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TV방송 창설자 오재경,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 문제안

이장춘 2012. 8. 5. 01:57

 

 

 

 2012년 6월! 방송계의 큰 별

두 분이 가셨다. 한분은 남산 방송 촌을

형성했고 오늘날의 KBS TV을 있게 하는 등

국영방송시절 방송발전의 최대 공로자라고 평가되는

오재경 선생님(6월 27일)이고 또 한분은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로, 아나운서, 프로듀서, 방송연사로 큰 발자국을

남긴 문제안(6월 17일) 선생님이시다. 두분의

 삼가 명복을 빌며 이 글을 쓴다.

 

 

TV방송 창설자 오재경,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 문제안

 

 

오재경 선생님은 1956년 7월부터

 1959년 1월 30일까지 공보실장, 61년 7월 7일부터

6월 17일까지 공보부장관으로 방송의 최고 책임자였다.

6,25로 상처받은 방송국이 아직 정동 임시 연주소에 머물고 있을

때다. 작은 공개방송도 제대로 할 수 있는 시설이 없어서 동화백화점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명동의 가톨릭 문화 회관, 민간극장 등 남의 집을

전전하던 때다. 새로운 방송국을 짓기 위해 손수 나서서 예산을 확보하고 남산의

 적지를 찾았다. 미국 연수중이던 기술책임자 한기선에게 새로운 시설을 할 수 있는

기술을 익혀 오도록 해서 6개월간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자 1957년 공사는

시작되어 그때로서는 가장 최신 건물이라던 남산연주소가 12월에

완공되었다. 이로부터 20년간 남산방송시대가 열렸고 남산은

방송의 상징으로 서울 구경 온 사람들은 남산연주소를

 들려 관광명소로도 한몫했다.

  



 

 

 

  

남산 연주소가 완공 될 때까지 어려움을

잠시라도 해결하기위해 대한공론사 (현 프레스센터)

3층에 스튜디오를 만들어 그해 7월 23일부터 공개방송 등에

활용되었다. 방송을 체계적으로 연구 발전시키기 위해 한국일보에서

방송 비평 글을 쓰던 한운사, 정순일등을 영입, 방송문화 연구실을 만들었다.

각종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방송 프로그램을 분석 연구해서 개선방안을

 찾았으며 「방송」지 등 방송관련 간행물을 발행했다. 정기

방송 간행물이 나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방송인들의 의욕고취를 위해 1958년

 방송 문화상을 신설했다. 이를 바탕으로 1959년부터

새로운 제도로 바뀌어 오늘날 방송대상, 연기대상 등 각종

방송시상제도는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국민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자 KBS 교향악단을 창단해서(56년 9월 1일) 오늘날 KBS

교향악단의 시초가 되었고 10명으로 구성된 전속 가수 단을

 결성해서 좋은 노래 보급에 힘썼으며 그로부터 해마다

전속가수를 공모해서 가수를 양성했다.

 

 

 

 

제대로 된 레코드회사가 없던 시절

공보실에서 레코드를 제작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어 음반을 제작보급 하기도 해서 각 방송국에서는

그 음반을 활용, 음악방송이 활성화 되었다.

 

암흑세계가 된 일제강점기 말 방송인들이

 해외 단파방송을 듣고 그 소식을 독립운동가 등 세상

사람들에게 알린 혐의로 350여명의 인사가 경찰에 끌려가

고통을 받고 70여명이 형선고를 받으면서 6명의 옥사 자를 낸

그 방송의 원류, 1942년 미국의 소리방송에서의 이승만 박사

육성을 음반으로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건국 10주년을 맞으면서 국민의 심금을

울려줄 수 있는 역사적인 특집방송을 기획 방송했다.

 KBS교향악단과 서울 시립 교향악단의 협연으로 이루어진

 나운영작곡 「한국전쟁」은 공보실에서 기획되어 나운영에게

 작곡 위촉된 것으로 이 곡이 특집으로 방송되면서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고 그 곡은 나운영 교향곡 1번 한국전쟁은

 불후의 명곡으로 전해진다.

 

그때 공모되어 10회에 걸쳐 특집으로

방송 돤 박서림작 드라마 「장마루촌 이발사」도

불후의 명작으로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공보실장 시절 유일의 텔레비전방송국이던 민영 HLKZ가 어려운 상황에

접어들면서 KBS TV방송 설치 계획을 마련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5.16직후 7월 7일 다시 공보부장관에 부임하면서 제일먼저 문서

창고에 넣어 두었던 TV방송 실시 계획안을 꺼냈다.

 

 

 

 

때마침 뜻하지 않은 돈 20만달라가

대한민국정부에 들어왔고 그 돈이면 TV방송국을

세울만한 액수였다. 그것을 안 오재경장관은 그 돈을 관리하고 있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TV방송 실현 구상을 제시했다. TV방송국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 돈이면 연말까지 TV방송국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돈을 TV방송국

설립에 쓰기로 결정된 그해 8월부터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고 부지를 마련해서 방송실시

예정일 2개월여를 앞둔 10월에 연주소를 착공하면서 미국에 기계를 발주했다. 그러면서

 HLKZ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방송요원을 확보하고 새로운 인원을 선발하기도

했다. 12월 24일 성탄이브를 기해서 방송을 내 보낼 예정이었지만 1주일이 늦어져

12월 31일 그해의 마지막 날 개국 식을 갖고 첫 방송을 내 모냈다. 이것이

오늘날 KBS TV의 시초다. 취임 5개월 여 만에 사전에 편성된 예산도

 없이 TV방송국을 만들어 낸 역사적인 일이다. 지금 같으면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선생님은 두 차례의 재직기간동안

스스로 계획하고 직원들과 함께 현장에서 얘기를

 나누며 실천했다. 따르는 직원들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보람이

있었고 의욕에 차 있었다. 선생님 빈소에서 만난 70-80대의

노 방송인들은 50여 년이 지난 그때의 추억을 되살리며

마지막 가시는 길에 애도를 표하며 명복을 빌었다.

 

 

 

 

문제안 선생님은 1943년에 아나운서로

방송국에 들어오셨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에서

전해오는 뉴스나 통신 등을 번역해서 방송하고 기상통보나

공지사항을 전하면 되던 때라 방송기자는 따로 없었지만 해방이 되고

보니 사정이 달라져 그때부터 발로 뛰는 기자가 있어야 했기에 8월 16일부터

기사취재차 현장을 누볐다. 이것이 방송기자 1호의 탄생하고 해방공간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되었다. 그해 11월 만주 신경(지금의 장춘)에서 돌아온 조동훈기자가

합류 할 때 까지 KBS기자는 한사람이었다. 미군정 취재방침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1946년 방송기자 1년 만에 방송국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던 문제안 기자가

다시 방송국에 돌아온 것은 문 기자를 파면으로 내 몰았던 미군 고문관이

방송국을 떠난 1947년 이었고 이때는 기자가 아닌 편성원으로 들어왔다.

 

 

 

 

스무고개, 라디오3면경 프로그편성에 선생님의

뜻이 반영되면서 그 프로그램을 담당하게 되었다. 본인의

뜻에 맞지 않으면 직에 연연치 않는 성격을 지녔기에 1948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방송국이 국유화 되면서 처음 부임한 방송국장과 뜻이

맞지 않아 1949년 또 KBS문을 나섰다. 이로부터 KBS직원 신분이 아닌

연사로서 오랜 세월 방송과 인연을 맺어왔다. 스무고개가 없어질 때

까지 그 프로그램의 고정패널이었고 1960년대 70년대

인기 프로그램 재치문답의 고정 출연자였다.

 

그 시절 세계 일주여행을 한 몇 분 중의

한분이기도 해서 TV의 세계여행 프로그램 등에 출연,

각 나라의 풍물을 소개하기도 했다. 1983년 11월호 월간 방송지에

「이 생명 다하도록 잊지 못할 내 방송국」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 있다.

「남의 어느 누구의 방송국도 아닌, 바로 “내 방송국이다” 영원히……. 영원히.......

그야말로 이 목숨 다 할 때까지 “내 방송국”인 것이다. 왜? 방송국은 내 잔뼈가 굵은

 곳이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하셨다. 선생님은 그토록 방송국을 길이 사랑하면서

잊지 못하셨다. 90이 넘어서까지 옛 얘기를 생생히 기억하시며 들려주시는가

하면 컴퓨터 키보드를 자유롭게 두들겨 글을 쓰시면서 또 이메일을 주고

 받으셨다. 늘 건강하시던 선생님이 2012년 들어 메일을 더 이상

보실 수 없다고 하시더니 끝내 저 세상으로 가셨다.

 

필자는 오재경, 문제안 두 선생님과

오랜 세월 가까이 계셨던 한영섭 방우회 회장님,

50년대 음악PD 김명희여사님을 모시고 두분의 빈소를

찾아 마지막 떠나시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담아

인터넷에 올리면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두분에 관한 얘기는

아래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셔서 더 보실 수

있습니다.

 

 

오재경 선생님

 

 

KBS TV 창설자 오재경 전 공보부장관 별세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http://blog.daum.net/jc21th/17781311

 

취임 5개월 여만에 TV방송을 내보낸 오재경장관

http://blog.daum.net/jc21th/14945591

 

TV방송을 처음 시작하던 그때 그 얘기 ( 1 )

http://blog.daum.net/jc21th/17780061

 

KBS TV 개국 (1961년 12월 31일)을 위해 힘쓴 사람들

http://blog.daum.net/jc21th/17780988

 

 

CBS 기독교방송과 오재경 전 공보부장관

http://blog.daum.net/jc21th/17780427

 

 

 

문제안 선생님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 문제안 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http://blog.daum.net/jc21th/17781300

 

방송기자 1호 문제안/최초의 방송기자

http://blog.daum.net/jc21th/17780077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 방송원로 문제안 / 문시형님 글

http://blog.daum.net/jc21th/17780763

 

대한민국의 첫 방송기자가 턴생한던 날 1945년 8월 16일

http://blog.daum.net/jc21th/17780906

 

이 생명 다하도록 잊지 못할 내 방송국

http://blog.daum.net/jc21th/17613463

 

 

오재경 선생님 빈소 동영상

 

 

 

 

문제안선생님 빈소 동영상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아리랑 김연아.mp3

 


??? ???.mp3
2.1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