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한국방송」이 「한국방송」이라는 우리말 방송명칭(station ID)을 갖게 된 것은 「한국방송공사」발족 후 28년, 이 명칭 안이 공식 발안된 지 8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KBS는 1972년 12월 30일 「한국방송공사법」이 제정ㆍ공포됨에 따라 1973년 3월 3일 「한국방송공사」로 새 출발 하였습니다. 이것은국가 기간방송이 국영체제에서 공영체제로 탈바꿈한 역사적 대전환이었습니다. 이 때 회사의 이름은 그 법 제1조에 의해「한국방송공사」라 법정되었고, 이 법의 위임에 따라 제정된 한국방송공사 정관 에서는이 우리말 회사명과 더불어영어명칭도 규정했습니다.즉, 그 때까지 오랜 기간 사용돼온 「KOREANBROADCASTINGSYSTEM (약칭 KBS)」을 「한국방송공사」의 영어명칭으로, 그리고 그 이니셜인「KBS」를영어이름 약칭으로채택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말 약칭은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송명칭(호출명칭)은 우리말 이름 없이「KBS」로만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3년 6월 KBS 감사로 재직 중이던 조봉균 님의 제언으로 「한국방송」이란 우리말 방송명칭이 발안되었고, 이 명칭이 2001년 6월 「한국방송공사」의 정관 개정에 따라 회사의 우리말약칭으로 채택되었습니다. 그로부터「KBS 한국방송 」 또는 「한국방송 KBS」우리말 방송명칭으로 되었습니다. 정관 제2조의 원래 규정, “공사는 한국방송공사 (영어명칭 Korean Broadcasting System, 약칭 KBS)라 한다."라고 되어있던 것을 “공사는 ‘한국방송공사 (영어명칭 Korean Broadcasting System)’라하고 그 약칭으로 ‘한국방송(KBS)’ 이라 한다.” 라고 개정된 것입니다. “들을 때 마다 기분 좋고, 볼 때마다 상쾌하다 - 「KBS 한국방송」. 이젠 「한국방송」의 앵커 멘트, 스포츠 등의 리포트, 출판물과 기타 인쇄물에서「KBS 한국방송」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있다. 여기에 방송에서 매일 흘러나오는 두 가지 로고송은 가사에서 「KBS 한국방송」 이라 노래하고 있으니 듣기에 여간 좋은 게 아니다. 과거 오랫동안 국가기간방송이 「한국방송」이라는 우리말 이름은 없이 「KBS」라고만 불리던 일을 생각하면 요즈음은 속이 후련하다.” 이글은 KBS 사우회보 2003년 봄 호 통권 제22호에 '기분 좋은 이름 「한국방송」'이라는 제목 아래실린, 전 KBS 감사 조봉균 님의 특별기고문 머리글 한 토막입니다 (글 전문은 뒷면에 있습니다).「KBS 한국방송」을 제안하신 조봉균 님은 이 방송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날 특별한 감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KBS 한국방송」이란 이름이 채택되기까지의 과정을 조봉균 님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전 KBS 감사 조봉균님이 말하는 「한국방송」 명칭 제정 그때 그 얘기 1. 저는, KBS감사 재직(1992년 4월~1994년 4월) 시에, ‘국가 기간방송의 방송명칭이「KBS」라는 영어 initial로만 되어 있는 것은 불합리하며 마땅히 우리말 명칭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이를 여러 사람에게 구두로 이야기하다가, 말만으로는 추진이 안 되겠다 싶어서,「사보 KBS」1993년 6월호에 문제점ㆍ명칭안ㆍ추진방법 등 구체적인 제언을 글로 올렸습니다. 이미 익숙해진 영어 이니셜 명칭 「KBS」에 우리말 명칭 「한국방송」을 제정ㆍ병용하여「KBS 한국방송」「한국방송 KBS」 등으로 부르자는 내용이었습니다. 2. 제가, KBS의 일원으로서 우리말 방송명칭 제정 문제를 제안하기는 하였으나, 그 실무 추진 업무가 감사 소관 사항은 아니기 때문에, 추진 실무는 「KBS문화발전위원회」에 맡기기로 사장 주재 임원회의에서 결정하였습니다. 3. 우리말 명칭을 제정하자는 안에 반대 또는 난색을 보이는 분도 없지 않았으나, 문화발전위원회가 실시한 전사내 여론조사 결과 찬성이 62%를 상회하였기 때문에 추진이 시작되었습니다. 4. 이 문제는 법적 절차로서 정관 제2조 개정과 정관개정에 대한 공보처장관 승인(당시)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저는 저대로의 사전 정지 작업으로 당시 노정팔 이사장 님 이하 이사님들과 공보처차관에게 개별적으로 설명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5. 그러나 제가 1994년 4월에 임기만료로 감사에서 퇴임하자 이 문제는 수면 밑으로 갈아 앉았다가, 박권상 사장 재임 시에 실무적으로 재추진되어 8년만인 2001년에 그 실현을 보게 된 것입니다. (2001년 5월 20일 정관개정, 6월 4일 방송위원회 정관개정 승인) 6. 실무 추진에는 KBS문화발전위원회 의장과 밀레니엄기획단장을 역임하고 현재 광운대학교 정보콘텐츠대학원장으로 있는 김성호(金聖鎬) 교수의 수고가 컸습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저의 제안이 내내 햇빛을 못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김 교수는 사우회가 펴낸 ‘그때 그 시절 KBS 이야기’ 173~174쪽에서 “우리말 이름을 최초로 제안한 분은 당시 감사였던 조봉균(趙俸均) 선배님으로 기억된다. ....마주치면...우리말 이름 제정을 제안하시곤 했다”라고 기술하였습니다. 저의 구두 제안만 기억나고 사보에 게재된 제 제언은 기억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구두제안은 허공으로 날아갈 뿐이었고, 사보에 글을 게재한 뒤 임원회의에서 문화발전위원회에 실무를 맡기기로 함으로써 비로소 실무추진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2011.12.19. 조봉균 드림 KBS 재직시절 KBS대하드라마 「먼동」촬영장 방문 먼동 담당 정영철 PD(왼편)와 감사실 이재원 사원(오른편)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조봉균님은 1992년 4월부터 94년 4월까지 KBS감사로 재직하셨던 분입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나와 해박한 법률지식을 지닌 님으로 부터 저는 두 가지 중요한 얘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하나는 지금 얘기한 「KBS」의 우리말 방송명칭이고 또 하나는 부가가치세 환급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다른 여러 얘기도 들었지만 이 두 가지는 필자에게 깊은 관심을 갖도록 했습니다. 부가 가치세 환급에 관한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방송명칭 얘기를 더 하겠습니다.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서 처음 방송을 하던 때의 경성방송국 호출부호는 JODK로 JO는 일본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호출부호의 프리픽스(prefix)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용 할 수 없다고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JODK로 했고 뒤에 생긴 지방방송국은 JB를 사용했습니다. 방송국 이름을 처음에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으로 했다가 지방방송국이 생기면서 사단법인 조선 방송협회가 발족하고 그 산하에 경성중앙방송국과 지방방송국이 있었습니다. 해방되어 9월 9일부터 "This is the Key Station of the Korea Broadcasting System. Seoul. Korea"라는 긴 영문명칭이 방송되고 약칭으로 KBS라고 했으며 이때도 회사 명칭은 조선방송협회이고 그 산하에 서울 중앙방송국과 그 지역의 이름을 앞에 붙인 지방방송국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간에 방송사 명칭이나 씨스템은 조선방송협회, 대한방송협회, 군정청, 국영방송, 공영방송으로 변천되어 왔지만 영어 약자이자 KBS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날로부터 방송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HL」을 사용했던 1947년 9월 30일까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호출부호 없이 "This is the Key Station of the Korea Broadcasting System. Seoul. Korea" 와 그 약칭 KBS가 임시적으로 대 내외적인 호출부호로 사용되었습니다. 호출부호 HL은 미국 뉴 저지주 에틀란타시에서 열린 국제 전기 통신기구 (ITU - International Te-le Communication Union)에서 1947년 9월 3일 부여받아 10월 1일부터 사용되었고 방송의 날은 그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때 부여받은 HL이 KBS는 물론 MBC나 SBS등의 본사ㆍ지역국ㆍ계열사 또 아마츄어 무선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사용합니다. 시간이나 프로그램이 바뀔때 이 호출부호를 의무적으로 방송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인정된 호출부호 외에 각 방송사의 방송명칭을 함께 넣는 호출부호 (콜사인Call sign)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은 경우가 다르지만 옛날에는 아나운서가 콜사인을 넣기위해서 늘 대기했습 니다. 프로그램을 녹음할 때는 프로그램 앞에 콜 사인을 녹음 해두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국제방송국에서는 프로그램마다『KBS 여기는 서울입니다.』라는 콜사인을 넣었습니다. 방송을 하는 위치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1960년대 남산에 3개의 방송국이 있을때의 각 방송국 콜사인입니다. 『KBS 여기는 서울 중앙방송국입니다. HLKA』 『KBS 여기는 서울 국제방송국입니다. HLSA』 『KBS 여기는 서울 텔레비젼방송국입니다. HLCK』 1948년 8월 15일 우리 정부가 새로 들어서면서 국영방송이 된 방송국의 직제는 시대에 따라 공보처, 공보실, 공보부, 문화공보부에 소속한 서울 중앙방송국 또는 서울 국제방송국 (1961년 7월 1일부터 1968년 7월 24일까지), 서울 텔레비전(TV) 방송국 (1962년 2월 5일부터 1968년 7월 24일까지)등 변천이 있었고 1968년 7월 25일 서울에 있는 방송국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중앙방송국이 되었지만 행정상으로는 중앙방송이나 지역방송 모두 문화공보부 산하에 있었습니다. 이때도 전국방송을 어우르는 방송명칭으로 영어명 KBS는 있었으나 우리말 방송명은 없었습니다. 1973년 KBS가 공사 체제로 바뀌고 「한국방송공사라」고 하는 공영방송사가 새로 발족되어 방송체계가 일원화 되었음에도 방송명은 그대로 영어 이니셜 「KBS」로만 이어졌습니다. 전국방송을 어우르는 방송명으로 KBS에 익숙해 있어서 우리말 방송명을 생각하지 못했 던 것 같습니다. 필자가 공사창립 실무 팀에서 일을 했지만 그런 논의는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조봉균 님이, KBS감사로 부임한지 1년여 뒤 1993년 6월호 KBS사보에 게재된 '우리방송의 본명을 찾자'라는 글을 통해 「한국방송」을 제안 한 이래 긴 세월이 지나 2001년 6월 그 뜻이 결실을 보면서 한국방송 사상 처음으로 KBS가 전국 방송을 어우르는 「한국방송」이라는 우리말 방송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KBS 사우회보 2003년 봄호 조봉균님 글 원문을 올립니다. 2003년 봄호 KBS 사우회보에 실린 KBS 전 감사 조봉균님 글 원문이었습니다. 1994년 KBS감사 임기만료로 KBS를 떠나면서 감사실 사원들과 함께 한 사진입니다. 위는 왼쪽부터 이남만, 정종철부장, 조봉균감사, 김형준 감사실장, 윤기억, 윤광선부장님이 함께 했고 아래는 위 사진의 6분과 감사실 전체직원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앞줄 왼쪽부터 번호따라 1.정인균, 2.김영균, 3.이윤복, 4,함삼엽, 5,이창현, 6.변기엽, 7.이동근, 8.이재원, 9.서병용, 10.임형순, 11.정태진, 12.임재호, 13.황진희, 14.김진성, 15.이성호, 16.서인호, 17.이남만 18.정종철, 19.조봉균, 20.김형준, 21.윤기억, 22.윤광선, 23.정도영, 24.김용남, 25차승주, 26.황보정규, 27.은문기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김형준님은 뒷날 KBS 부사장과 영상산업 진흥원 이사장을 지내셨습니다. 이원수선생님의 고향의 봄은 조봉균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어 이 글 배경음악으로 올렸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고향의 봄1.mp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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