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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근선생님 회고록, 경성방송국과 해방공간의 방송

이장춘 2011. 7. 21. 05:14

 

 
이덕근선생님 회고록, 경성방송국과 해방공간의 방송
   

 

 이덕근 선생님은 1943년에
경성방송국 아나운서로 들어오셔서 보도계장,

 편성계장, 연출과장을 하시다가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거쳐 서라벌 예술대학, 중앙대학교 교수를 지내 셨습니다.  

방우회(한국방송인 동우회) 회원으로 계시다가  세상을

뜨셨습니다. 이 글은 서라벌 예술대학 재직

시절이던 1970년대에 쓰셨습니다. 

 

  

 

아나운서가 되면 몇 가지 갖추어져야 할 조건이

있다.  이것은 아마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나 외국에서나

다를 것없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방송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아나운서다.

나는 아나운서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나  아나운서가갓 된 사람들에게 이 조건이라는

것을 알려  주면서  혼자 웃어질 때가 있다. 나는 아나운서의 조건을 하나도 갖춘

것이 없기 때문이다.예전에도 그랬다. 그런데 아나운서가 됐다. 그때도 경쟁은

심했다.그래서 시험이라는 것을 보았다. 이 시험이라는 것이 나를

아나운서로 뽑히게 한 것이라고 나는 혼자서 풀이한 적도 있다.

 
이 시험은 지금도 그때와 비슷하다.
보이스 테스트라고 해서 우선 성대를 본다.
사투리 없으면 성색이나 성량 같은 것은 그다지 문제가
안 된다. 보이스 테스트에 통과되면 필기시험이라는 것을 친다.
논문이나 상식이나 한 것 들이다. 그러니까 이 필기시험을
 잘 치르면  아나운서로 합격 되는 것이다.
 
나는 이 필기시험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지금도 대개 보면 이런 식으로 아나운서를 뽑고 있으니까
 현역 아나운서 중에는 나와 같이 아나운서가 맞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방송인의 채용시험은 적성을 가려내는
시험제도를  실시해야 된다고 내가 오래전부터
 주장 해 오는 까닭이 바로 이런데 있다.
 

방송국에 같이 들어 오신 문제안, 윤길구, 장운표, 홍준님과 함께 하신 사진입니다

 

나는 아나운서로 있을 때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다.
 아직 결혼하기 전 나는 약혼녀와 지금도 나 혼자 방송국을 오르내리는

남산 길을 걸은 적이 있었다. 아나운서를 하다가나중에는 무엇이 되느냐? 고

 나의 약혼녀가 물어 왔다.나는 그때까지 나중에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약혼녀의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질문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그의 물음에 확실히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못 마땅해 하는 눈치까지 보였다.
 
나는 당황한 중에 이렇게 대답 했다.
방송국에는 시인도 있고 문인도 있고, 극작가도 있다.
그러니까 나도 그 중에 하나가 되려는 뜻으로 대답했다. 당시

경성방송국에는 시인 김억, 모윤숙씨가 있었고,수필가 김진섭씨가

 있어서 불쑥 그런대답이 나왔던가 보다.극작가로는 내가 들어오기 전에

그만 두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약혼녀의 질문이우문이었던지 이 질문 응답은

더 이상 뒤끝이 없이우리는 결혼을 했다. 그러니까 아나운서로 지내는

동안 나의 방송에 대해 가장 혹평한 사람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나의 아내였다. 굼벵이도 한 가지 재주는 있다고
나에게도 한 가지 재주가 있었다.
 
그때는 아나운서 뉴스원고를 만들었었다.
 일본말로 적어 나온 통신을 우리말로 옮겨 적는 일이다.
 그래 가지고 시간에 맞게 편집을 하면 된다. 하루 방송시간이라고
 해야 고작 서 너시긴 밖에 안 되는데 뉴스는 전부 몇 십분 거리면 된다.
 그러니까 아나운서들이 함께 달라붙어서 한 프로의 꺼리를 장만 하는 것이다.

나는 방송하는 것보다 그 일이 훨씬 수월했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나와서

숙직한 사람과일을 바꾼다. 낮 근무라는 것이다. 낮 근무는 뉴스거리를

 장만하는 것이 큰일이다. 저녁 5시가 되면 저녁 근무자가 온다. 저녁 

근무자 중에서 숙직하는 사람 하나가 남고 열 시경에 집에 들어

간다. 숙직한 사람은 다음날 논다. 그때 아나운서 생활은

 퍽 편한 쪽이었다. 그래서 아나운서들은 제가끔 자기
 취미대로 공부도 하고 소일도 했다.
 
 아나운서 중 두 사람이 사법과 시험을

치러서판사가 되기도 하고 변호사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공부할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아나운서들은 누구도

방송을 천직으로  생각 한 것 같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했다. 아나운서들도 모두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버렸다. 마치 전쟁이 끝나기만 기다리는 사람들 같았다.

사실 또 그랬다. 나는 방송국에 남은 측이다.
 
일본 사람들이 물러나고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방송과는 방송과 편집으로 나뉘었다. 편집계가 생긴 것이다.
나는 편집을 갔다. 초대의 보도계장이 된 셈이다. 방송기자가 생겼다.
기자들이 국내 뉴스를 물어 왔다. 그러나 많은 뉴스 소스는  미국 사람들의  

손을 거쳐 나오는 영어로 된 뉴스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다. 보도계는

 번역기자들을 뽑아 들었다.그때 뉴스를 번역하던 사람들은 모두

영어에 능숙했다. 누구라고 밝힐 것 까지는 없지만 지금은

저명한 영문학자와 대학 교수들이 되었다.

 
나에게는 다시 어려운 일이 닥쳤다.
나는 영어가 서툴렀다. 어느 날 나는 편성계장으로
가라는 구두발령을 국장에게 받았다. 나는 편성계장을 맡았다.
 내 자리에는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오게 됐다. 미국 사람들이
그 사람을 천거한 것은 뻔하다. 그 사람은 편집이나 보도에
대하여  잘 모른다고 했다. 또 그런 일을
할 의향도 없다고 했다.
 
나는 그를 위해서 틈틈이 적어놓은
뉴스 편집에 관한 나의 노트를 제공 해 주마고 했다.
그것이 중앙 방송국 발행으로 나온 최초의 팜플랫 방송뉴스 편집요강

이라는 것이다.편성계장이 된 나는 내 딴에 하고 싶은 프로가 있었다.

우리나라 문화 전반에 걸친 강좌 시리즈를 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것을 너무 모르고 지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방송 프로그램은 하나하나 미국 고문관에게 알려야 한다.
 
미국 고문관은 그저 알기만 하면 그만인 것 같았다.
별로 이렇고 저렇고 말하는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프로에
대해서 어떤 것이냐고 물어왔다. 나는 나의 강한 기획이 미국  고문관

에게도 공명 되었으리라고 믿었다. 미국 고문관은 어떤 형식으로 할 것이냐고

 물었다, 포맷을 알자는 것이다. “토킹” 나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미국

 고문관은 좋다. 나쁘다는 말이 없이 일어나 나가 버렸다. 그런데

뒤에 들리는 말이 세상에 그 따위 프로그램은 또 없을

 것이라고  그 고문관이 말 하더란 것이다.
 
그는 그때 똘똘이 모험이라는 것을 맡고 있었고
 스무고게를 해 보라고 권했던 사람이다. 나는 오래지 않아
 편성계장에서 연출과장이 됐다. 연출과는 미국 사람들이
프로덕션이라고 한 것을 우리말로 붙인 것이다.
 
연출과에는 연출계와 음악계가 있었다.
 연출이나 음악이나 모두 나에게는 생소한 것이다.
그리고 새파란 나이었다. 나는 계장을 거물급에서 앉혔다.
 연출계에 이백수, 음악계에 최희남, 이 두 사람이면 누가 봐도
당당 했다. 한편 프리랜서이기는 했지만 김영수씨가 지금의 PD와
 디랙터 일을 도맡아 해 주었다. 작년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장사훈씨가 국악을 맡아준 것도 이때다.
 
나는 당시 문교부에 있었던 그를 세 번 찾아가서
제발 나와 같이 일해 주기를 간청했다. 그때 방송국의 대우는
문교부보다 못했다. 그래도 그는 와 주었다. 꼭 프로덕션과 연출과는
 그 개념이 같지 않다. 미국 사람들이 프로덕션으로 알고 하는 일이
 우리의 연출과는 동 덜어진 것도 있었다. 지금 같으면
제작과라고 고쳤을 것인데 왜 그랬던지 제작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다. 
 

1939년에 방송국에 들어와 6.2,전시방송과장을 거쳐 방송괄리국장을

지내신 송영호 선생님과 1940년부터 해방될때까지 일본어

아나운서를 했던 고가님과 함께 한 사진입니다.

 

 1966년 부산 합평회가 끝나고 촬영한 사진입니다

 

첫 방송터기공실날  방송원로 이현, 이인관 문제안, 문시형, 조부성, 정진석님과 함게 한 사진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