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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라디오 오후의 로터리가 처음 방송되던 때 

이장춘 2011. 12. 15. 04:25

 

 

 

오후의 로터리는 KBS라디오에서

 1971년 4월부터 1994년 3월까지 방송된

와이드 매거진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국영방송 KBS의 라디오를 친구로 살아오던 국민들이

1960년대 들어 민영방송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들을 거리 볼거리가 많아지면서 KBS 역시 새로운

 방송을 요구하던 시대였습니다.

 

 

KBS 라디오 오후의 로터리가 처음 방송되던 때

 

 

이 무렵 1971년 2월 인사발령으로

노정팔 라디오 부장님이 방송관리국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 후임으로 광주방송국장이던 박상규님이 부임했습니다.

그때는 국영방송시절이라 라디오부장은 국가공무원 부이사관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행정을 해 오시던 분이라 방송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려는 욕구는 대단했습니다. 님은 부임 하던 날부터 라디오 편성을 전면 바꾸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온정신을 거기에 쏟았습니다. 프로듀서들과 늘 얼굴을 맞대고 머리를

 짜냈고 국내외 방송을 모니터 했습니다. 부산방송국에 의뢰해서 일본방송을 녹음 해다가

 제1연주실에 직원들을 모아 합평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온 편성이 국내 시청률이

 극히 저조했던 오후 2시부터 5시까지의 편성을 바꾸어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편성된 프로그램이 “오후의 로터리"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일본 NHK에서 방송되고 있던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한 프로그램으로 오후의 교차로로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오후의 로터리가 맞는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3시간 프로그램 오후의 로터리 프로그램이 편성되기 전

 그 시간대는 대공방송과 학교방송시간으로 편성되어 있었고 대공방송의 편성과 기획 제작을

맞고 있던 필자는 대공방송을 다른 채널시간대로 옮길 수 없다고 우겼지만 이미 대세는

 굳어졌습니다. 1971년 4월 1일부터 나가는 춘계 프로그램 편성은 끝났지만

그 프로그램을 누가 맡을 것이냐를 놓고 또 한 차례 고심을 했습니다.

 민영방송에서 스카우트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프로듀서를

찾다가 TBC에 있던 김현PD로 결론 났습니다.

 

김현님은 1964년 방송관리국 문화연구실에서

 (문시형님이 실장을 맞고 있던 문화연구실은 KBS 3층에

 사무실이 있었음) 재직한 적도 있어서 잠시 동양방송에서 수업을 하고

 돌아온 샘이 되었습니다. 라디오 편성과에서 일하던 몇 분이 김현 PD와 함께

 그 프로그램을 담당했고 진행은 최승빈 아나운서와 박찬숙 아나운서가 맡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없던 새로운 포맷의 프로그램이었고 두 사람의 아나운서가 세 시간

동안 스튜디오에 앉아서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도 없었던 획기적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던 박찬숙 아나운서는 중간에 잠시 다른 일을 한 적도

있었지만 1994년에 편성된 이 프로그램의 후속 시사정보 프로그램으로 까지

이어졌고 오랜 기간 이 프로그램과 함께 하면서 널리 알려져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이 프로그램 편성의 주역 박상규 라디오 부장님은

 격무에 시달려 결국 병을 앓게 되고 시청료(지금의 수신료)를

 징수 책임자 업부부장으로 옮기셨지만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뜨셨습니다.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장례를 지내던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그때 처음 오후의 로터리 프로그램을

맡았던 김현님은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오후의 로터리 담당 프로듀서 김현님의 그때 그 얘기

 

 

 

 

 

......전략…….

 

1971년 4월에 신설된 2시간 55분의

와이드 프로그램 (오후의 로터리)내가 첫 PD로

결정된 것은 방송일 을 불과 1주일 앞둔 3월 23일이었다.

박상규 부장과 김순경 과장이 고심하고 있는 것을 알고 방송국

 출입기자단에서 아마나를 추천 해준 것 같다. 오랜만에 친정집으로

돌아온 나는 NHK 동명 프로그램을 들어 보면서 우선 NHK스타일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스튜디오에 앉아서 “모스코바

특파원 나오시오” “헬리콥터 나오시오!”하며 방송 중에

호출하는 그 엄청난 기동성은 우리 처지로서는

 꿈도 꿀 수없는 화려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매거진 스타일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김과장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서관에

 파묻혀 버렸다. 하루, 이틀, 사흘..., 방송국에서 내가 증발 되었다고

야단법석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묵묵히 옛 잡지 특히 여성잡지들을 뒤졌다.

이색적인 특징이 발견되면 일일이 A0모를 해 가면서 저자와 전문가 등

방송에 출연 할 만한 사람들을 어김없이 내 출연자 명단에 기록했다.

 

사흘 동안 작업에 몰두한 후 방송국에 나타나

다시 아나운서를 결정하는 일에 이틀을 소비해t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살리고 못 살리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아나운서라

생각하고 아나운서를 한 사람 한 사람 체크한 끝에 최승빈(작고) 박찬숙 두 사람

으로 결정했다. 시그널 선정에 다시 하루 그러자 정작 방송일이 하루 앞으로 닥쳐 있었다.

 AD 세 사람과 함께 밤늦게까지 다음날 방송의 큐시트를 작성했다. 8절지 석장에 분까지

 표시한 세밀한 큐시트였다. 방송당일 10시 회의를 열어 그날 조간신문과 통신 화제

코너를 살핀 후 주제를 선정했다. 그때부터 제각기 녹음기를 들고 6명 전원 

(아나운서도 함께 뛰었다.) 뿔뿔이 흩어졌다. 전력 툭했다.

헤매고 부딪히고 인터뷰를 하고 다시 달리고…….

마침내 첫 방송을 내 보냈다.

 

후략…….

 

 

 

 

 

박찬숙 아나운서 사회로 진행된 9시의 스튜디오

 

1966년 KBS TV 미스 칼랜더 선발대회 사회 박찬숙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임계신 전선 금사향.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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