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일제의 고문 실상 단파방송사건, 성기석, 송남헌의 증언

이장춘 2012. 9. 1. 19:13

 

 

 

일제 강점기 말 조선 어학회 사간과 더불어

경성방송국 단파방송 사건이라고 하는 큰 일이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단파방송사건이라거나 밀청사건이라고 했지만

용어는 일본이 한국인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용어이기도 해서

됫날 항일 단파방송이라고 부릅니다. 이 일로 경찰에 끌려간

사람이 350여명이라고 했고 80명 가까운 분이 형을

받았습니다. 여섯분이 옥사를 했습니다.

 

 

 

 

지금처럼 형이 확정되기전의 유치기간을 

형기에 포함 해 주는것도 아니고, 모든심문이나 재판이

 비공개로 이루어져 변호사는 물론 가족마저도 참석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민족지 언론매체도 다 폐쇄되었을 때, 언론기관에 보도가

된적도 없읍니다. 모든것이 비밀리에 자기들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형기에 삽입되지 않는 유치장의 유치기간이 6개월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1년가까이 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유치장에서 오랜기간 혹독한 고문이 자행

되었습니다. 억지로 죄목을 만들고 죄없는 사람까지도

이름을 대게해서 잡아들이고 또 이런사람들을 옥중에 오래

있게해서 활동을 못하게 하느 한편 이런 일을 하면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공포감을 심어주는 등 여러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2005년에

건국포장을 받으신 항일 단파방송 애국지사 박용신 선생님이 2007년

3.1절 특집에서 나와 얘기 하기를 유치장에 비하면 감옥은 호텔

이라고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차례씩 고문을 바으면서

 1년 2개월을 유치장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한가지 사건으로 오죽하면 6분이나

옥중에서 죽어 나갔겠습니다.  옥중에서 죽어

 나가신 분들로 부터는 얘기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 나오신 분 가운데서 그때의

 실상을 글로 또는 애기로 남기셔서 어렴풋이나마

그때의 고문 실상을 짐작 할 수가 있어서

그 글중에서 성기석님과 송남헌님

글을 골랐습니다.

 

 

항일 단파방송사건의 고문 실상 성기석, 송남헌님의 증언

 

 

단파수신기를 손수 제작 할 수 있었던

성기석님은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이 있던 시절

1941년부터 중경에서 오는 방송을 들었고 1942년, 미국

VOA방송을 들었습니다. 그때 들은 방송 내용이 비밀리에

 전해지면서 국민들에게 희망과 항일 저항의식을 불러 일으

 독립운동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래 글은 1988년

6월 3일 「딘피빙송 해외연락사건」 방송토론회

에서 발표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성기석 선생님의 증언

 

 

 

 

...............전략...............

1942년 11월경 미국방송은 솔로몬 삼차전에서

동남아 각지에 있는 일본군은 보급품이 끊겨 완전히

고립되었다고 승전 ! 승전의 환호성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서울서 다시 개성으로 가서 그해 12월 중순경 어느 날인데 경기도

 경찰부에서 방송소를 온통 수색하고 이이덕씨를포승으로 묶어 잡아

갔다는 것입니다. 섬뜻한 느낌 속에서 저도 다음날 아침에 사이가라는

 악질작인 일본경찰에 잡혀 갔습니다. 사이가는 고문은 말 할 수 없이

 극에 달했으며 단파수신기를 내 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이가는 해외 우리 독립투사 다시 말해

중국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와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박사와 단파로 송. 수신을 했으니 송수신기를 내라는 것이었

습니다. 수신기도 감추었다가 그들에게 발각되어 그들에게 조사를

 받았는데 나중에 그들이 송신기는 아니라는게 확인되어 10개월간 모진

고문을 받았고 이이덕씨는 이이덕씨대로 모진 고문 끝에 사경을 헤매게 되고

홍익범씨도 마찬가지여서 명분은 병보석이라는 미명하에 석방되었습니다만

 그로 인해서 다행히 해방조국을 보기는 하였으나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애석하기 이를 데 없는 일입니다.

 

유치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성에선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서울로 압송되어

경기도 경찰부로 넘어왔습니다. 넘어와 보니 박용신 아나운서도

이미 들어와 있고 방송국 사람들이 여러분 들어와 있어 유치장은

초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치장 안은 오전 중에 참으로 조용했으며

오후 4시가 지나면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가 하면 그때부터 불려나가

고문을 당하게되서 몹시 분주 했습니다. 말하자면 오후 4시까지 무고한

우리 동포들을 마구잡이 드리기에 바빴고 오후 4시부터는 이사람

저사람 닥치는 대로 불러내 고문을 했던 것입니다.

 

낮에는 잡아넣기가 바빴고 밤에는

사람을 패기가 바빴던 것입니다. 조서라는 것을

써 본 일이 없는데 일방적으로 두툼하게 누가 썼는지

알지도 못하는 조서라는 것을 내밀고 도장을 찍으라는

것입니다. 찍으라는 것이 아니라 손을 강제로

잡아당겨 지장을 찍개 했던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을 맺으려고

합니다만 오늘날까지 산 면목이 없습니다. 그 당시

일제의 악독한 발톱에 짓눌려 옥사 하신 분들과 석방은

 되었지만 조국의 독립을 보지못하고 그들이 남긴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돌아가신 분을 생각하면 오늘 이렇게

 나와 말씀을 드리는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송남헌선생님의 증언

 

 

 

 

학교선생으로 재직하셨던 송남헌선생님은

아동문학가가 되어 신문사와 경성방송국에서 아동

문학작품을 썼던 분입니다. 이 인연으로 방송국에서 청취한

 해외소식을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하다가 발각되이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습니다. 해방전에 풀려나 광산일을 하면서 피신했습니다.

해방후 김규식 입법의원 의장 비서실장을 하는 등 폭넓은활동을 하다가

 2001년 1월 20일 세상을 뜨셨습니다. 1965년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이인 선생님의 수필논평 애산여적에서 인용한 글과

 2000년에 발행된 송남헌회고록의 일부를 옮깁니다. 

 

 

 송남헌선생님 회고록에서

 

 

사찰과 형사에게 잡히면 누구나를

불문하고 가진 고문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비행기고문과 물고문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비행기 고문이란 한 밤중에 불러내다가 양팔을 뒤로 묶어서

포승줄로 천정에 매달아 몸을 공중에 띄워 놓는 것으로 몸이 공중

으로 들리는 순간 소스라치게 까무러쳐 정신을 잃고 만다.   얼굴이

시퍼렇게 되어 초죽음이 되면 끌어다가 던지다시피 유치장안에 쳐 넣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면 다시 끌어내 물고문을 했다.   기진맥진한 사람을

 책상위에 뉘어놓고 수건을 물에 축여 얼굴을 덥고 양동이의 물을 코에 집어

넣었다. 폭포수처럼 내려오는 물이 코로 들어가면 뒷골 깨지는 것처럼 아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만다. 이 정도면 차라리 죽는 게 났다는

생각이 수십 번 씩들어 저들이 원하는 데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해보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동지를 배신하거나

전향하는 일도 비일 비재 했다.

 

 

이  인 선생님 애산여적에서

 

 

 

 

고문.....그래도 나는 약과였다고

당시를 말하는 송남헌씨

  

「경성방송국 단파사건」에 연좌했든

한 사람으로 반백의 머리가 된 송남헌씨는

딩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한밤중이면 꼭 불려나가 그 지긋 지긋한

물고문이며 비행기 타기 등의 악형을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다. 그러나

나 보다도 더 혹독한 고문으로 산송장이 되어 업혀서 감방으로

오곤하던 선배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나는 약과였다고나 할까....

그 중에서도 끝내 자기 이외의 일에는 입을 열지 않은채 순사를 하고만

홍익범씨를 생각하면 살아남아 이렇다 할 일도 못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

기만 하다. 또한 경성, 청주, 대전 형무소 등을 전전하면서 추위와 주림에

신음하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모습이며, 형기를 마쳤음에도 출옥을

못하고 소위 사상범 보호 구금령에 묶여 그대로 감옥살이를

하고있던 선배, 동지들을 생각 할 때

눈시울이 뜨거워 진다.

 

지금 생각하면 방송국에 근무했던

우리 기술인들은 실로 애국자였다고 여겨진다.

평소에 이렇다 할 민족적 교양을 받을 기회도 없었고 또한

뜻있는 사람과의 접촉도 아니 했는데 있을지도 모를 무서운 일을

예기하면서도 그렇게 열심히 매일같이 「라디오」를 청취해서는 전해주곤

했다는것이 그리 쉬운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었지만 꼭 정기적으로

있는 방송을 제때에 듣기 위해서 일인들을 속이는 修理명목의 연극도 꾸몄으며

숙직도 아닌데 열성을 부리는 척 밤에 남기도 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때의

뜻 있는 분들이 지금은 거의 유명을 달리하는 고인이 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도 외국에, 혹은 북에, 혹은 행방조차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그때의 동지였던 민족진영 인사들을 등지고

 공산주의 자들과 합작 해 버린 허 모의 경우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없다. 하루빨리 모두가 태극기 아래 옛날의 동지애로

되 돌아가서 보다 나은 조국을 건설하는데 함심 했으면 하는 염원은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그리고 한마디로 경성방송국 단파사건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지방방송국에도 단파수신기가 있었고 혹은 비밀히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던 터라 이 밖에도 단파사건

으로 해서 희생된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닌줄 안다.

마지막으로 고인이 된 선배, 동지의 명복을

충심으로 빌어마지 않는다.

 

 

 가신님들의 명복을 빕니다.

 

 

왼쪽에서부터 송남헌, 유병은, 조종국, 성용현, 이준순, 신상운, 이인영님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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