘기는 본 “춘하추동방송” 블로그 카테고리“남산시절” 편에 있는 글을 연결한다.
TV방송을 처음 시작하던 그때 그 얘기 ( 1 ) -TV개국 http://blog.daum.net/jc21th/17780061
TV방송을 처음 시작하던 그때 그 얘기(6)- 초기 TV방송망과 수상기 보급실상 http://blog.daum.net/jc21th/17780066
KBS가 TV방송을 실시하던 무렵 미국은 6,000만대로 전 가정에 한대꼴의 수상기가 보급되었고 1954년부터 칼라 TV가 실시되어 칼라 수상기도 상당량 보급되었을 때였다. 영국은 1,500만대가 보급되었고 일본은 1,100만대가 보급되었으며 10만대 이상의 칼라 수상기가 보급되어 시청하고 있을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에서도 TV방송이 실시 되면서 관심이 쏠려 정부가 수상기를 무관세로 도입해서 배급하자 TV를 사려는 경쟁대열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때 TV수상기를 보급하던 상황을 TV방송국 추진 실무요원으로 참여했던 황우겸 선생님이 써서 1963년 5월에 발간한 방송가의 뒷이야기 “바보상자”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그 글을 인용한다.
혁명정부는 TV국이 개국하기에 앞서 1차로 TV세트를 7,600대, 세금 없이 10개월 월부로 배급하고 이어 이어 2월 17일부터 2차 계약 신청서를 배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입버릇처럼 말하는 일반상가의 불경기와는 달리 아랑곳 없이 신청서 배부 첫날인 17일 아침부터 수천 명이 태평로에 있는 공보부 대행인 대한방송문화협회에 몰려들어 드디어는 백차 두 대까지 동원되는 혼잡을 이루었다. 배부시간 10시 훨씬 전인 새벽 5시부터 나와서 기다리는 시민들도 있었다.
특히 2차계약이 이렇게 혼잡을 이룬 것은 1차 구입한 실례를 직접 보았고 1차 때는 한국 텔레비전 방송이 없으나 실제 KBS방송을 이웃에서 보게 되어 하나의 자극을 받았던 모양이다. 역시 2차 때도 면세 조치로 10개월 월부였다. 일차 때는 일제 14인치뿐이었으나 2차시에는 일제 산요, 도오시바, 미제 RCA, 웨스팅하우스 등의 여러 종류에 사이즈도 14, 17, 19, 21, 23인치 등이 있었고 대수도 1차 때보다 훨씬 많은 12,400여대에 달했다. 이 통에 방송문화협회는 가만히 앉아 돈을 벌게 되었는데 신청서 한 장에 구화 100환씩 받아 650만환이란 거금을 거뜬히 얻은 것이다. 이것도 TV붐의 한 장면이라고나 할까?
결국 12,400대에 몰려든 신청자 수는 6만 5천에 달하여 주관자인 방송문화협회나 공보당국도 배부에 공평을 기하기 위하여 신중했다. 결과 각 직종별로 18%의 신청자가 혜택을 입게 되었다. 9월 24일 드디어 미국으로부터 TV세트가 이 땅에 도착하여 신청자들의 손으로 배급되었다. 이날 서울역 구내 화물 취급장인 미곡창고 뒤에서 직접 배급했었는데 이미 신청 해 놓은 것을 찾아 가는데도 어찌나 혼잡했는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상기 보급에 따른 바보상자에 있는 에피소드 글 한편을 올렸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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