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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의 최대 이슈 신탁통치 소용돌이와 방송

이장춘 2013. 2. 23. 19:19

 

 

 

1945년 12월 27일! 모스코바에서 열린

3상회의에서 미, 영, 중, 소 4개국이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국내 각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전해지면서 해방정국을 강타했습니다. 일본군이 물러나면 해방이

온다는 국민들의 기대에 찬물을 꺼않는 소식이어서 이로부터 신탁통치를

놓고 온 나라가 들끓었습니다. 12월 30일 송진우선생이 암살당하면서

해방공간의 첫 희생자를 냈고 김구선생님은 목숨을 걸고

신탁통치를 반대 한다면서 대대적인 신탁통치

반대시위를 준비했습니다.

 

해방정국의 최대 이슈 신탁통치 소용돌이와 방송

 

 

1월 1일 이 나라를 통치하던 하지는

김구선생님을 불러 설득했지만 김구선생님은

끝까지 의사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처음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던 좌익계열에서는 새해 들어 찬탁 쪽으로

기울어 졌습니다. 이로부터 나라의 뜻은 완전

둘로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신탁을 결사반대하는 우익진영과 찬탁으로 돌아선

좌익진영은 민족의 대행사 3.1절이나 광복절 행사마저도 따로

거행하는 불행한 사태가 연속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된 미. 소 공동위원회는 공전되고 국민의 마음이 갈라지면서 남과

북이 더 멀어졌습니다. 1947년 8월 10일 미소 공동위원회 미국 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은 “한국 국민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면 그 민의에 따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는 의사를 밝혔고 9월 17일 이 문제는 UN총회에

회부되어 11월 14일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으로

낙착되어 남한만의 총선을 거쳐 정부가 수립되었고

북한정권이 따로 세워져 남과 북은 완전히

둘이 되었습니다.

 

 

 

 

그때의 방송국사정은 군정의 지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보도는 가능했지만

모스코바 삼상회의를 실현시키려는 군정의 뜻에 어긋나는

방송을 하는데 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우리국민의 뜻을 받들어야 할

방송국이어서 당시의 문제안 기자는 국민의 뜻을 담은 기사를 썼습니다.

그때 30분을 방송할 수 있는 기사를 썼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군정청은

이를 허용하지 않아 방송은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방송인들은

국민의 뜻을 받들어 국민과 함께 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

했지만 그것이 실현될 리가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방송은 국민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고 방송이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에

앞장서온 문제안기자는 군정청의 눈총을 받다가 6개월 후

파면을 당하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문제안 기자의 그때

얘기와 모스코바 3상회의 내용을 함께 올립니다.

 

 

문제안 선생님의 그 때 그 얘기

 

 

 

 

신탁통치 문제가 터지자, 서울 거리는

8·15 때보다도 더 무섭게 또다시 폭발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함성이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나는 12월 30일 아침부터

경교장의 김 구선생,돈암장의 이승만박사, 근민당의 여운형 선생, 공산당의

박헌영 선생 (선전책 정태성 대변인) , 김규식(경교장에서) 선생 다섯

분에게서 골고루 다 담화를 들어 30분짜리 정치 기사를 썼다.

 

그러나 글자 하나 빼지 않고 번역까지 해서 제출한

내 기사는 미군 감독관으로부터 검열이 나오지 않았다.

방송국에 파견 나온 미군 소령까지도 너무 중대한 기사이기

때문에 책임질 수 없다고 공보처장인 뉴먼 대령 사무실을 거쳐,

하지 중장 사무실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6시 뉴스 시간에

방송할 예정이었으나, 검열이 나오지 않아서 7시, 9시, 10시, 11시.

이튿날인31일 아침까지도 내 기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신탁

통치에 대한 그 불같은 반대 소리는 이렇게 해서

중앙방송국의전파를 타지 못하고 말았다.

 

이것이 우리 방송국이 우리 겨레와 멀어진

첫 사건이었다. 그렇게도 민중의 지지와 환호를 받아온

8. 15후의 우리 방송은'미국의 앞잡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한국인 전 직원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 사람을 위한 방송' 으로 되돌아가자고, 권고도 하고, 애걸도

했다. 그러나 미군들은 '오만한 주둔군'의 껍질을 벗어

던지지를 못하고 사사건건 간섭을 하려 들었다.

 

방송은 점점 인기가 떨어지고, 결국에 가서는

미군 감독관들은'한국 방송 개선책'을 현상 모집까지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인 직원들은 열심히 의견들을

써 내놓았다. 나는 배알이 뒤틀려서 내놓지를 않았다. 6월 하순의

어느 일요일 날.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영등포 저지대-지금의 목동일대-의

이재민들이 힘차게 일어서려는 복구 작업 현장의 현지답사 기사를 쓰고

있는데, 미군 감독관 한 사람이 "당신 기사는 시와 같다"고 비행기를

태워가며 한국 방송 개선책을 쓰라는 것이 아닌가. 아니꼬워서

3년 전에 먹은 송편이 곤두선 채 튀어나올 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남이 말할 때에는 콧방귀도 안 뀌다가,

새삼스럽게 개선책을 말하는 그 '오만'과 '위선'에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솔직하게 그 오만과 위선을 지적하는 건의서를

휘갈겨 써서 내놓고 말았다. 그것은 미군 방송정책에 대한 통렬한

공격이었고, 나의 결연한 '일인 투쟁 선언'이었다. (달걀로 바위를

때린 것이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나는 그렇게도 떠나기 싫던

서울방송국에서 ‘파면’이란 이름으로 쫓겨났다.

 

내쫓긴 바로 그날 오후 2시에

조선통신사 기자로 취직해서 신문기자 20년의

내 인생이 새로 시작되었다. 그 때, 그 건의문을 지금도

나는 갖고 있다. 그러나 반미 감정이 수그러져서, 우리겨레가

모두 다 어른스러워졌을 때, 천천히 공개할 생각이다. 어쨌거나,

한국 초대 방송기자의 생명은 1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그 역사적인 막을 내리고 만 것이었다.

 

 

모스코바 3상회의 결정내용

 

 

 

 

1945년 7월말에 열린 〈포츠담회담〉에서는

전후 처리를 위하여 미·영·소 3국 외상회의를 개최하기로 한

결정에 따라 1945년 12월 16일에서 25일까지 회의를 열고, 12월 27일

조약 문서에 서명해서 모스크바 현지 시간으로 12월 28일 오전 6시에

발표된 결정서 3항의 한국 관계 전문(全文)입니다.

 

1. 코리아를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또한 민주적 원칙에 바탕을 둔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여건의 창출을 위하여, 그리고 장기간의 일본지배로 인한

참담한 결과를 가능한 빨리 제거하기 위하여, 코리아의 산업과

운수 및 농업 그리고 코리아인의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임시적인 코리아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2. 임시적인 코리아 정부의 구성을 돕기 위하여

그리고 적절한 방책을 미리 만들기 위하여, 남부 코리아의

미군사령부와 북부 코리아의 소련군사령부의 대표들로써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설립할 것이다. 공동위원회는 그 제안들을 준비함에 있어서

코리아의 민주적 정당·사회단체들과 협의할 것이다. 공동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서는 공동위원회에 대표권을 가진 양국 정부가 최종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소·중·영·미 정부들의 심의를 위하여 제출되어야 한다.

 

3. 임시적인 코리아 민주정부와 코리아의

민주적 단체들의 참여 아래, 코리아인의 정치-경제-사회적

진보와 민주적인 자치정부의 발전 및 코리아의 민족적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협력·원조 (신탁통치) 할 수 있는 방책을 작성하는 것이 공동위원회의

임무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코리아 임시정부와 협의를 거친 후에, 최고

5개년에 걸치는 코리아 4개국 신탁에 관한 협정의 체결을 위한

미·소·영·중의 공동심의에 회부될 것이다.

 

4. 남부 및 북부 코리아 모두에 영향을 미칠

긴급한 문제들을 심의하기 위하여, 그리 고 행정·경제적

문제들에 있어서의 남북 양 사령부 간의 영구적인 협력을

가능케 할 방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코리아에 있는

미국사령부와 소련 사령부의 대표로 구성된

회의를 2주일 내로 소집할 것이다.

 

최초로 생긴 3.8선 경계초소

 

미. 소 공동위원회 공고를 열심히 읽고 있는 시민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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