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시인 노천명, 방송인 노천명

이장춘 2012. 7. 26. 10:42

 

 

 

 

시인 노천명! 노천명의 시와 방송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시인 모윤숙과

더불어 1930년대부터 시단에서 활동했던 노천명은

방송에서도 그때부터 그 모습이 보였습니다. 모윤숙이 1940년

경성방송국 편성원이 되어 본격적인 방송할동을 했다면 노천명은

 6.25로 부산에 피난간 부산방송국에서 방송생활을 했습니다. 6.25때

 피난을가지 못한 노천명님이 서울에 남아 있다가 공산당의 문학가 동맹에

 나가야 했고 이 일로 구속되어 20년형의 선고를 받아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습니다. 동료들의 청원과 목숨 다 할 때까지 대한민국과 함께 한다는

 자신의 다짐으로 풀려나 피난시절의 KBS 임시 중앙방송국에서 

KBS인과 같이 생활했습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흰 저고리

남색치마, 미혼 여류시인 노천명님은 부산 피난시절

KBS인들의 친구이고 누나였습니다. 

 

 시인 노천명 방송인 노천명   

 

 

 

 
1912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 진명 여자 보통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 여자 전문하교에
 다니던 1932년 밤의 찬미 등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시단에 혜성같이 나타나
 일생동안 시를 썼습니다.
 
님의 시인으로서 활동영역이 워낙 넓고 깊어
다른 일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방송인으로, 신문기자로도
 님의 활동영역은 넓었습니다.  노천명님이 방송에 인연을 처음 갖게
 된 것은 1935년 모윤숙, 이헌구님 등과 같이 체흡의 앵화원 ( 櫻花園)
이라는 방송극에  출연해서 3회에 걸쳐 방송되고 호평을 받는 이래
 방송에 자주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방송에 출연하던 사람들이
 구성한 극예술 연구회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다 하실 때가지 방송과 인연이 깊었습니다. 
 

 

 

 

노천명님이 신문기자로 활동한 것은
1934년 우리나이 23살로 민족지 중앙일보에서
일 하면서 부터로 이 신문이 손기정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정간되고,   뒤에 폐간되면서 조선일보로 또
매일신보로 옮겼습니다.  해방된 후에도 방송국에서
주간 여성 뉴스를 담당하는 등 여러 모로 방송에
참여했고 서울신문의 기자나 잡지사와도 
인연이 깊었습니다.
 
님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 이면에는 고독과 괴로움이
흘렀습니다.   약혼까지 한 김광진이 당대의
일류가수이고 고향이 같았던 왕수복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그녀와   결혼까지 하게 이르매 마음 둘 곳
몰라 맥맥이 흐르는 시속에 그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   '평양기생 왕수복' 을 쓰신 시현규 선생님께서
 이 글 댓글을 통해 '노천명은 왕수복 때문에 김광진과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김광진과 본처와의 이혼이 지연되면서 김광진과
 헤어진 것입니다.      헤어진 뒤 김광진이 왕수복과 혼인
했다는 얘기를 들었고, 충격 때문에 6.25 전쟁때
부역을 했습니다.' 라고 써 놓으셨기에 
이곳에 옮겼습니다.  
 

 

 

 

북으로 간 김광진은 김일성의 경제이론을
밑받침하면서 그와 왕수복님은 일생을 통해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지만 노천명님은 외롭고 쓸쓸한 가운데 6.25의
 비극 속에서 부역의 죄를 저지르고 20년의 장기 복역수가
되어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문학인들을 비롯한 동료들의
열화같은 바람으로 감옥살이 6개월 만에 풀려나
 부산 피난시절의 KBS와 함께 했습니다.
 

 

 

 

전쟁기간중 님이 쓰신 애국 시와 가정메모가
전파를 타고,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 방송되면서 어렵고
힘든 국민들과 국군에게 삶의 즐거움을 주고, 웃음을 주고
용기를 주면서  사기를 불러 넣었습니다. 방송국의
분위기를 밝게 하고  직원들의 친구이고 
누나같이 살았습니다.
 

 

 

 
이성실님이 순직했을 때
누구보다도 슬픔에 잠겼고 묘 앞에
묘비를 세울때는 비문을 스스로  썼습니다.
"마지막 1초까지 나라위해 바친 순직청년
이성실이 여기 누었다."
 

 

 

 

비운의 여류시인은 인간적인 고뇌와
  쉴 사이 없이 밀어닥치는 일로 결국 뇌출혈을 일으켜 
 1957년 12월 10일 45년간의 짧은 삶을 마쳤습니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좋은 사람과 살고 싶다던 님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시들은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 그리움을 간직한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저 지금도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겨 주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얘기는  노정팔 선생님의 글을 옮깁니다.
 

 

 
 
(해방후의 정동시대 방송얘기 중에서)
 
매주 토요일에 방송한 주간 여성 뉴스인 "이주일에
일어난일은 노천명, 정충랑 같은 분들이 맡아
 오랫동안 진행했다.
 
노천명씨는 이화여전 재학시절에 이미 시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이름이 알려진 여류시인이지만 신문,
잡지기자로도 활약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와 여러 여성잡지에서
 취재, 편집 등을 담당해 뉴스감각이 뛰어났다. 그러므로 한 주일의
 여성뉴스를 종합하는 이런 방송에는 아주 적격이었다. 더구나
시를 다루듯 세심하고 열심히 주간 뉴스를 모아
주부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 후 방송과는 잠시 뜸 하다가 6.25동란 중
부산 피난지에서 다시 방송과 인연을 맺고 “가정메모”를
전담하여 집필했다. 그녀는 말쑥한 한복으로 단장하고 나와
글을 쓰면서 방송국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환도 후에도 방송국과 더불어 서울에 올라와
“가정시간을 도왔으나 현실에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매우 외롭게 지내다가 몸까지 말을 듣지 않아
1957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노정팔선생님 글에서 옮겼습니다.
 

 

 
 

 

“이름 엾는 여인이 되어”와

감옥에서 쓰신 시 누가 알아주는

투사냐? 를 올리며 글을 마칩니다.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올려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은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가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는 마을

놋양룬의 수수엇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누가 알아주는 투사냐  

 

자신없는 훈장이 내게 채워졌다

어울리지 않는 표창이다

五等 콩밥과 눈물을 함께 씹어 넘기며

밤이면 다리 팔 떼어놓구 싶게

좁은 잠자리에 줄이 틀리우고

날이 밝으면 날이 날마다 걸어보는 소망

이런 하루하루가 내 피를 족족 말리운다

이런 것 다 보람 있어야 할 투사라면

차라리 얼마나 값 있으랴만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고초를 받는 것이냐

누가 알아주는 투사냐

 

붉은 군대의 총부리를 받아

대한민국의 총부리를 받아

새빨가니 뒤집어쓰고

감옥에까지 들어왔다

어처구니없어라 이는 꿈일 게다

진정 꿈일 게다

 

밤새 전선줄이 잉잉대고 울면

감방안에서 나도 운다

땟국 젖은 겹옷에서 두고 온 집 냄새를

웅켜 마시며 마시며

어제도 꿈엔 집엘 가보았다

 

 

유경횐(유카리나)여사님 글

 

 

시절을 잘 못 태어나서였을까?

사랑을 잃어서일까? 비운의 생을 살다

 가신 분이군요. 제가 아는 거라고는 이분의 시

 '이름없는 여인되어'   딱 한편이였는데,

많은 것 배우고, 느끼고 갑니다

 

 

 앞줄 가운데 송영호 방송과장을 비롯해서 오른쪽의 노천명, 강찬선, 

그리고  강익수, 이상송, 뒷편의 강익수 아나운서와  이상만, 안병원, 공승규,  방필주, 

조규택, 안병원, 조백봉님등 그시절의 방송인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가을 낙엽 피아노.mp3

 

 

가을 낙엽 피아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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