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

방송인 이종훈님! 일제 강점기부터 소래송소 개소까지

이장춘 2012. 3. 20. 00:38

 

 

 

1911년 3월 11일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한 님은

 경성전기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전기에서 근무 하던 중

1938년 1월 조선방송협회가 연희송신소 50Kw를 설치하면서

 방송국 직원으로 채용되어 1972년 61세 정년으로 KBS를 떠나실

 때까지 방송기술만을 위해서 살아온 분이었습니다.

 

 

일생을 방송기술과 함께 한 이종훈님

 

 

1944년 춘천방송국 개국책임을 맡아

 시설을 끝내고 기술과에서 방송까지 담당하던 시절

기술과장으로 재직하다가 이곳에서 우리방송인 3인과 함께

감격어린 해방을 맞았습니다. 1948년 연희송신소의 전력계장으로 옮겨

재직중 6.25를 만나 피난길에 올랐고 1950년 9월 서울수복 선발대를 이끌고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한 UN군 따라 서울에 입성해서 6.25전화속에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는 한편 연희송신소에 비상스튜디오를 열어 10월 3일부터 방송을 실시했습

니다. 11월 25일부터는 정동에 임시로 마련된 스튜디오와 연결해서 50Kw송신기로 

방송을 송출 할 수 있었지만  1.4후퇴로  다시 피난길에 올랐고 1951년 5월 

서울이 UN군 수중에  들어온 것을 기회로 텅 빈 서울의 연희송신소에

들려 기계를 피난지 부산으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1951년 서울이 수복됨에 방송선발대를

이끌고 다시 서울에 왔습니다. 이로부터 서울에서

비상방송을 하면서 연희송신소를 복구하는 등 서울 환도에

 대비했습니다. 1953년 휴전이 이루어 질 무렵 서울로 돌아온 방송국이

 방송을 할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추어 놓은 님은 그때부터 연희 송신소장에

부임했습니다. 노창성님이 방송관리국장, 이인관님이 부기감이 된 것은

이때의 일이었습니다. 1955 연희송신소 100Kw출력 증강공사를 끝내고

 곧이어 1956년 1월 중앙방송국 기술과장에 부임했습니다.

 

 

 

 

이 기간 중에 남산에 새로운 연주소가 들어섰고

라디오 이동방송이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라디오 이동방송은

 1958년 KNA 납북사건과 경부 역전 마라톤 공인지점의 이동중계방송,

경인 역전 마라톤 전 구간의 중계방송 등의 성공으로 중계방송의 기틀이

확립되었습니다. 방송기술의 공로를 인정받아 「방송문화상」이 제정

되면서 제1회 방송문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방송문화사은 그 시절

 방송인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로운 상이었습니다.

 

 

 

 

 

3년 반의 기술과장을 맡았던 님은 1960년

다시 연희송신소장으로 돌아왔고 재직 중 500KW

 소래 송신소가 준공 되었습니다. 1972년 61세 정년이 되어

35년간 고락을 같이 하며 키워온 KBS를 떠나 아들딸들이 살고 있는

캐나다로 떠나셨습니다. 61세로 정년을 마친 방송기술인은 님이 최초이자

마지막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공무원의 서기관 정년이 61세로 되어 있어서

그때까지 61세 정년을 채운 방송기술인든 없었던 같고 1973년

공사가 되면서 부터는 정년이 단축되어서 55세 또는

 58세가 정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님은 온화한 성품에 친화력이 있어 직원들과

늘 마음을 같이 핬습니다. 딸 이창옥님은 국제방송국 PD로 

근무한 적이 있으며 아들 이명호님이 엔지니어로 근무 한 적이 있지만

일가가 모두 캐나다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이종훈님도 그곳에 가 기거하던 증

1990년대 미국 LA에서 세상을 뜨셨습니다. 님이 중앙방송국 기술과장 시절 1958년

9월호 방송지에 쓴 「내가 걸어온 길」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 놓으셨기에 님의 방송

생활을 짐작케 하고 있으며 그가 세상을 뜨신 후 2001년 방송문화 진흥원에서

 방송인 「명예의 전당」을 마련하면서 제일먼저 헌정자가 되셨습니다.

다음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시면 님이 중앙방송국 기술과장 재직 시

시행된 라디오 중계방송에 관한 얘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blog.daum.net/jc21th/17781112

 .

 

 일제 강점기에는 송신소의 그 많은 직원들 가운데 한국인 직원은 3, 4인에 불과 했숩니다.

1940년에 촬영한 이 사진에는 이종훈님과 황태영, 정일모, 김성재님이 계셨습니다.

 

이종훈 기술과장시절 1958년 기술인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1 한기선, 2 이종훈, 3 이인관, 4 이현철, 5 박명희, 6 임시현, 7 노익중,

8,오신팔 9 정유언, 10 전창식, 11 김성열, 12 윤은상 13 박경환 14 박능상,

15 정경순, 16 김성배, 17 박준병, 18 윤각노, 19 이성근,

 20 이중집님입니다. -사진제공 노익중님-

  

 

공보실 미국인고문관 환송기념(1961년) 李炳璿(이병선), 吳承龍(오승룡),

兪炳殷(유병은)係長, 朴能祥(박능상)係長, Williams, Nicolay 및 婦人, 韓基善(한기선) 課長,

李鐘勳(이종훈)課長, 尹憲泳(윤헌영)係長님이 함께 했습니다-사진제공 오승룡님-

 

 

오재경 공보실장, 이운용중앙방송국장님과 발송기술인들이 합께 했습니다.

2 이운용, 3 이인관, 4 오재경, 5 이규일, 6 정남조, 7 한기선, 9 김영진, 10 이종훈

11 유병은, 12 성기석, 13 권오진, 14 박능상, 17 노정팔, 18 박경환, 29 이중집

39 강기년, 확인되는대로 보완하겠습니다.

 

 

 

이운용 중앙방송국장과 방송기술인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1 윤헌영, 2 박능상, 3 성기석, 4 이운용, 5 이인관, 6 한기선, 7 이종훈. 8 권오진,

9 유병은, 21 박한국, 22 강기년, 23 최당. 26 이중집, 27 김인목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성불사의 밤 기악.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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