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72xipyAB3Fk
1967년에 방송된 TV프로그램의 한 장면을 동영상으로 편집했습니다.
장소팔 고춘자 그때 그 목소리와 만담 50년
1950년대 60년대에 사시 던 분 들이나 또 그 시대에 사시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계시면 그때 재미있었고 인상 깊었던 방송 프로그램이 무엇 이었는지요. 하고 여쭈어 보셔요. 제가 방송국에 들어오기 전에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시골 분들이 장소팔 고춘자가 나오면 그리도 좋아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들었습니다.
TV방송을 하면서 TV방송에서도 나왔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라디오에서 들은 그 목소리가 더 정겨 웠는지 지금도 라디오시대 그때 그 얘기를 합니다. 장소팔과 고춘자 두 분이 만나야 더 재미가 있는 만담을 할 수 있었나 봅니다. 제가 춘천방송국에 근무하던 1960년대 중반, 장소팔님이 춘천방송국을 들리셨기에 생방송으로 즉석 만담을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혼자는 안 된답니다. 그래서 낮 12시뉴스가 끝나고 방송되는 노래의 꽃다발시간에 대담으로 잠시 생방송을 했습니다. 장소팔, 고춘자님이 만나야 만담이 되었던 것이지요.
이 만담은 19세기 말부터 있었다지만 그 내용은 잘 알수가 없고 1920년을 전후해서 윤백남 선생님이 만담을 하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윤백남 선생님은 이인직 선생님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라는 원각사를 세운 분이고 경성방송국 우리말 전담방송 채널이 처음 생기던 때 책임자 였습니다. 연극도 하시고 이 땅에서 처음으로 영화도 만들었으며 글도 쓰셨는데 흔히 말하는 만담을 하셨답니다. 그런데 이분은 만담이라는 용어대신에 사화(史話)라고 했습니다.
재미도 재미지만 맥맥이 흐르는 역사를 재미있는 말로 엮어 전한다는 뜻이지요. 폭넓은 지식괴 재미있는 말로 국민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는 그런 코메디가 아니지요. 깊은 뜻이 담긴 얘기를 재미있게 엮어 간다는 뜻의 사화였는데 부르기 좋은 말로 만담이라고 했나 봅니다. 이 분이 방송을 할 때면 라디오 방송이라 비록 눈으로 보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직접 보고 있는 앞에서 사화를 한다는 마음으로 또 거기에 알맞은 동작을 하면서 방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모두 생방송 이었으니 그 어려운 생방송을 하면서 예를 들어 눈이 내리는 얘기를 하면 손으로 옷에 묻은 눈을 털면서 방송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분이 사화(만담)를 할 때는 눈 앞에서 보는 것 같은 마음으로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그보다 조금 뒤에 나오신 분이 잘 아시는 방정환선생님이었습니다. 방정환 선생님 말씀 역시 뜻 깊은 얘기를 재미있게 엮어 주신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힙니다. 깊고 폭 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말을 재미있게 하는 말재주가 있었던 방정환 선생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소년운동을 할 때는 전국적인 조직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방송국이 문을 열 때 제일먼저 방송을 하신 분 중의 한분이었습니다.
그 뒤를 이으신 분이 어제 본 블로그에서 만난 황재경님과 그시절에 또 다른 분 신불출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황재경님은 목회자로 그 일에도 바쁘셨고 또 1947년부터 미국에서 활동하셨기 때문에 만담을 하기는 했어도 만담가로는 분류되지 않지만 신불출님은 전형적인만담가였습 니다. 불세출의 만담가였다고 합니다. 무대에도 자주 서고, 노래 노들강변의 작사자이기도 합니다. 방송도 자주 하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해서 지금 사시는 분들은 신불출님에 대해서 말로만 듣고 기록으로만 보았지 실재로 그분을 아시는 분들은 별로 없으실 줄 압니다. 그 신불출을 이은 분이 장소팔(장세선) 고춘자(고임득)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23에 태어난 장소팔님과 1922년에 태어난 고춘자님은 1940년대부터 연예활동을 했고 6.25무렵 부터 두분이 명콤비가 되어 공연도 하고 방송도 했습니다. 그 분들 앞에서는 모두 즐겁고 여유로웠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을 국민 만담가라고도 부르기도 했습니다. 2009년에는 장소팔님이 사셨던 신당동에 동상이 세워졌다는 얘기를 들었습 니다. 1970년대 이후 TV시대가 되면서 코메디언이라는 이름으로 만담을 이어 왔다고는 하지만 또 그 코메디가 재미가 있는지는 몰라도 그때 그 만담을 들으시던 분들은 그때 그 만담에 더 정감이 가고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글은 방우회 노익중 이사님의 도움으로 썼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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