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해방공간에서 방송기술인으로 조선방송협회에 몸담아 1965년 KBS TV기술과장을 지내다가 이민을 떠날 때까지 방송일선에서 힘을 기울였습니다. 1948년 8월 소록도 현지녹음 출장길, 순천에서 때마침 여순 반란군을 만나 인민재판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님은, 또 6.25를 맞아 6월 27일 밤 마지막까지 방송을 내 보내고 집에 연락도 못한 채 피난길에 올라 6월 28일 새벽,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한강폭파 폭음을 들으며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간신히 목숨만을 건져 밀리고 밀리는 피난 길 따라 부산에 이르렀습니다.
박능상, 전쟁의 死선을 넘으면서 방송과 함께 했던 방송인
전쟁 중 만약에 대비 할 수 있는 바다건너 제주도에 방송국을 세워야 된다고 했을 때 그 책임을 맡아 배에 기계를 싫고 바다건너 제주에 이른 것이 8월 14일 이었고 다음날 15일부터 20여일이 지난 9월 10일, 50W출력으로 방송을 내 보낸 것이 제주 방송국이었습니다. 9.28 수복으로 서울에 돌아와 전쟁 시설복구와 방송에 힘을 기울였지만 다시 1.4후퇴를 하면서 두 번째의 피난길에 올랐고 자동차에 싫고 갔던 500W비상송신기를 제주에 설치하기위해 또 제주를 찾았습니다. 50W로 방송하던 제주방송국은 500W로 출력이 증강되어 방송되었습니다.
1 빅능상, 2 이덕빈, 3 고세혁, 4 , 5 장병량, 6 이길선, 7 , 8 이성실님입니다.
과묵 하면서도 부지런했던 님은 늘 앞장서서 일에 충실했습니다.1953년 방송국이 서울로 돌아오고 공보처에 방송관리국이 신설되면서 시설계장이 된 님은 전국방송 전후복구와 새로운 시설을 위해서 늘 바쁘기만 했습니다. 전쟁으로 불타버린 정동 옛 연주소 옆 조선방송협회 사무실의 임시 연주소에서 방송하던 중앙방송국이 남산에 새로운 사옥을 마련 해서 옮기고 또 곧이어 TV방송국을 건설하면서 밤과 낮이 따로 없었습니다. 6.25무렵에 기좌(사무관)가 된 님은 1961년 KBS TV방송이 새로 문을 열면서 첫 번째 기술과장 (기정-서기관)이 되었습니다.
님은 1963년 그 시절의 방송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로운 방송 문화상을 수상 했습니다. 약 4년에 걸친 TV 기술과장 근무기간 중 방송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혀가던 1965년 님은 정든 방송국을 뒤로하고 멀리 남미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나 생활하던 중 2002년 3월 10일 세상을 뜨셨습니다. 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10주년이 되는 날 옛 방송국 친지 후배들이 만나 간단한 추도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제주방송국 개국요원으로 선발되신분은 박능상 (방송과장)님을 시설책임자로한 엔지니어 박경환, 정기영, 강기년, 김재억, 이덕빈, 김익모, 이성실, 김홍린, 조동식, 김구환, 왕종현님 등 12분이었고 초대 제주 방송국장이었던 이원영님과, 김홍진, 김해규, 권혁규,주 태익, 홍대식, 최승길, 유종현, 김경식, 이순길님등이 방송 또는 행정요원으로 선발 되었습니다.
제주방송국 개국 2주년을 맞아 박능상님은 중앙방송국장 노창성님과 함께 제주방송국을 찾았습니다. 그때 김인지 제주방송국장님을 비롯해서 방송과장 김두규, 이사동, 강방자, 김춘자, 정의진, 고두진, 고세혁, 장병량, 김홍린, 권중훈 김석규, 현승국님과 함께 촬영한 사진입니다.
소록도 취재와 박능상님
노정팔 저 방송과 50년에서
1948년 소록도 취재는 여순 반란사건과 조우 큰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소록도 취재반은 기술자 박능상, 현동섭. PD 김서봉, 아나운서 강문수, 이렇게 한조가 되어 48년 10월 19일 현지로 떠났다. 첫날 순천에 도착해서 소록도에서 자동차 오기를 기다리며 순천역 부근에 있는 서울여관에서 여정을 풀었다. 다음날 아침잠에서 깨어나 떠날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갑자기 난데없는 요란한 총성이 울리더니 순천 시내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국군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취재반은 이럴 때 몸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여관에 있는데 다음날 새벽 1시경에 반란군이 밀려닥쳐 순천역광장에 인민재판장으로 끌려갔다. 군중의 고함소리와 함께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방송국 직원이란 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취재반은 시체가 싸여있는 한 구석으로 끌려갔다. 총살하려는 것이다. ‘억울하게 의미 없이 죽어가는구나’하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총부라기 가슴을 겨누고 막 사격을 하려는 순간, 한 장교인 듯 한 자가 사격중지명령을 내리고 다른 곳으로 끌고 갔다. 아마 방송국 사람들이라고 한 것이 마음에 걸려 좀 더 신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곳에서 아주 세밀한 조사를 받은 다음 역시 여관으로 후송되어 같이는 몸이 되었다. 살아날 기회는 ‘이때뿐이다’라고 생각한 취재반은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야반도주해서 시골마을로 피신하였다. 하루가 지난 후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순 천으로 돌아와 10월 22일 서울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虎口에 들어갔다가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진 것이다. 실로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산 피난시절 문시형님과
1955년 제 2회 아시아 야구대회 중계방송을 위해 윤길구, 황우겸 아나운서와 함께 필리핀 마닐라에 갔을때의 사진입니다. 엔지니어로는 두번째의 해외 중계방송을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1958년 기술인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1 한기선, 2 이종훈, 3 이인관, 4 이현철, 5 박명희, 6 임시현, 7 노익중, 8,오신팔 9 정유언, 10 전창식, 11 김성열, 12 윤은상 13 박경환 14 박능상, 15 정경순, 16 김성배, 17 박준병, 18 윤각노, 19 이성근, 20 이중집님입니다.
남산시절 기술간부들과 함께 한 사진입니다. 1 윤은상, 2 정유언, 3 이종훈, 4 유병은, 5 박능상, 6 이인관, 7 정경순, 8 권오진, 9 이중집, 10 계수경, 11 김종면. 12 윤헌영, 13 이승균, 14 박수한, 15 김성배, 16 김성열, 17 박경환, 18 이병선
이운용 중앙방송국장과 방송기술인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1 윤헌영, 2 박능상, 3 성기석, 4 이운용, 5 이인관, 6 한기선, 7 이종훈. 8 권오진, 9 유병은, 21 박한국, 22 강기년, 23 최당. 26 이중집, 27 김인목
오재경 공보실장, 이운용중앙방송국장님과 발송기술인들이 합께 했습니다. 2 이운용, 3 이인관, 4 오재경, 5 이규일, 6 정남조, 7 한기선, 9 김영진, 10 이종훈 11 유병은, 12 성기석, 13 권오진, 14 박능상, 17 노정팔, 18 박경환, 29 이중집 39 강기년, 확인되는대로 보완하겠습니다.
1 이승우(李承雨) 2 김익모(金翼模, 3 박준병(朴濬秉), 4 정항구(鄭恒坵), 5 박능상(朴能祥), 6 권혜경 (가수 權惠景), 7 홍기봉(洪基逢) ) 8 박(최)종호(朴鍾浩)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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