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강찬선 아나운서 방송회고록 / 1964년, 미국의 소리 방송 (VOA) 부터

이장춘 2011. 8. 18. 03:03

 

그 시절의 아나운서들과 딸 강경화등 가족이 같이 한 사진이다.

  

 

 1964년 초부터 66년까지 약 3년간
미국 워싱턴에 있는 VOA(미국의 소리 방송)에

파견되어 가족과 함께 미국의 생활을 체험했다.  VOA는

미국의 대외 선전기관으로 당시 38개 언어로 대외방송을 하고 있어서

 VOA청사는 흡사 인종 전시장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견학 자들이

 끊일 사이 없이  찾아오는데견학 자들에게는 안내소에서 이어폰을 하나씩

나누어 준다. 그것을 귀에 끼고 앞으로 걸어 가노라면 “오른쪽 벽에 있는

버튼을 누르세요. 라는 말이 들린다, 버튼을 누르면 자동적으로

스크린이 펼쳐지면서 영화가 비치는데세계 각국에서 발생한

반미대모 광경이다. “양키 고 홈” 을 왜치면서

불을 지르고 성조기를 불태우면서

 난동을 부리는 장면들이다.

 

 

 

강찬선 아나운서 방송회고록 / 1964년, 미국의 소리 방송 (VOA) 부터

 

그리고 견학 자들이 걸어가는

복도 좌우편에는 소련을 비롯한 헝가리 체코든

동구 공산제국의 쿠바, 하노이.북한 등에서 미국을 극악한

자본주의 흡혈귀로 또는 제국주의 침략자로표현한 가지각색의

포스터가 붙어있다. 나는 그곳에서 자유민주국가로서미국이

여유 있고 자신 만만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66년에는 VOA가 스폰서로 약 한 달간 미국

여행을 하는 행운도 있었다. 

 

 VOA에 근무하는 중국인, 월남인과

세 명이 동행 하였는데 여정은 워싱턴에서 북쪽으로

 자동차 공업의 중심지 디트로이트, 멀리 서쪽으로 가나다와의

접경인 몬태나 주의 그레일 폴스, 서해안의 샌프란시스코, 애리조나의

피닉스와 그랜드 캐넌, 뉴 맥시코주, 텍사스의 달라스, 휴스톤,

테네시주의 TVA(테네시 유역의 개발 사업장) 등등이 있는데

가는 곳 마다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너무나 거창하고

 풍부하고 발전된 모습에어안이 벙벙했다고

표현 할 수밖에 없다.

 

 

 
한편 어린 딸 등을 거기에서 국민 학교에

 보내면서 그들의 생활을 통해서 느낀 것은 어린

아이들을 위한 빈틈없는 배려아래 어린이들이 자유롭고,

명랑하게,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는 말하자면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린이들의 낙원이라는 것을 절감 하였다. 

미국에는 “어린이날” 이란게 없다.  1년 365일

 모두가 어린이 날 이기  때문이다.  

 

그해 가을 급성 맹장염으로 구급차에 실려

주립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하고약 20일 동안 입원

치료하고 퇴원하는 날 지불 창구에서 계산서가 나왔는데

 680여 달라가 기록되어 있어 깜짝 놀랄 수밖에.. 그때 월급이

 500달러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막상 현금은 2달라만 내라는 것이다. 

 2달라가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집과 몇 번 통화한 전화 요금이고

 그 밖에는 모두 의료 보험에서 카바해 준다는 얘기였다.

의료보험의 고마움을 절실히 느꼈다. 

 

 

 

 VOA근무를 마치고 귀국 KBS에 복원된 66년 말부터는
 본 궤도에 오른 TV쪽에 일이 많았다. 뉴스 외에 대담, 좌담은
 소위 토크쇼와 각종 경기의 중계, 특히 북의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자수 귀순한 사람들의 귀순에 관한 얘기를 본인이 출연하여 제작한 필름과
 대담으로 구성된 “증인” 프로는 주 한 번씩 꼭 100회가 방영된 것으로 기억된다.
그의 경망스러운 태도와 말투로서 어딘가 미심쩍 하다고 생각했던 위장간첩
 이수근 이라는 자와의 대담,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
김신조가 수도경비 사령관과 함께 TV에 처음 등장 했을 때
남파된 목적이 무었이냐. 고 묻는 말에 “박정희 목 따러
왔시다” 하고 거침없이 내뱄던 때의 쇼킹!!
 

  

70년대 초 남북 적십자 회담과 조절위원회
두 갈래 남북접촉으로 남북 대표들이 오가는 모습을
 TV중계하기 위해 판문점을 몇 차례 오가던 때의 어느 날 그날
우리 대표들의 평양 출발이 두 시간 이상이나 지연되는 바람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우리 측 보도원들과 북측 보도원들이 자유의 다리
앞뜰에서 우리가 준비한 도시락을 들면서 서로 어울려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평양에서 파견 되었다는 아나운서ㅡ 라는 직원이

 우리 직원의 안내로나를 찾아와 대 선배님께 인사를

 드리려 왔노라 며공손히 허리를 꺾는다.

 
물론 내가 알 수없는 새파란 젊은이

였는데평양시절 같이 있던 사람들의 소식을

물으니까  이상벽이라는 자는소위 인민방송원

(차관급 대우) 또 전금선이라는 여자도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지금도 활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상벽 ! 이자는 괴뢰군이

 서울을 점령했던 여기서 암흑의 90일이라고

 부르는 그때 강종민이라는 여자와  둘이 서울에 파견되어

 떠들다 갔고 또 런던 월드컵 축구 때 북한 팀이 이탈리아를 3:0으로

이겨 이탈리아의 천하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는 그때 중계방송으로 런던을

 다녀왔고 또 전강선이라는 여인은 50년대 초에 모스코바 우리말 방송에

약 1년 동안 다녀온 말하자면 베테랑들로 지금 그들도 60고개를

 넘은지 오래겠는데 아직도 마이크를 농하여 붉은 집단의

 선전도구의 원칙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무렵 남북 합의에 따라 대북방송을
 중지하던 때의 일이 생각난다. 72년 11월 10일 오후 두시
 “북한동포 여러분 안녕 하십니까? 지난 11월 4일에 …….
중략(대공방송 편 참조) 이와 같은 대북방송을 하고나서 상대가

 상대인지라 이것이 과연 얼마나 지속 될 것인가 내심 의아 했었는데

 얼마 안가일방적으로 대화를 중단, 파탄시킨 북한은 얼마안가

 대남비방방송을재개 지금에 와서는 그 악의 찬 비방과

중상의 도가 전에 비해 일층 격화되고 있다,

 

 
  
 이렇게 KBS와 더불어 30여년에 75년 8월에
 광복 30주년 기념 재미동포 위문단의 단장으로 김희갑,

 김상희,정미조, 송창식, 장미화등 연예인들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

 로스안젤스,하와이 호놀 로우 등지를 다녀 온 것이 방송인으로서 해외 나들이

마지막이었고TV에서는 80년까지 약 3년간 계속된 ”통일 논단“ 의 출연이 끝이고

 지금은사회교육방송의 대북 논설과 국제방송국의 해외 동포를 위한 5분짜리

시사해설을 담당하는 소위 후리렌서로서 소일하고 있는바 생각하면
그동안 주면 인사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 그리고 건강의
 뒷받침으로 이 만큼 살아왔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나
자신에 자랑스러운 존재라고 자부하고 있다
 
…….후약…….
 

 

 

아래 영문자를 클릭 하시면 강찬선 아나운서의

얘기가 더 있습니다.

 

 

 

아나운서 한길로 살다가신 강찬선

http://blog.daum.net/jc21th/17780891

 

강찬선 아나운서의 평양방송 재직시절 회고담

http://blog.daum.net/jc21th/17780931

 

아나운서 강찬선 회고록, 부산방송 피난시절

http://blog.daum.net/jc21th/17780861

 

아나운서 강찬선의 그 일대기

http://blog.daum.net/jc21th/177800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