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

최초의 라디오 보급과 생산, 노창성, 이운선, 조광운(광운대학교 설립자)

이장춘 2012. 12. 24. 23:21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방송전파를

내 보낸 것은 1924년 11월 29일의 일이다.

총독부 체신국에서 신문사 기자 등 몇 사람을 모아놓고

그때는 무선전화라고 불리는 방송이 어떻게 구현되는 지를

 보여주는 시험방송이었다. 이때 그 방송을 듣기위해 외국에서 

라디오 5대를 들여왔다. 그로부터 일반 청취자를 상대로 시험

방송이 실시되고 또 국내 요소요소를 돌아다니며 시험방송을

하고 방송국을 지어서 1927년 2월 16일을 기해서 정식으로

 방송을 내 보냈다. 그때 방송국에 등록된 수신기가

 1,440대였다. 물론 대다수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수신기였다.

 

 

최초의 라디오 보급과 생산공장, 노창성, 이운선, 조광운(광운대학교 설립자)

 

 

 

 

 

그 수신기를 누가 어떻게 생산 했을까.

외국에서 라디오를 들여오려면 최소한 쌀 20가마니 값

 100원은 주어야 해서 어지간히 돈많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 낼 때였다. 그래서 좋으나 낮으나 국산라디오를 만들어야 했다. 그

기술을 갖은 사람이 우리나라 방송국 창설자 노창성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한덕봉이라는 한국의 마르코니라고 불린 세계적인 무선기술자가

 방송국에 들어왔다. 한덕봉은 항해사로 일본에서도 없는 1급 무선기술자

였다. 이 두 사람에게는 방송국 설립도 중요했지만 라디오 보급이 

중요한 과제로 주어졌다. 방송국을 새워도 라디오가 보급

되지 않으면 소용없었고 더군다나 청취료를 받아서

방송국을 운영해야 되는 마당에 당장 방송국을 

운영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디오를 보급하기 위해서는 기술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라디오 제작 기술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기술을

배우기 위해 모여 들었다. 그가운데서도 특별히 눈에 띄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 이운선과 조광운, 조광운은 “광운상회”를 열고 석유로

불을 켜는 등잔, 남포등을 팔다가 전기가 들어오면서 전구상등으로 돈을

벌고 있던 특출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방송국에서는 이 두 사람을

 방송국 직원으로 채용하려고 했다. 이운선은 여기에 응했지만

조광운은 스스로 사업을 하고자 방송국 직원이 되는 것은

 사양했다. 방송국 직원으로는 자기가 큰 뜻을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899년 2월 17일에 태어나

일본 전기(電氣)학교를 졸업한 이운선은

 방송국 직원이 되어 일하다가 정식 방송이 시작 될 무렵

 방송국에서 나와 방송국 부근에 있던 광화문 네거리에 동양전기

상회를 열고 라디오를 만들어 방송국에 납품하면서 고장 난 라디오

수리를 하면서 사업이 번성했다. 그때는 일반가정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때라 귀에 해드폰을 대고 혼자 들을 수 있는 광석식 라디오를 만들어

팔았다. 그 값이 쌀 세가마니 정도여서 외국에서 들여온 라디오에 비해서는

값도 쌌다. 한국의 에디슨이라고 불렸던 조재호를  비롯해서 정학만, 

신상운 등 라디오 만드는 일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던

기술자들이 이 회사에서 일을 했다.

 

 

 

 

이운선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라디오를

생산한 업체로 기록되고 또 한국 최초로 건전지를

만드는 공장도 세웠다.(유병은 저 한국 야사) 방송국이

문을 열 무렵 DK라디오 상회가 생겨 종로 1가에서 주단 포목

상회를 운영하는 개성 인사들이 이 사업을 주로 했다. 1931년에는

 인사동에 구미양행이라는 라디오상회가 생기고 종로 4가에 조일

전기상회가 생겨 본격적으로 라디오를 생산하는 대열에 올랐다.

국산 라디오도 더 고급화 되어 국민라디오 1호에서 부터

6호까지 생산되었다. 라디오 수신기를 수집하는

장도형은 그 시대에 제작된 라디로를 

보유하고 있다.  

 

 

 

 

조광운(曺光云)은 어떠했는가? 1899년

3월 11일 강화, 화도에서 태어난 조광운은 오늘날의

 광운대학교의 설립자다. 광운상회, 광운전기상회 등을 하며

등잔, 남포, 전구와 건전지 등을 팔던 조광운이 방송국에는 들어가지

않았어도 라디오 시대가 온다는 시대적 변화를 읽고 라디오기술을 배웠다.

성실하고 손재주가 탁월한 조광운은 돈을 벌어 라디오를 만드는 인재를 기르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이운선과 같은 해에 태어나 방송국에서 운영하는 강습소

동기생이기도 했던 조광운은 이운선이 만든 라디오를 비롯해서 각종 수신기와

부속품을 판매하며 고장 난 수신기를 수리 해 주는 “방송국

지정 상담소”를 열어 사업이 번성했다.

 

 

 

 

조광운은 1934년 5월 20일 서울 역 앞

봉래동에  “조선무선강습소”를 열었고 1940년

 “조선무선공학원” “동국무선”이라는 이름을 거치면서

라디오 무선 전기 기술보급에 나섰으며 이 학원은 조선

무선중학교 시절을 거쳐 광운전자 전문대학 그리고 지금은

 서울 월계동, 공덕동에 마련된 15만평의 땅을 마탕으로 중학교,

고등학교, 광운대학교로 발돋움하면서 나라가 필요로 하는 수많은

 인재를 양성배출했다. 일제 강점기로부터 배출된 인재 가운데

조광운의 뜻을 이어받는 사람들이 많고 조광운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은 김연준은 한양공과대학을

세워 한양대학교 기초를 쌓았다.

 

 

오늘 글은 동국무선을 나온 노익중님,

광운 전문학교를 나온 정항구님의  말씀과

유병은 저 방송야사를 토대로 썼습니다.

 

박만식 선생님 글



이늙은가 50년대 중반경

서울 남대문 근처에 있던 동국무선

고등학교에 촌놈이 입학할때 조광운교장

선생님이였서요. 그 후 2년뒤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관련 글 보기

 

라디오 2,000대 시절의 생활과 방송

http://blog.daum.net/jc21th/17780718

 

장도형의 방송 역사 박물관

http://blog.daum.net/jc21th/17780084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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