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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방송사 (일제 강점기부터 1958년) - 이서구선생님 회고록

이장춘 2012. 4. 7. 00:57

 

 

 

오랜세월 방송 드라마를 쓰셨고

홍도야 우지마라, 장희빈 등 노래와 더불어

친근하게 다가온 이서구선생님은 1899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일제감점기 1920년 동아일보 창립시 신문기자로 출발해서

동경 특파원시절 일본니혼대학교 예술학과에  다니셨고 1922년 신극 연구단체

토월회 조직에 참여하기도 하셨습니다. 많은 소설과 희곡을 써 그 시절을 대표하는

동광, 별건곤이나 삼천리 또는 신문 등에 실려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방송국에도 근무하셨던 선생님은 1938년 방송국에서는 어떠한 일을 하는가,  방송이

어떻게 하야 여러분의 귀에까지 가는가. 등의 글을 남겨 그때의 방송을 이해 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글은 일제 강점기 선생님이 방송국에 근무하던 때로부터 1958년 이 글을

쓰실때까지의 방송국 분위기를 써서 1958년 8월호 방송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그 시절의

방송을 이해 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실 줄 압니다, 지금 듣고 계시는 노래는

1960년 선생님이 써서 KBS에서 방송한 연속 사극 드라마 

장희빈의 주제곡으로 활금심이 불렀습니다.

 

 

내가 겪은 방송사 - 이서구선생님 회고록

 

 

 

 

내가 방송국을 사퇴한 것은 해방되기 전해의

일이다. 전후 4년 동안 소위 제이방송(우리말 방송)편성에서

 주로 연예푸로의 편성을 담당하고 있다가 전쟁에 패해가는 일인들의

마지막 발악에 견딜 재주가 없어 뛰어 나온 것이다. 방송국에서 나와

가지고 곧바로 경인선 소사 안마을로 소개를 갔다. 머지 않은 곳에

양식을 얻을 수 있는 편의를 노린 것이다.

 

내가 방송을 그만둘 당시 방송국에는

 수많은 문화인이 있었고 그들은 방송국을 “피난처”라고

 불렀다. 이름난 문화인으로 하는 일없이 거리를 쏘다니면 징용

아니면 감옥에 가는 판인데 방송국에 이름만 걸어 놓으면 신변의

위험은 면제되는 까닭이다. 더욱이 다시에 방송부장으로 있던 노창성씨

 문화인을 불러들이는데 열의가 있었다. 노창성씨에게 우리말 방송을 때서

 담당케 해 놓고 나서 일인들은 언제나 감시의 눈을 감지 않았다. 노창성씨가

 지나친 친일행동을 한 것은- 그 당시에는 매스껍게 여겼으나 지금 생각

하니 그만큼이나 일인들의 신임을 받았기에 문화인들이 그

그늘에서 편히 지낼 수가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의 제이방송으로 말하면 제일방송에 비하여

둘째 자리요. 의붓아들 격이었다. 제일방송에서는 방송국

주인 노릇을 했고 제이방송은 곁방살이겪이요, 눈치꾸러기였다.

기술부의 견습기사까지 제이방송에서 하는 날이면 코웃음치고

생트집 잡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아무리 주인노릇을 해도

 일인방송은 거의전부를 동경방송을 중계하고 있었고

제이방송은 아무리 천대를 받아도 전부를

 직접 편성하는 판이다.

 

방송극이니, 창조 극이니, 아악이니

 참으로 분명한 날을 보냈다. 노창성씨는 문화인을

불러들이는데 열의가 있어서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호화스러운 진용이 갖추어 졌던가 싶다.

 

이정섭 ( 불란서 유학한분 신문 논평가)

이관구 (현재 경향신문 주필)

모윤숙(여류시인)

노천명(여류시인)

김진섭(서울대학교, 수필가)

방인근(소설가) 김억(시인)

이혜구(현 음악대 교수)

 

아나운서만 하다라도 이계원, 송진근,

이현, 민재호 등 일기당천의 명인들이 있었다. 지금

 이계원씨와 민재호씨는 미국의 소리 방송국에 근무 중이며

송진근이는 해방 후 공산주의자에게 유인되어 조국을 배반하고 이북에

갔다. 이 현 씨는 부업을 계승하여 실업계로 진출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예푸로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방송극이었는데 방송극 작가가 많지 못했고

 초기에는 원고, 연출, 출연답례 10원이었고 성우의 출연 때 거마비 조로

일원짜리 전차표를 한권(10매)씩 주기도 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복혜숙씨가 중심이 돼서 방송극은 나갔었고 극작가로는 박진,

김영수, 이익씨가 건필을 위지 않았고 김내성,

방인근씨도 가끔 역작을 내 놓았다.

 

 제이방송이 처음에는 방송부 제이방송과로

-일인부장아래 예속되어 윤백남, 김정진, 심우섭 삼대

과장을 거쳐서 노창성대에 이르러 제이방송과가 제이방송부로 

승격되고 제일대 부장으로 노창성씨가 취임함으로서 우리방송은 형식적이나

독립을 한 샘이고 방송과장에는 이정섭씨가 않게 되고 편성과장에는 이혜구씨가

앉아서-새로 들어선 진용이 활동을 개시하기는 했으나 일인의 지령과 감시는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제이방송부가 되면 원고료(30분)는

7원이 되고 출연료는 2원이 되고 연출비는 나오지 않았다.

 

그때는 10원이면 요사이 만원보다 훨씬 쓸모가

있었다. 일인들이 아무리 잘난 체해도 연예푸로는 일본

동경방송을 중계하였고 우리는 당당히 직접방송을 하는 터이라

놈들이 공연히 샘을 내고 생트집을 잡는 데는 어지간히 속도 태웠다.

그러는 중에 해방도 머지않았을 때 기술부에서 미국의 소리 방송을 미리

듣다가 발각이 나서 방송국에 다니는 우리 직원들에게 일대 검거선풍이

일어나고 여러 사람의 희생자가 났다. 필자도 경기도 경찰국에 여러 차례

불려가서 “사이카”라고 하는 악독하기 사자 같은 경부 놈에게 문초를

받았다가 징역은 면하였고 젊은 혈기에 미국의 소리를 애써

들어가며 조국 해방을 조바심쳐서 고대하던 여러 동지는

기어코 감옥까지 가는 비극을 겪고 말았다.

 

나는 이 비극이 가라 앉을 무렵 방송국을

떠나왔다. 숨 막힐 듯 한 압박감에 견디지 못했다.

해방이 되고나서 소개 처에서 서울에 오며- 나는 그때 좌익 놈들의

 소위 “연극동맹”에 대항하여 “한국 무대 예술원”을 조직 하느라고 한창 바빴다.

유치진 동지와 당시 군정청 문화부에 드나들며 허물어진 우익진영의 연극운동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당시 방송국은 미국에 접수되어 방송협회장에는

 이정섭씨가 되고 방송국장에는 이혜구씨가 돼서 이해없는 미군의 통제밑에서 많은

고생을 하는 줄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군정장관 “하-지”라는 장군은 좌익도

 포섭하려는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어름거리는 판에 방송국에 남아있던 공산당

압제비들은 의기양양해서 뒤로는 미군에게 감언이설로 중상모략을 하고

앞으로는 은근히 위협 공갈을 하는 -살얼음판 같은 공기 속에서

이승만 박사를 유일한 지도자로 받들어 굳굳이 싸워온

역사는 길이 찬양될 줄 안다.

 

다행이 민국은 새로 서고 국회도 구성되어

헌법까지 제정되어 대한민국 주권 하에 어엿한 방송을

하게 될 무렬-6.25는 터졌다. 부득이 서울방송국은 포기했고

부산방송국에 주력을 하기에 이르니 - 이른바 피난시대를 겪게

것이다. 이때 중앙방송국장에는 노창성씨였다. 부산 피난 중에 전시인지라

방송국은 다시 유엔군의 지휘 하에 놓이게 되고 한국말 연예시간은 극도로

쪼라들었다. 노창성씨는 이 애로를 뚫고 보람 있는 방송을 하기 위하여

“방송위원회”까지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 하였으나....... 비용과

 시간을 얻기 힘들어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부산 피난 중 필자는 두 편의 방송극을 쌌다.

 

성불사(成佛寺)

다시 깨 날 때

 

두 가지다- 군사 극이요 공산 오랑캐를 무찌르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이념믈 나타낸 것으로 성불사는 뜻밖의 표창을 받은

기억이 난다. 피난 중 빈곤히 지내는 때이다. 공보처장의 표창 보다는 상금

 10만원이 더욱 대견 했었다. 그러는 동안 서울수복이 추진되고 차차 방송국이

복구될 무렵 나는 대국에 직장을 갖게 되어 여러 해 만에 서울에 돌아온 것은

 90년 (서기 1957년) 정월이었다. 방송국에 찾아가 보니 정동 마루 위에 우뚝

솟아있는 방송 건물은 자취 없이 깨지고 언덕아래 전일 방송협회 자리에서

 일들을 보고 있었다. 나는 방송국으로 조남사씨를 찾아가서 첫째 놀랜

것은 분위기가 깨끗하고 분위기가 명랑한 점이었다.

 

보기만 해도 모두가 즐겁게 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오 실장의 부임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시내

어느 관청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깨끗하고 명랑한 맛은 참으로 놀랄 만 했다.

스튜디오엘 들어가 봐도 - 복도를 걸어 봐도 -변소에를 가 봐도- 일관된“청결”-

“정돈”- “명랑”의 흐뭇한 느낌이 참으로 즐거웠다. 이런 곳이라면-좋은 방송이

될 수 있으리라는 감동을 받았다. 그러자 뒤이어 KBS홀의 개관을 보게 되고

남산방송국의 낙성을 봄으로서 한국의 방송시설은 엄청난 비약을 하게

되고 자타가 공인할 근대적 양상을 뚜렷하게 자랑하게 되었다.

 

남산방송국의 구경꾼이 많는 것이 집이 좋은 것만

아니라 방송내용도 다채롭고 취미 진진한데 있을 것이나

이 모든 것이 최고 지휘관인 「오」공보실장의 몸소 생각하고 친히

 움직이는데서 시작 되었다는 것을 방송국에 드나드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어느 때인가 「오」실장의 영전설이 들려 온 때가

있었는데 우리들 연예관계자는 이구동성으로 「그 양반 잘 되가는 것은

좋으나 아직도 방송국에서 시설이나 제도에 미비한 게 많은데…….」

하며 진심으로 낯이 흐려졌던 것이다. 아주 바라노니 「오」실장

잘 돼 가시기전에 빨랑빨랑 남은시설! 미해결된

문제를 끝내 주소서.

 

 


유경환 (유카리나) 여사님 글  

2016.05.30 23:45


일제 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힘겹게

   살다 가신 분들의 이야기를 읽노라니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윤인자씨의 '나는 대한의 무궁화였다'

읽으며 알 수 있었던 그시대의 예술인들의 모습에서도 

 느껴지던 같은 느낌입니다.이혜구 선생님도 이젠 고인이

 되셨구요.     김영춘씨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를 들을 수

 없어 아쉽구요 6월28일 오후 6시 도봉구청 아뜨리움

에서 열리는 드림페스티벌에 오시면 강주봉씨라는

 분의 노래로 이 '홍도야 울지마라.'의 구성진

노래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아래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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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방송국 편성원 이서구님이 남긴 1930년대 방송야화

http://blog.daum.net/jc21th/17780660

 

일제강점기 영화 "홍도야 우지마라" 주제곡

http://blog.daum.net/jc21th/17780668

 

1960년의 라디오 연속사극 장희빈과 그 주제곡

http://blog.daum.net/jc21th/17780709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