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

방송국에서 LP레코드를 제작해서 직접 보급하던 시절

이장춘 2013. 1. 12.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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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앞 오솔길을 클릭하시면
  • 블로그 오솔길로 감)이 춘하추동방송
  • 방명록에 글을 남기셨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 옛날 얘기 한편을 써 올립니다. 지금은 고물상에서나

    구경 할 LP레코드 판을 KBS가 직접 만들어서 보급

    했던 이야기입니다.  LP판을 만들 수 있는

    민간 회사가 없어서였습니다.

     

     

    어릴적에 집에 유성기가 있었습니다.
    어른에게 질문이 잘 안되던 시절이라 어떻게

     저곳에서 노랫소리가 날까 궁금했지요. 좀더 커서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노래를 들었습니다. 열너덧살이나

    위인 사촌 언니께 물었습니다. "언니, 이 조그만 곳에 사람이

     들어 갈 수 없는데 어떻게 소리가 들려?""호호, 사람 목만

     들어가는 요술상자란다." 시설이 열악한     그시절에

    지금보다 훨씬 뜨꺼웠기에 오늘의 우리들은

    눈호강 귀호강을 합니다. 좋은 자료에

    늘 감사드립니다. 오솔길.

     

     

     

     

    지금 들려오는 이승만 박사의

     육성은 1942년 미국에서 VOA를 새로

     창설하고 우리말방송을 시작 할때 VOA

    (미국의 소리)에서 한 첫 방송으로 1958년

     KBS가 원음을 구해서 "싸워라 이겨라,

    고국 동포여!"LP레코드판으로 제작

    해서 보급한 것이었습니다.

     

     

    방송국에서 LP레코드를 제작해서 보급하던 시절

     

     

    1950년대만 해도 6.25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을때로 국내에서 레코드 제작이

    어려워 일본에 가서 제작 해 왔고 그것도 한면에

     2분 반정도를 넣어 앞, 뒤 5분정도 밖에 수록할 수 없어

     사용이 극히 불편했습니다. 국내 녹음시설도 여의치 않아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해서 일본에 가서 레코드로

     제작 해 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 1956년에 방송의 최고책임자 공보실장에 부임한

     오재경 공보실장은 KBS가 앞, 뒤 30분을 수록 할 수 

    있는  LP레코드 판을 직접 제작하고 노래를

    만들어 방송도 하고 레코드에 수록해서

    보급하도록 했습니다.

     

     

    오재경 장관과 한기선 시설과장님이 레코드 제작과정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1957년 말 남산방송국이 완성되어

    정동에 있던 방송시 옮기면서 공간이

     생겨 그 공간에 레코드제작 시설을 갖추어 레코드를

     제작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들으신 이승만박사의 육성도

     그때 KBS가 제작해서 보급했습니다. 이 시절에는 미국에서 필요한

    LP레코드판을 들여와 방송에 활용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외국의 음악이었

    습니다. 국내에서 가곡이나, 국악, 민요, 어린이 노래 등 외국에서 들여올 수 없는

     레코드는 국내 제작이 절실했지만 국내에서 그런일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시설도 없던 시절이라 부득히 그런 방법으로 레코드를 제작해서 방송국에서도

    사용하고 일반에게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가곡, 민요나 국악,

    어린이 노래 때로는 우리말로 된 크리스마스 케롤 등을

     대량 공급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방송국에서 레코드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 생방송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모로 노력을 기울여온 성과였고 이때 방송국에

    근무했던 기술자 진백림(위 사진)은 녹음기 제작 등의 경험이

     있어 원반을 만들고 그 원반에 녹음을 하는일을 맡았고

     이성희님 (아래사진)은 실버링과 동 도금하는

     일을  맡았다고 했습니다.



     


    1960년대 들어 방송국 직원이었던

    이성희, 최성락님 등 기술자 분들이 방송국을

    퇴직한후 민간인 신분으로 녹음실도 만들고 레코드

    공장을 새워 활동을 하면서 재법 돈을 모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레코드판 제작에 힘을 기울였던 이성희님은 뒷날

     "성음사"사장이 되었고 방송 기술자였던 최성락님은 그 시절에

     유명했던 녹음실 "서울음향"을 창설해서 크게 활약했습

    니다. 특히 이성희는 2015년대중문화 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습니다.


    이성희 공적사항


    음반제작 기술자로 활동하여

    대한민국 최초 고품질 LP레코드판을

    제작해 한국 음반 산업 발전을 이끈 선구자,

    음반제작사 ‘성음’을 통해 라이센스 음반을 제작

     및 보급하며 음악의 대중화에 크게 힘쓰며

    대한민국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김


    상전벽해라더니 세상이 많이

    변해버린 오늘날에는 그처럼 어렵게

     만들어보급했던 LP레코드 판은 고물상

    에서나 팔고골동품을 수집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위 사진은 서울음향을 설립,

    경영하던 최성락님이 1965년 선배

    방송인 박능상님이 방송국을 뒤로하고 이민을

    떠날때 그가 운영하던 서울 스튜디오에서 송별모임을

    가졌을때의 모습이다. 위는 그때 촬영한 사진으로 번호순으로 

    1 김익모(金翼模,2 박준병(朴濬秉), 3 정항구(鄭恒坵), 4 박능상

    (朴能祥), 5 권혜경 (가수 權惠景), 6 홍기봉(洪基逢) 7 최성락,

     8 이충수 (李忠秀), 9 오신팔(吳信八), 10 박규진(朴圭進)

    11 이승우(李承雨) 12 박(최)종호(朴鍾浩) 13 최봉식

    (崔鳳植), 14 한영식님이 함께 했습니다.

    정항구님 제공 설명


     

    화     보


    1958 레코드 제작시설을 하고

    오재경 공보실장이 테잎절단을 하면서

    레코드제작 현장을 들아보고 있는 장면



    오재경 장관과 이규일 방송 관리국장, 이근상

    공보국장이 레코드제작 현장을 들아보고 있습니다.




    정항구 선생님 글 (1957년 KBS 엔지니어)


    위 레코드 제작실은 공보실이

    KBS 안에 설치한 것이고 공보실 직속으로

    운영 되었습니다. 그때는 KBS가 공보실 소속으로

    어 있을 때라 여기 제작실에 근무한 진백림, 이성희 등은

    KBS에서 일하던 기술자였습니다. 박한준과 함흥중학교 동기

    동창이기도 한 진백림은 사내결혼을 해서 부인은 대일방송

    아나운서 정옥기였고 그녀는 일본 오사카 밑에 있는

     심태지가 고향이었습니다. 

    .

    여기 설치된 기계는 KBS 정동방송

    시절 사용하던 턴테이블은 성능이 좋아

     사람이 그 위에 올라가도 레코드가 돌아갈 정도로

     우수한 제품이었습니다. 정동방송시절에 방송된 드라마

     ‘청실홍실’, ‘산 넘어 바다건너’ 드라마는  이 기계를 이용

     박경환선배가 녹음을 해서 방송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다보니

    테이프 커팅 하던 그날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날 돼지머리,

    약주 술 등 음식 차려놓고 제를 올렸습니다. 고사를 올린

    다고 하지요. 그날 숙직이었던 저 정항구는 그

    음식에 술을 많이 들어 어려움을 겪으며

    실수를 했던 기억이 영원히

     잊히지 않습니다.



    이성화 상업라디오 최초아나운서님 1959년



    2017.09.06 17:07

    옛날 기기 보니까 그시절 생각이

    납니다.   그시절 부산 민간방송 HLKU

     에서는 외국노래를 틀려면 미국 공보실이나

    광복동 다방에서 빌려다쓰고 돌려주고했다고

    합니다.많은 변화가 상전벽해입니다. 언제나

     귀한 발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장춘

    2017.09.06 17:13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이런 얘기하면 다른 나라

     얘기로 들릴 거예요.


    박광희 선생님 글 

    .


    2017.09.06 22:11

    한국 레코드 산업의 선구자들의

     면면을 소상히 기록으로 정리해주셨

    습니다. 귀중한 기록 입니다.



    구능회 선생님 사연



    1969년 9월..당시 TBC

    면접 시험에서 시험관이 질문을

    했습니다...^^시험관) LP에 대해 설명해
                 보시오.나) ...한참을 고민하다..
          모르겠습니다.

    시험관) 그만 나가 보시오.


    그래서 보기 좋게 낙방했지요.

    당시 면접관이 10명 쯤 된걸로
    기억하는데..딱 그거 하나 물어
    보고 끝난 게, 참 어이가 없더 이다.

    순 산골 촌놈이 되다보니 전 그 당시에

     LP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ㅎㅎ

    그래도 그렇지..치열한 필기 시험 합격자가

     고작 30명인데.. 딱 한문제 물어 보고
    나가라니..많이 야속했지요.

    그 다음 달에..KBS 입사 시험 치고

     입사했는데..그 후 세월이 흘러

    통폐합이 되었으니..인생사 참 뭐가

    잘된 건지 모르겠네요.

    LP 이야기 때문에 해묵은

    사연이 나왔군요.
    글이 길어 죄송합니다...^^


    박만식 선생님


    2017.09.08 05:41

    이장춘님 좋은 자료 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 추가 글 2017.9.10.

    오전2시10분경.   위자료 중에서 똑같은

    턴테불을 사용하던 생각 나서요. 다음

    글을 썼습니다. 혹 책이 돼도

     선처 바랍니다.

    .


    본 글을 보면서 1960년대 초부터

     안동 근무하면서 Lp 음반 사용하던 턴테불

    생각이 새로워지네요! 매일 낮 12시 본사 /지방

    뉴스가 끝나면 즐거운 한나절 음악 방송을 했는데

    턴테이불이 하나라 어느 때는 앞 노래와 다음 노래

     사이가 짧아 당시 아나운서와 (김해석님)말다툼 하던

    생각나서 옛날 어려운 시대 이야기 글을 간단이

     썼습니다. 김 해석님 보고 싶네요. 어디인가

    지금도 사시고 계시는지...?혹 이글 보시게

     되면 아래 댓글에 글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서림 (원로방송작가) 선생님



    이장춘 선생

     잘 보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여담이지만 나는 요즘 이따금

     옛날에 썻던 작품들을 찾아 읽곤합니다.

    < KBS 무대> 등 주로 라디오 드라마들이지요.

    읽으면서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스스로  

    "이런 때도 있었구나." 自讚도 합니다.

     아무튼 위로가 되지요  자료 열심히

    모아놓은 덕분 아니겠어요

    .

     이 선생도 앞으로  나이 더 드시면

    <춘하추동 방송>을 때때로 찾아보며 위로를

    받으시겠죠. 지금은 고생이 되시겠지만 후일을

    위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나는 압니다.  아무쪼록

     값어지 있는 실적 많히 쌓으십시오. 후일을

     위해.      건강하시구요.


     박서림.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이승만박사 VOA 7분20.wma

     


     

     

     

      

     


    ????? VOA 7?20.wma
    2.5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