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

1950년대 60년대 HLKA 라디오 중계방송과 중계방송 차

이장춘 2012. 1. 21. 00:49

 

 

 

초기 라디오 중계방송과 중계방송 차

 

 

통신 시스템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는

위성을 비롯해서 FM. 마이크로웨이브 등 활용할 수 있는

통신수단이 많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중계방송을 해도

 회선 때문에 고민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줄 압니다. 이런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시절에는 어떻게 중계방송을 했을까요. 방송을 처음

 실시하던 때부터 중계방송은 있어 왔습니다. 방송국과 방속국간의 중계를

비롯해서 여러 형태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연주소 밖에서 일우어지는

여러 형태의 상황을 연주소 기계에 물려 송신소를 통해서

방송되는 중계에 관해서 말씀 드립니다.

 

경성방송국이 문을 열 때부터 스튜디오가 좁아

 다소 큰 행사나 공연은 경성공회당, 부민관 등 을 비롯해서

 방송국 밖에서 했고 또 방송국이 없던 부산, 평양, 인천 등 각 지역에서

방송을 생방송으로 해야 할 경우가 있어 그럴 때도 중계방송을 했습니다.

이때의 방송회선은 체신부의 전화선을 이용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요한 곳

몇 곳에는 전용 전화회선을 갖추어 놓고 방송을 필요에 따라 방송국과

연결해서 방송을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많질 않아서 대부분의 경우

 중계방송을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체신부에 요청해서

 필요한곳 까지 회선을 구성합니다.

 

 

 

 

일정한 고정된 한곳에서 중계방송을 할 경우에는

 그런대로 큰 어려움이 없다지만 이동되면서 이루어지는 행사랄지

전화회선이 닿기 어려운 곳에서 하는 중계방송은 어려움을 더합니다.

예를 들어 김구선생님 장례는 동대문 운동장, 소공동, 효창공원에 중계회선을

 마련하고 세 곳에서 중계방송을 했습니다. 이동중계방송을 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어서 여간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례행렬이 어디 쯤

오고 있으며 어떤 형태로 오고 있는가? 지난 간 후에는 어떤

형태로 가는가? 눈에 보이는 곳만 알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사안으로 이동중계방송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지금처럼 녹음을 해서

방송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생방송만 해야 되어서 어려움은 더했

습니다. 우리 방송사상 첫 무선중계방송은 1949년 8월 17일 인천 앞 바다에

정박한 우리 해군 속속 10여척의 함정 편대 훈령실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월미도 앞바다 군함에서 인천 조탕(潮湯)까지 단 4.5Mhz로 무선중계한 것을

서울까지 연결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기재들은 우리 손으로

조립된 50w 출력으로 5마일의 해상을 거쳐 좋은상태로 중계방송

되었습니다. 1962년판 KBS연감 (창간호 P.279)

 

6.25후에는 1958년에 중계방송차가 마련되어

 이동방송이 가능했지만 지금 생각하는 그런 이동방송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흔히 고바우 중계방송차라고 불리던 그

 자동차 안에는 발전기 한 대만 실려 있었습니다. 그 안에 설치 할 수

있는 기계를 자유롭게 들여 올 수 있는 때도 아니어서 고물상에 가 PX등에서 

흘러나온 부속품을 구해서 그런대로 이동중계방송을 할 수 있는 기계를 마련해서 

중계 시스템을 구성해 놓았다가 필요 한때 차안에 싫고 나갑니다.  차 안에서

발전기를 돌리면서는 방송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발전기는 별도로 끌고

가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동방송이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그마한 장애물이 있어도

 이동중계방송은 어려웠습니다.

 

 

 

 

1958년 고바우차가 들어오기전 큰 중계방송 두건의 사진을

올렸습니다. 위는 월남의 고딘 디엠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방문

했을때 김포공항에서 촬영한 사진이고 아래는 이해 2월  KNA기가

 납불당했을때 국민궐기 실황을 중계방송하는 장면입니다.

  

 

 

 아래는 납북된 KNA기가 이해 3월 6일 송환될때 판문점에서 중계방송 사진입니다.

 

 

 

1958년 2월 KNA비행기가 북한에 끌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3월 6일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워낙 국민들의

 큰 관심사였던지라 현지 중계방송을 해 보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KBS기술진을 총동원해서 대형이라고 한 고바우 중계차는 문산에 두고

 라디오 카는 판문점 회담 장소에 배치해서 남산의 주조정실과 단파를 통한

3각 연락을 취하면서 중계방송을 해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장 중계

방송은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현장중계방송의 어려움도 어려움이려니와 

사안으로 봐서 그토록 어려운 현장중계를 할 만한 사항도 아니라고 판단되어서

 현장 중계방송 대신 기자들의 취재 사항을 판문점에 나가있는 라디오 카가

 50리 떨어져있는 문산의 중계차로 보내고 또 남산 연주소로 보내 속보로

 방송되었습니다. 이것도 말은 이동방송이라 했고 우리 방송사사상

 처음 보는 장거리 무전 취재로그 속보성이 돋보여

방송의 위력을 과시했습니다.

 

 

 

 

 

그해 11월 18일부터 23일까지 수도탈환기념

 경부역전 마라톤 경기의 골인지점을 이동 중계방송 한

 역사적인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단거리 이동방송이기는 했지만

역사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한강건너 신길동 당시의 국정교과서

주식회사 앞에서부터 노량진역, 노량진 제 1한강교, 용산, 삼각지, 서울역,

 남대문을 지나 중앙청 골인 지점가지를 이동하면서 중계방송을 실시한 것입

니다. 이때 동원된 장비는 RCA제 (CTR-1) 88Mhz 50w 송신기가 설치된

고바우라고 불리던 이동 중계차와 2.5Kw발전기 한 대였습니다.

 

 

1962년판 KBS연감 (창간호 P.282)

 

 

1977년에 발행된 한국방송사를 보면 본격적인

 장거리 이동 중계방송은 1959년 인천으로부터 중앙청

골인지점 까지의 9.28 수복기념 제1회 국제 마라톤 대회였다고

 했습니다. 기술자 20명이 동원되어 4개의 고정국과 한 개의 이동국을

이용해서 남산에서 이종훈 기술과장의 총지휘하에 그 중계방송이 이루

어졌다고 했습니다. 이정규님 등 네 사람이 탄 이동 중계방송 차에서

가까운 고정국으로 보내 남산 연주소로 보내는 형식을 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렵기만 하던 이동중계방송의

 길이 열렸습니다.

 

 

 

 

위는 1960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때 서울역앞에서 중계방송하는 모습이고 아래는 태평로

국회의사당 부근에 도착했을때의 사진입니다. 서울역에서의 중계방송은

강익수 아나운서가 담당했고 국회에서 건설장면은 임택근 아나운서가

 담당했습니다. 이날 현장 중계방송 엔지니어는 김성열님과

정하구님이 담당했습니다.

 

 

 

 

 

1960년 6월 19일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습니다. 4.19일어난 후 아직 허정 과도 정부

 때였습니다. 이동 중계방송을 하려는 계획으로 박경환, 정항구님등

중계방송 반은 중계차에 중계시스템을 갖추고 아이젠하워가 도착하는

 김포공항을 찾았습니다. 카, 퍼레이드라도 할 줄 알았던 중계방송 반은

 헬리콥터 편으로 용산 미 8군을 향해서 떠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뒤 따라 달렸습니다. 도로를 달리던 고바우 중계차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서 무슨 물체가 떨어졌습니다.

 

중계차 위에 설치 해 놓았던 안테나가

아이젠하워 환영 플래카드에 걸려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차 밖에 있는 안테나 등이 필요치 않을 때는 자동으로

오르내리는 등의 장치가 되어 있어 문제가 없지만 그때는 방송국에

 그런 차가 없어 필요 할 때는 차 위에 안테나를 세우고 또 수동으로

방양을 바꾸어야 하는가 하면 필요 할 때는 안테나 대를 잡고

다녀야 했으며 사용이 끝난 다음에는 안테나를 내려

 차에 실어야 했습니다. (아래 사진 참조). 

 

안테나뿐만 아니라 사용되는 기계를

다 손으로 다루어야 되던 때였습니다. 그때 다행히

그 안테나는 부서지지 않아 차안에 싫고 미 8군을 갔지만

아이젠하워는 이미 미 대사관으로 떠나버린 뒤여서 그날은 중계방송

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루가 지나 6월 20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국회를

방문해서 연설을 하는 등 행사가 있었고 국회로 가는 길에는 환영인파가 몰려든

가운데 카퍼레이드가 있었습니다. 이때 국회에서 행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중계방송 회선은 미국에서 들여온 50회선의 엠프에서 한 회선을

배당받아 그 회선을 이용해서 중계방송을 한 것이었습니다.

 

야외 이동방송은 아니었지만

1958년 5.2선거때 시내 각 개표소 16군대에

아나운서와 기자를 파견해서 철야 보도한 것을 비롯해서

3.15 대통령 선거 실황을 중계방송했고 4.19후에 실시된 7.29 총선거

개표실황은 16개 서울시내 개표소와 14게 지방방송국을 연결해서 철야방송했고

 이때 지방방송국에서 보내오는 보고는 모두 녹음했다가 하시간 바다 즉석에서 편집방송하고

남산연주소의 3층 스카이라운지를 총 본부로 해서 전 방송인이모두 참여한 대규모의 개표실황

방송으로 이루어졌고 그로부터 선거결과의 개표방송때 마다 전국을 연결한 대규모 중계방송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7.29선거때 사용된 기재로는 14게회선의 지방 중계선과 30대의 전화기

5대의 믹서 .앰프 3대의 녹음기등으로 유기적이고 짜인 방송상태는

외국에서도 그 유례가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5.16지지 육사생도들 시가행진 중계방송입니다. 그때 시가행진에 참여했던

김진영, 김동진 등 17기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뒷날 이나라 군을 끌고가는 중심에

섰습니다. 아래 사진에 김진영, 김동진 등 당시의 생도들 모습이 보입니다.

 

 

 

 

1961년 5.16이 일어났습니다.

5월 18일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5.16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이 있었고 서울시청 앞에서

지지 모임을 가졌습니다. 무려 네 시간에 걸친

 중계방송을 했습니다. 이때 박경환님이

놓으신 『5,16과 고바우 중계차』라는

 제목의 글이 있어 옮깁니다.

  

5.16 혁명이 있는 1961년 신축 년은

 이동중계방송의 해라고 할만하다. 혁명과업을

알리는 육사생도 시가행진, 기타 군사혁명을 지지 환영하는

모임, 중계하는 방송이 연일 계속되었던 것이다. 5월 18일 아침잠도

 깨기 전에 고바우 차라는 애칭이 붙어있는 중계차는 즉각 동대문으로

가서 중계방송 준비를 하라는 긴급지시를 받았다. 9시 50분부터

시작하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의 혁명 환영

시가행진 대열의 중계방송이었다.

 

 동대문에서 동대문을 거쳐 시청 앞까지

 연도 시들이 박수로 성원하는 모습은 안도감에 차 있었다.

우리는 전차 위에서 전차전선을 피해가며 안테나를 남산으로 둘리고

군악대의 행진곡에 발전기도 고바우 차에 발맞추어 전진했다. 시청 앞에

다다르니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장군과 군사 혁명위원들을 모시고

 기념식이 있었다. 방송의 속보성을 살려서 이동 중계방송이 온 국민에게

군사혁명 소식을 무사하게 보도 했다는 흐뭇함을 잊을 수 없다.

 

 

 

 

1960년대는 월남전이 불을 뿜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월남에 많은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출발할 때 마다 서울을 비롯해서 첫 출발지인 춘천이나

마지막 출발지인 부산에서는 대대적인 환송벙송이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환송 시가행진을

중게방송하는 모습입니다.

 

 

 

 

초기 중계방송이나 고바우 중계방송차에 얽힌

사연은 많습니다. 고바우 중계방송차는 1958년부터 박경환님을

비롯해서 정항구, 전창식, 손대철, 오신팔, 이정규, 박한준 등 기술진과

김석봉 운전사가 이 차를 운용하면서 이동방송을 가능케 했지만 어려움은

많았습니다. 제가 라디오 초기 중계방송에 관한 글 한편을 써 보려는  마음으로

박경환님께 얘기를 부탁 드렸습니다. 『그 얘기를 어떻게 말로 해요?』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렵고 힘든 얘기들을 말로, 글로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말입니다. 그래도

 일단 기록을 남겨야 된다면서 말씀을 부탁 했습니다.

 

제가 여기 쓴 얘기는 그때 겪어온 얘기의

극히 일부에 불과 하고 그 어려웠던 일들은 대부분

표현이 않되었을  줄 압니다. 계속 수정 보완하면서 그때

그 일들을 어느 정도라도 기록으로 남겨 보았으면 하는 것이

제 생각이어서 계속 수정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빅경환님은 1947년에 방송국에 들어 오셔서

 오랜 기간 중계방송을 비롯해서 방송기술을 담당해

오셨습니다. 그동안 방송의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신 기술자 분들의 노고야 말로 값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술자분들이야 말로 방송의 뿌리이고

 뿌리가 튼튼해야 나무가 잘 자라서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저의

 일관된 생각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오늘 글은 오랜 세월

라디오와 텔레비전 중계방송을 위해 힘을 기울여 주셨고

KBS 이사와 기술본부장, KBS 최고 의결기관인 이사를

 역임하신 박경환 선생님과 정항구 방우회 이사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썼고 한국방송 50년사를

 참조했습니다.

 

 

 

 

 

 

이광재 아나운서 회고담

 

 

 

 

그시절 많은 중계방송으로 인기를 모았던

 이광재 아나운서가 2, 000년 8월호 KBS저널지에

기고한 내용을 옮깁니다.

 

 

그 시절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경인 마라톤 경기

중계 방송 실패담 한 가지. 내 성격이 원래 빈틈이 없는 편이라

 실수가 적지만 경인 마라톤 중계 방송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인천 부둣가에서 

출발해 서울 중앙청 정문까지의 코스인 경인 마라톤 중계는 출발 지점에서 골인할 때까지

 2시간 10분 정도가 걸렸는데, 다른 스포츠 종목과는 달리 뛰는 선수들을 뒤쫓아가며 방송을

해야하는 관계로 어려움이 많았다. 경인도로는 지금처럼 고속도로가 아닌 구도로였으며, 곳곳에

포장이 안 되고 공사 관계로 파헤쳐진 구간이 유난히 많았다. 선수들을 뒤따르며 중계 방송을

해야 하는 나는 중계 차량이 비포장도나 공사 구간을 지날 경우 차량이 흔들리는 관계로

안테나를 손으로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해야 했으므로 매우

신경이 쓰였다. 가두에 나온 시민들은 마라톤 선수들을 열심히 응원했으며,

중계 차량을 신기하 듯 바라보기도 했다. 동인천, 소사, 오류동을 거쳐

영등포로 들어서니 가두의 시민들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귀에 대고

 내 중계 방송을 들으며 선수들을 열렬히 응원했다.

 

 

중앙청을 목전에 두고 지금의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 앞을 지날 때쯤 돼서일까, 거의 경기가 끝나 갈 무렵이었을

 것이다.워낙 긴장을 한 탓인데다 계속해서 쉬지 않고 중계를 하여 갈증이

심하게 났다. 그렇다고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는 상황이 못 됐다. 그러다 보니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착시 현상이 나타나 선두에 뛰고 있는 김봉래 선수가 두 명으로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골인 지점 300mm를 남겨 놓고 있는데 내 눈에는 300mm가

30mm로 보였던 것이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지금 김봉래 선수 결승 지점까지

30mm를 남겨 놓고 있습니다. 마지막 기력을 다해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숨가쁘게 뛰고 있습니다”라고 중계 방송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앗, 실례했습니다.

김봉래 선수 300mm를 남겨 놓고 있습니다.”라고 곧바로 정정

멘트를 내보냈으면 좋았는데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김봉래 선수가 너무

지친 나머지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진땀이 비 오듯 흐르고 내 조급한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경기를 취재하던 스포츠 기자들이 신문사 책상 앞에서

 라디오를 통해 흘러 나오는 내 중계 방송을 들으며 기사를 작성하고 있던 시절

이었으니 말이다.다음 날 일제히 터져 나온 마라톤 중계방송 기사에서 나는

호되게 질책당했다. “이광재 아나운서의 국민학교 산수 선생님이

 어떻게 가르쳤길래 미터 감각이 그렇게 없는 것이냐”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스포츠 중계를 생방송으로 진행하다 보면

가끔씩 이런 실수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내 경우는 사정이 좀 달랐다.

이름이 알려진 아나운서인데다 팬들도 많아 작은

 실수라도 하게 되면 곧바로 기사 거리가 돼 신문의 방송평에

크게 실렸다. 말하자면 유명세를 치르는 것이었다. 조금 덜 알려진

아나운서의 경우 실수가 있더라도 그냥 넘어가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스포츠 기자들은 용납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하찮은 일을

가지고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고 속도 많이 상했지만 유명세이려니

하고 그냥 넘기다 보니 나중에는 그런 일에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만성(?)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유명세가 더욱

가속화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1961년 11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미국 방문 귀국실황을 이동 중계방송하는 모습입니다.

 

 

 

 

1960년대의 중계방송 모습 사진 두장을 더 올렸습니다.

1965년 3,1절 기념식을 중계방송하는 모습과 1968년 북한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는 1.21 사태와 동해안에서 미국 푸에블로호를

납치하는 만행이 벌어지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절정에 이르렀을때

그 궐기대회와 시가행진을 중계방송 하던 그 모습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2011 국악대상 가창상 강권순-1.wma

2011 국악대상 가창상 강권순-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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