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의 방송

해방전야의 정세와 경성방송국에서 있었던 일들

이장춘 2011. 7. 27. 04:29

 

 

  
 해방전야의 정세와 경성방송국에서 있었던 일들
 

 

  1945년 8월들어 히로시마와 나가시키에 원자탄이

투하되고 소련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8월 8일 두만강을 건너

청진 앞바다에 나타나 제1 공격 목표이기도 했던 청진방송국에 함포사격을

가해서 방송의 기능을 마비시켰고 13일에 이르러 천진방송국이 폭파되어 산산조각이

되면서 일본은 항복준비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무렵 그 위세 당당하던 총독부가

 일본이 항복 했을때 자기들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안재홍, 여운형등 국내

 독립운동가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자기들의 항복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이었습니다. 

총독부는 8월 11일 총독부를 찾은 방송국의 문제안님을 비롯한 기자들에게 

 그 사실을 암시했습니다.  이때는 민족지 중앙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폐간되고 없을때였습니다. (그때의 중앙일보는 지금의

 중앙일보와 다른 신문입니다.)

  

문제안님과 같이 근무했던 이덕근선생님이

 그때의 일을 1971년 6월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얘기들

방송 50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 해 놓으셨습니다.

 

 

 

 

 

이덕근 선생님 회고담  

 

 
11일 아침 문 기자가  ( 문제안은 그때 직책이

방송원이었지만 이덕근님은  기자라고 호칭하십니다) 

 총독부에 들렸더니 정보과 신문방송계의 무료 바야시(無量林) 라는

 일본인이 출입기자들을 초청해 놓고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이 곧 근본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라는  말과 함께 총독부는 여운형과 안재홍을 찾고 있다는 뜻을

비쳤습니다.  문제안 기자가 방송국에 들어와 일본인 방송인들도 많은 가운데

이 말을 하여 모든 직원들이 놀랐는데 일본인 직원들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 이었습니다.  문 기자는 신문방송을 한손에 쥐고있는 무료바야시

 (無量林)의 말이고 보면  숨길 것이 없어서 큰 소리로 말 했는데

일본 방송인들의 표정이 굳어지는바람에 한때 긴장 했습니다.

 
방송국에는 당시 계제 금지 사항보와 주의 사항보,

두개의 장부가 있어 통제되는 기사의 제목을기재하고 있었습니다. 

 기자들은 이 금지사항을 거꾸로 해석해서정세를 판단했는데 여운형, 안재홍을

찾는것과 8월 8일 일본 외상 마쓰요가 가 소련에서 외상을 만나려다 만나지 못한 것,

 9일에 소련이 참전하게 된 것 등을미루어 비상사태가 왔음을 짐작 했고 이때부터

 우리 방송인들은 해방의 날이 오고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방송 뉴스 원이었던 동맹통신에 관심을
기울이던 중 14일 밤 공동통신에 해방소식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이 동맹 통신은 옛날 조선호텔 앞 왕궁다방이라는
 유명한 다방의 3층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라디오와 신문의 뉴스를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이 건물이 원래 텔레빌딩 이었습니다. 일본이 항복하기 하루 전인

8월 14일 방송국 간부들은 15일에 일본이 항복하며 일본항복문의 본문이

14일 밤에 동맹통신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보통 때는

 방송국에서 이곳에 뉴스를 받으러 가는 경우가 없었으나 이날은

사건이 커서 이혜구 당시 제2보도과장님이 문제안기자 에게

 직접 가서 본문을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문 기자가 동맹통신에 도착 했을 때에는
통신사 안에 동맹통신 원경수 기자와 매일신보의

곽복산 기자 그리고 프린트의 필경을 하는 필경사 두 명

이렇게 해서문기자 까지 모두 다섯 명의 한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9시쯤 항복문서의 본문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3분의 1쯤이

들어 왔을 때 갑자기 통신이 끊겨지며 일본 헌병들이 통신사로 들어 닥쳤

습니다. 일본 헌병들은 사이드카를 타고러닝셔츠 바람에 일본도를  뽑기 쉽게

어깨에 메고 허리에 권총을 차고 들어 닥쳐 통신사를 제압하고는 지금까지  

들어온 항복서 본문을 불태우라고 지시함에 따라 항복서는 프린터 되지

못하고 소각 되었습니다. 헌병들은 여기에 있던 문제안 기자와

곽복산기자를 밤 12시가 넘도록 감금 했다가

새벽이 되어 풀어주었습니다.

 

 

 

 

 

 
필자가 뒷날 문제안선생님에게 8월 14일의

얘기를 직접 여쭈어 보았더니 그때 엄청 무서움을 느끼셨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들려 주셨습니다.  

 

 

“14일 밤에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 내용이

들어온다고 해서조선호텔 근처에 있던 일본통신사인

 동맹통신 편집실에서 기다렸습니다. 밤 8시40분쯤 헌병대에서

 “지금까지 들어온 내용을 모두 불태우라’는 전화가 오더니, 곧 헌병들이

들이닥쳤어요. 여기서 감근당했다가 밤 12시 무렵에야 겨우 풀려나 방송국에

들려 얘기를 나누고 새벽 3시쯤에 잠깐 집에 들려 잠도  못 이룬 체 아침에 출근

 하는데, 윤용로 아나운서가 동맹통신에서 천황 항복 선언 원고를 받아 들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 오더군요. "8월 15일 낮 천왕의 항복방송이 끝난 후일본말 원고를 후쿠다

 제1보도과 계장이 방송하고,이덕근 아나운서는 우리말로 번역한 내용을 몇 차례

방송했습니다. 하지만 라디오가 귀했던 때라못 들은 사람이 더 많았을 겁니다.”
이 가슴벅찬 뉴스를 전 국민이한 사람이라도 더 듣도록 하기 위해

천왕의항복내용과 또 이를 쉽고 잘 이해기 되도록

해설을 곁들인 방송이 계속 되었습니다.

 

 

엔지니어 이종일님의 8월 14일밤

 

이종일님은 엔지니어로 8월 14일밤  방송국 숙직을
하면서 방송을 내 보낸분입니다.

 

 

 

 

8월 14일 밤 야근 무렵부터 어쩐지
뉴스방송 내용이 이상 할 정도로 단조로웠다.
방송과의 숙직자인 이덕근 아나운서에게 물어봐도 통신이

별로 없다는 대답이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투하된 후부터 전쟁 뉴스는 좀 저조한 편이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단조로운 듯 했다.

 

NHK방송도 특별한 뉴스가 없었다.

대동아전쟁 분위기가 가실 듯 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별다른 이상이 없기에 내일 정오에 중대방송이
있을 것이라는 10시 마감 뉴스를 마지막으로 방송종료를 고했다.
그리고 보통 때처럼 지방방송국에전화 연락을 마치고 나서 이덕근

씨에게전화 연락을 해 보니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했다. 문제안씨가

 동맹통신에 취재를 나갔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것이다.

문 씨는 다시 한 번 들리겠다는연락뿐이라고 했다.

 

기계의 전원을 끈 다음
아래층에 가보니

일본어 보도과에 숙직자인 이씨가 앉아 있었다.

이덕근씨를 불러내 현관 밖에서바람을 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이때 이덕근씨 말이 아무래도 정세가 이상하고

문 씨의 연락도 전과 달리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문밖에서 문제안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밤 12시 무렵 문 씨가 돌아왔다.
반갑게 맞이하며 내일의 중대 뉴스를
(문제안 기자에게) 물었더니 문 씨는 아무래도
항복을 할 모양인지 오늘 동맹통신 분위기는 아수라장이라는
것이었다. 통신사 통신원까지 일본헌병에게 쫓겨났다가 들어가는
정도로 일반기자들의 접근을 금했다는 것이다. 취재는 일체 금지되고
철저한 보도관제에 들어가서 문 씨도 하마터면 붙들려 갈 것을
방송국 신분증과 군 보도과 증명서 때문에 겨우
통신사 부근에 있을 수 있었다고 핼쓱한
얼굴로 얘기했다.

 

우리는 일본 패전 후의 뒤처리를
얘기 하다가 전화연락을 마친 문 씨와 함께
2층기계실에 올라가 새벽 1시 VOA 해외방송을 들었다.
일본을 향한 방송이었다. “만일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도쿄에

제3의 원자폭탄을 투하할지 모른다. 이러한 불행한사태를 미국은

 원치 않고 평화적인 해결을 바란다. 우리는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내용이었다. 우리는 흥분 하였다. 숙직하던 우리 세 사람은

 밤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새벽녘에야 자리에

 누웠으나잠은 오지 않고 가슴만 두근거렸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와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도
또 소련군이 두만강 국경을 넘어서면서 한, 만국국경이
전쟁의 화염에 싸이면서 대 출력 청진방송국이 폭파되어도 전쟁을

끝내야 된다는 들끓는 세계 여론을 거스르면서 일본 군부는 끝까지 발악

 했습니다. 일본 내각이 8월 14일 10시에 이미 무조건 항복하기로 결정했고

이런 내용을 동맹통신을 통헤서 발표했지만 군부는 끝가지 발악하면서

동맹통신마저 불태우고 취재하던 기자를 감금 하는 등 겁을

주었던 일본 군부였습니다. 15일 낮 천왕의 함복방송이

있기까지 촌각이 길게만 느껴지던 때였습니다.

 

히로히도 천왕의 항복문서 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