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현업을 담당 하시던 때의 오승룡선생님/1962년
오승룡선생님은 1956년부터 실시된 이나라 최초의 TV방송 HLKZ에서 방송을 시작해서 KBS TV개국, 초기 시설확장 등 TV방송의 기틀을 확립하는데 기여했고 MBC와 미국 웨스팅하우스 방송사에서 재직한후 다시 KBS에 돌아와 시설국장 등 TV방송기술의 핵심적인 업무를 담당하셨습니다. 따라서 오승룡선생님의 생각과 현장체험기록은 이나라 TV방송의 기술사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보내주신 생생한 기록시진과 글을 한데 엮어 기록으로 남기고자 선생님의 글을 올렸습니다. "춘하추동방송"에는 이 글 외에도 여러편의 글이 올라 있습니다. 검색창에서 "오승룡"을 검색하시면 쉽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방송인 오승룡선생님의 체험기록으로 본 초기 TV방송
5.16혁명 후인 1961년 8월14일 최고회의의 결정에 의해 국영TV방송 창설계획이 확정되고 이에 따라 공보부 방송관리국과 서울중앙방송국이 12월24일을 목표로 텔레비전 방송국 건설작업을 시작했다. 건설공기가 짧은 관계로 우선 미국 RCA사와 22만 달러 상당의 TV 방송 기자재의 구매계약을 체결하고, 10월10일에는 기 확보된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동 3가 소재 대지 4,086m2 (1,236평)에 연건평 5,289m2 (1,600평)의 3층 건물로 텔레비전 방송국 스튜디오 신축공사를 착공하게 되었다. 당시 TV 방송에 대한 국내환경은 한국의 첫 상업 TV방송으로 1956년 5월12일 KORCAD (한국 RCA 배급 주식회사)에 의해 개국된 HLKZ-TV는 운영난으로 1년 후인 1957년 5월 6일에 한국일보로 넘어가 DBS-TV (대한방송주식회사)로 개편되어 운영 중 불행이 겹쳐 1959년 2월 2일 화재로 전 방송장비가 소실되었다.
한편 1950년 10월 4일 주한미군과 외국인 대상으로 라디오방송을 개시한 AFKN은 1957년 9월 15일에 채널3으로 TV 방송을 개시하고 필름을 주로 한 AFRTS에서 제공하는 드라마, 버라이어티쇼까지 포함된 다양한 편성으로 한국 시청자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1958년 9월에는 용산 미8군내에 대형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1959년 1월 4일부터 필름에만 의존했던 방송에서 탈피하여 자체 제작한 방송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자리가 잡혀감에 따라 1959년 3월 1일부터 휴전선 근처 미군부대로부터 남쪽으로는 부산까지 전국에 산재된 미군부대 중심으로 20여개의 중계소를 설치하여 난시청도 해소하게 되었다.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인 최초 TV 상업 방송은 AFKN-TV와 USIS의 지원으로 1959년 3월 1일부터 채널3으로 오후 7시부터 30분 임시방송을 재개했고, 1960년 1월 4일부터 오후 6시부터 30분 방송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국영TV방송의 개국으로 1961년10월15일 채널9 주파수가 체신부에 반납되고 첫 TV 상업 방송은 영원이 사라지게 되었다. 1961년 7월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두 번째 취임한 오재경 장관이 총 지휘를 맡고 분야별 업무는 건물을 짓고 장비구입과 설치하는 일은 이인관 기감을 정점으로 한기선 시설과장과 그 요원들, 그리고 전HLKZ-TV의 기술부장 신광우와 강진구 과장 및 요원들이 방송시스템의 기본설계와 설치에 동참했다. 한편 방송국 개국과 관련된 모든 계획과 편성 제작의 책임은 전HLKZ-TV의 방송부장이고 당시 문화 라디오 방송 개국 준비 책임자로 있던 최창봉을 영입하여 TV 프로덕션 준비실을 마련했다.
프로덕션 준비실은 HLKZ-TV에서 2년 이상 방송실무 경험을 가진 15명으로 구성되었고 10월 하반기부터 자체학습을 위한 세미나와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추가 모집하여 개국 준비 요원으로 참석시켰다. 신규 채용된 요원을 훈련시킴과 동시에 기술 요원 김성렬을 반장으로 AFKN에서 기술교육을 받았고, 일본 NHK의 단기코스에 방송 요원 3명, 기술 요원 2명을 파견 현장실습을 받게 하였다. 미국에 발주한 방송장비들은 개국 10여일 전인 12월10일에 공수로 겨우 입하되고, 장비 설치 담당들은 장비 도착 전과 후에 할 수 있는 작업을 구분하여 장비 도착 전에 많은 일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장비 도착 후 일주일간 철야로 장비를 설치하고 점검하여 개국 일자에 겨우 맞출 수가 있었다.
최초 부조정실
개국 당시의 시설은 TV 방송을 제작하고 송출하는 연주소와 방송을 전파로 송신하는 송신소 시설로서 연건평 1,600평의 연주소에는 방송 시설로 120평의 A 스튜디오와 7평의 뉴스 스튜디오, 조정실, 영사실 및 래크실, 조명실, 아나운서 부스와 세트 창고, 연기자 대기실 및 방청석과 사무실 등이 있었고 공동시설로 변전실, 냉난방실이 있었다. 요장비로는 A 스튜디오에 3“ IO (이미지 오디콘) 카메라 2식, 각종 조명 시설, 영상, 음향 모니터가 있었고, 뉴스 스튜디오는 A 스튜디오 카메라를 이용했다. 조정실에는 영상 절체 장치와 음향콘솔, 영사기, 리모트 컨트롤 카메라, 영상 조절기, 각종 영상 음향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영사실
35 mm 필름 영사기와 35 mm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사용 가능 하도록 멀티프렉셔가 힘께 설치됐다. 래크실에는 영상의 시제 일치를 위한 동기 신호 발생기와 영상 신호 교정을 위한 안전화 증폭기, 그리고 장거리 전송에 필요한 라인 드라이빙 앰프 등이 설치되어 있었고, 방송국 구내에 여러 곳에 영상을 분배하기 위한 영상 분배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체신부 건물 안 7평 규모의 기계실에 송신기를 조립하여 설치하고 철탑위에 안테나를 세우고 송신기출력을 다이프렉셔를 통해 급전선과 연결해 안테나에 공급하는 것으로 많은 작업이 추운 날씨에 옥외에서 진행되었는데 건설지원 장비도 별로 없고 부품도 부족한 상태에서 작업이 진행되었다. 특히 어려웠던 것은 다단 안테나에 분기 케이블을 정확히 배선하는 일, 그리고 해발 245 m 고지에 연희 송신소에서 사용했던 75 m 자립식 철탑을 이설하는 일, 또한 그 위에 무게 1.5 톤에 길이가 15 m나 되는 다단 스퍼턴스타일 안테나를 고정하는 일 등 모든 일을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기적과 같이 기일 내에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중계차내부 TV M/W 송신기 주파수 조정
한편 남산송신소에는 중계용 마이크로웨이브 수신기를 설치하고, 철탑에 6‘파라볼라 안테나를 설치해 외부로부터의 신호 수신을 가능케 했다. 당시 S-T Link는 영상은 RG-12/U 동축 케이블을 사용했고, 음향은 체신부 회선을 이용했다. TV방송을 단기간에 실현 가능케 한 것은 1961년 7월 장관으로 취임한 오재경의 강력한 업무 추진과 방송 시설을 책임진 이인관 기감, 그리고 방송 개국 준비를 책임진 최창봉과 함께한 요원들, 그리고 새로 모집된 방송 및 기술요원들의 노력으로 원래 계획했던 본방송 예정일 196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오후6시 부터 1시간 시험방송을 보내고 1961년 12월 31일 6시를 기해 역사적인 개국방송을 시작했다.
이 날은 50년 전 KBS 텔레비전 방송이 탄생한 날로 당시 이 사업에 참여 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 이기도 하다. 박정희의장과 정부요인, 내외 사절을 모신 가운데 남산 기슭에 자리 잡은 KBS-TV 청사에서 새 역사가 창조되는 순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대했던 순간 이었다. 당시 기술 감독은 김성렬, 연출은 이기하였다. 개국을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프로그램을 제대로 제작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1962년 1월 14일까지 보름 동안 하루 4시간씩 주로 영화필름에 의한 임시 방송을 했고 1월 15일부터 정규방송을 하게 되었다.
음향출력 1Kw로 송신 안테나 이득이 6.7로 실효 복사 전력은 13.4Kw로서 가시청 구역은 500μV/m 기준으로 동은 양평, 서는 인천, 남은 오산, 북은 문산까지 경기 일원에 한정되고 비공식 집계로 보급된 TV 수상기는 약 8,000대에 불과했고 1인당 국민소득은 100불 정도였다. 방송개국까지 모두 준비요원 자격으로 업무를 수행 했으나 1962년 2월 5일 KBS-TV 직제가 처음 공포 되어 새로운 기구가 발족되고 간부들이 임명됨에 따라 준비실의 제작실무진은 KBS에 남는 분도 계셨지만 개국 요원 상당수가 방송국을 떠났다. 이때 새로운 직제에 따라 구성된 인원은 국장 황기오, 편성과장 문시형, 제작과장 김규, 기술과장 박능상, 서무과장 윤철중, 남산송신소장 계수경이였다.
사용하다 반납된 이동방송 차량을 방송관리국으로부터 인수해 KBS-TV 기술진이 2개월에 걸쳐 개수해 TV 방송 중계차로 사용했는데 주장비중 25m/m-100m/m 줌렌즈가 부착된 RCA사 TK-15/35형 카메라가 1대 뿐으로 중계 방송시 연주실에 설치된 카메라 1대를 철거해 임시 설치 사용했다. 최초 중계방송은 1962년 3월 21일 명동에 위치한 국립극장 개관식으로 KBS-TV기술진이 총 동원되었고 1962년 3월 21일부터 10월 5일까지 남산과 가시거리에 있는 지역에서 55회에 112시간 09분의 TV중계방송을 했다.
방송을 개시한 후 중앙 TV방송국으로서의 기능을 갖추기 위해 2차에 걸쳐 대대적인 시설 확충 공사가 있었는데 1차 확장공사는 1963년 4월부터 2개의 스튜디오 증설공사를 착공해 1965년 5월 13일 준공 되었는데 70평의 B스튜디오, 30평의 C스튜디오, 13평의 부조정실, 18평의 영사실, 44평의 주조정실과 각종부속시설과 새로운 카메라를 들여와 지역 방송 확장에 대비해 당시로서는 현대식 시설을 갖추었다.
2차 확장 공사는 1969년에 사옥 뒤편의 공터에 새로 착공한 130평 규모의 D스튜디오로 1971년 4월부터 활용되었다. 또한 프로그램 제작방식도 생방송 위주에서 1966년 3월부터 일부 프로그램을 녹화 제작했는데 당시 2헤드 헤리컬 휴대형 녹화기 VR-660은 편집기능이 없어 중간에 NG가 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해야 했다. 1967년 6월과 12월 편집 가능한 VR-660B가 도입되어 본격적인 녹화방송이 시작되었다. 1969년 5월과 11월 4헤드방식 표준형 VR-1200A 2대도입하였는데 이는 편집이 용이하여 프로그램제작에 편리하고 안정성이 있어 프로그램 제작이나 송출이 한층 원활해졌다.
프로그램 수요를 감안하여 1970년11월과 1971년 6월에 VR-1200B 2대를 추가 도입 활용했다. 1972년 3월에는 Slow Motion VTR SH-100이 도입되어 느린동작도 녹화할 수 있게 되었고 스포츠중계나 드라마에 활용되었다. 특히 D스튜디오에는 카메라 크레인을 국내에서 최초 설계 제작했는데 카메라를 360도 회전할 수 있고 지상 75 cm에서 350 cm까지 상하 좌우로 움직일 수 있게 제작되어 쇼, 드라마 제작에 활용했다. 1965년 연주소 증축공사시 TV 연주소-남산송신소간 S-T Link로 사용했던 RG-12G 동축케이블은 M/W장치로 대체하여 화질을 크게 개선했다. 1972년 2월 VTM-6A M/W 송수신기를 추가 구입하여 설치했다.
위성 등장으로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1968년의 제19회 멕시코 올림픽,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실황중계를 하였고, 1970년 6월 금산위성통산지구국이 개설되면서 한국의 독자적 국제중계가 가능해졌다. 또한 TV방송 서비스구역 확대를 위해 방송 관리국 주관으로 1962년부터 주요 도시 근처 산고지 흑성산 (천안), 식장산 (대전), 금오산 (대구), 구덕산 (부산), 미륵산 (전주), 무등산 (광주) 등의 기술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토대로 각 중계소의 송신 전력, 송신 방식, 송수신 안테나 설계, 채널을 선정 하여 KBS-TV 네트워크 연차 계획수립을 했다. 이케가미와 체결, 1966년 초에 입하 그 해 8.15일 준공목표로 설치공사 서둘러 완성 전국 주요도시에서 TV방송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1차로 1966년 8월 15일까지 2차로 1971년에 유인 TV 중계기를 설치했다. 1972년부터는 국지적인 난시청지역 해소를 위해 무인 TVR 설치가 시작되었다. 남산 TV송신소의 송신출력은 처음 2Kw에서 1969년 12.5Kw로, 1972년 8월 50Kw로 증강시켜, 서비스지역이 서울, 경기는 물론 강원, 충청남북도 일부 지역까지 양시청권으로 확대 되었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서비스 가능 지역이 대폭 확대되었고, 또한 경제발전에 따른 국민생활의 향상과 국산TV의 생산, 그리고 위성 중계와 드라마 돌풍으로 TV 수상기 보유 대수가 급격히 증가하여 TV방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969년 12.5Kw로, 1972년 8월 50Kw로 증강시켜, 서비스지 역이 서울, 경기는 물론 강원, 충청남북도 일부 지역까지 양시청권으로 확대 되었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서비스 가능 지역이 대폭 확대되었고, 또한 경제발전에 따른 국민생활의 향상과 국산TV의 생산, 그리고 위성 중계와 드라마 돌풍으로 TV 수상기 보유 대수가 급격히 증가하여 TV방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을 위해 라디오와 TV 기능을 한곳에 집결할 수 있도록 방송센터 건립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76년 11월 1일에 여의도에 제작동과 설비동으로 분리된 아시아 굴지의 종합방송센터를 개관하게 되었으며 머지않아 닥쳐올 컬러 TV 방송에 대비한 장비도 일부 포함되었다. 이로서 정동에서 남산으로 이동한지 14년 9개월 만에 여의도 방송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또한 1978년 7월부터 TV 방송문화의 균점과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 할 목적으로 전갑지국에 TV방송시설을 갖추어 로컬 TV방송을 실시하게 되었고, 이어 1980년 12월 1일에는 컬러 TV 방송도 개시했다. 제 24회 서울 올림픽대회의 중계방송의 주관 방송국으로서 세계적 규모로 성공적으로 실시하고 다가올 2000년대를 대비하기 위해 1985.12 -1990. 11 KBS종합방송센터를 건설했다.
많이 변해 지상파는 흑백TV, 컬러TV, 내년 초 디지털TV (HDTV)로, 이와 함께 위성TV, CATV, 인터넷방송 등 다미디어, 다채널 시대가 되었다. 선진국들이 수백 년 걸린 일을 우리는 단 50년 만에 이룩하였는데 우리의 지난 경제 발전사와 같이 한민족의 하면 된다는 저력의 힘이 아닌가 생각된다. 금년 회수년을 맞은 나로서는 KBS-TV 초창기, 시험방송시기, 그리고 개국방송 때 Video Man으로 6개월, 그 후 김성렬, 강진구의 뒤를 이어 1년간 기술 감독을 한 후 보수반장과 중계기술감독을 지냈다. 1963년부터 KBS 제1차 시설확장공사 책임기사로 선발되어 약 2년간 설계, 공사입찰업무를 맡았고 TV기술과 제1조정계장을 지낸바 있다.
이제 더 바람이 있다면 KBS가 훗날 통일된 한반도의 중앙방송국으로 영원히 남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그날이 어서 오기를 바랄 뿐이다. 오승룡 (吳承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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