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잘못 알았던것 몰랐던것을 많이 볼수가 있네요. 사실 저는 청실홍실을 혜은이, 하수영씨가 불렀는줄 알았는데, 안다성, 송민도 님이 부르셨군요. 안다성님은 예전에 가요무대에 가끔씩 나오셔서 잘 알고 있습니다.
방송역사에서 보는 사실-史實- (용어)의 오해와 진실
춘하추동방송 블로그에 자주 들리시는 분이 올려진 노래 청실홍실의 글의 댓글로 써 주신 말씀입 니다. 생각해보면 알게 모르게 방송가의 사실과 다른 얘기들이 종종 있습니다. 청실 홍실 얘기가 나왔으니 그 얘기부터 하겠습니다. 청실홍실은 라디오방송만 하던 시절 1956년 KBS 연출계장 조남사님이 6개월간의 미국 연수를 다녀와 새로운 풍의 드라마의 필요성을 느껴 쓴 작품으로 1956년 12월 2일부터 방송된 우리나라 최초의 멜로 드라마로 불려집니다.
아울러 말씀 드릴것은 조남사님과 조흔파님을 혼동하시거나 같은 분인 줄 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권위있는 잡지에서도 같은 분이라고 소개된것을 보았습니다. 조흔파님은 본명이 조봉순님으로 1945년 아나운서로 방송국에 들어 오셨다가 학교선생님도 하고 드라마도 쓰시고 4.19 후에 중앙방송국장도 하십니다. 전혀 다른분입니다. 조남사님은 1947년 성우로 들어와 KBS 연출계장을 하신 분으로 일생동안 드라마를 쓰시고 연출을 하셨던 한운사님과 더불어 이사(二史)라고도 불리셨던 분입니다.
흔히 혼동되는 말 가운데 중앙방송국을 일컬어 前 KBS라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젊은 현직 방송인들도 자주 혼동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 못된 말입니다. 어느분이 전화가 오셨습니다. "한강"책을 발간 하면서 노래 한강을 작사 작곡하신분의 소속을 쓰려는데 정확한 소속을 얘기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952년의 일이어서 그 분 소속이 부산 피난 시절의 KBS 중앙방송국이라고 말씀 드렸더니 KBS는 1973년 부터 썼기때문에 전 중앙방송국이라고 해야 맣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에게 자세한 말씀을 드렸더니 이해를 하셨습니다.
정동방송국의 KBS, 1940년대(위)의 사진과 1950년대(아래)의 사진입니다(다른 건물입니다). 「HLKA」가 되었던「HLKA」호출부호를 받기전 Seoul Station이 되었던 우리나라 대표 방송사(社) 전체를 어루르는 방송사의 명침은 변함없이 「Korean Broadcasting System」 이었고 그 약자는 KBS였습니다.
자동자에도 사옥에도 취재용 오토바이에도 가슴에 단 뺏지에도 모두 KBS 로고를 써 왔음은 더다시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KBS는 1945년 9월 9일부터 일관되게 써 왔던 우리나라 대표방송 국, 공영방송을 일컿는 영문자의 약자입니다. 다만 영문자의 내용 콜사인은 다소 달라진 경우가 있었습나다. 1973년 공사발족후에는 KBS 서울의 한국방송공사 본사와 각 지역방송국 또는 방송총국이 있습니다. 공사가 되기 전에는 서울에 서울 중앙방송국, 서울 국제방송국, 서울 TV방송국 등의 방송국 있을때도 있었고 또 중앙방송국이라고 부를때도 있었습니다. 지역에는 앞에 그 지역명칭을 붙혀, 00방송국아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방송국을 총괄하는 방송사 명은 1945년 9월 9일 이래 일관되게 KBS였습니다.
최초의 방송인이 누구냐를 놓고 혼동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엔지니어는 노창성님이고 시험방송 시절에 한덕봉이 들어와 별 이의가 없습니다. 기자는 1945년 8월 16일부터 문제안님이 활동했고 신경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하던 조동훈기자가 11월부터 합류해서 방송기자 1호는 문제안님이지만 잘 모르시는 분들이 종종 조동훈기자를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방송기자 1호라고 할 때는 문제안 기자가 맞습니다.
1950년대까지 프로듀서라는 말은 별로 사용되지 않았지만우리가 오늘의 기준에서 프로듀서라고 분류 한다면 경성방송국 시험방송때부터 방송을 한 최승일님을 프로듀서 1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승일님을 문서관리원이라고 한 분도 계시지만 그때 그렇게 발령이 났는지는 몰라도 최승일님은 일본유학을 한 문학가이고 평론가로 방송국에서 지금 말하는 프로듀서 범주의 일을 했고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를 길러낸 최승희의 큰 오빠이기도 합니다.
프로듀서를 일컬을때 노정팔님을 프로듀서 1호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방된후 최초로 선발한 아나운서 시험으로 들어와 아나운서는 해 본적이 없이 방송의 편성 제작에 임하셔서 프로듀서 1호라고 합니다. 해방된 뒤의 프로듀서 1호라고 하는 것이 맞을 줄 압니다. 최창봉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TV방송국 HLKZ가 발족할때 연출과장으로 선발되어 프로그램 제작을 하면서 책임자로 일 해서 TV방송 프로듀서 1호라면 최창봉님을 듭니다.
단파방송 연락운동의 주역 홍익범, 송남헌님의 소속이 경성방송국 편성과로 되어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방송공사나 방송협회가 공식작으로 발행한 한국방송사 나 60년사 70년사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일제가 단파방송 사건을 경성방송국 내부의 일로 축소하기 위해 재판기록등에 그렇게 기록을 했기 때문이고 실제로는 홍익범은 전 동아일보 기자였고 송남헌은 당시의 국민하교 선생님을 하다가 아동문학을 하신 분입니다. 방송국 소속이 아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생긴 지역방송국의 경우 개국일이 잘 봇된 경우가 있습니다. 뒤에 바로 잡아진 곳도 있지만 지금가지도 그렇게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방송전피를 내보낸 날을 기준으로 개국일을 삼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방송국 허가일자와 방송실시 일이 다르고 또 일제 강점기에는 방송국이 발족하기 전에 라디오를 보급하고 청취료를 받는 출장소가 설립되어 그 출장소 설립일자를 방송국 개국일로 삼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바로 잡기도 어렵지만 확인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노래의 작사자 작곡가 가수이름이 잘 못된 경우도 종종 봅니다. 동명이인도 있었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예명을 많이 쓰던때라 그런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강의 작사 작곡가 최병호(崔炳虎)님과 가수 최병호崔丙浩님,도 다른 분입니다. 또 한강 작사, 작곡자가 다른분으로 알려진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그때 최병호님이 무명인이라 레코드를 제작할 때 판매를 위해 유명인의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해방공간의 히트곡 고향초를 부른 가수가 송민숙으로 레코드가 제작된적이 있습니다. 송민도는 어떤 경우에도 송민도라는 이름을 달리 쓸수 없었는데 송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레코드 제작과정에서 송민숙으로 둔갑 했습니다. 지금도 그 노래를 송민숙이라고 하는분이 있지만 세상에 고향초를 부른 송민숙은 없습니다.
1967년 패티 킴이부른 사랑의 계절이라고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노래의 작사자가 강현정으로 되어 있지만 강현정은 세상에 없습니다. 방송국 인기 아나운서이고 문학박사이기도 한 전영우님이 작사한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에명을 사용하는 경우도 일반화 되어 자연스럽게 쓰이는 경우도 많지만 달리 사용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 없는 사람의 노래는 주인을 찾아 그 주인의 이름으로 썼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특히 인터넷 등에서 글을 쉽게 쓰다보니 이런 경우가 많은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더 쓰도록 하겠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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