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의 방송

경성방송국 일본 방송인이 말하는 8. 15의 패망의 날! ( 1 )

이장춘 2011. 7. 25. 04:03

 

일본에 있던 경성방송국 직원들의 모임 조방회가1980년 제 8 회 모임으로 아니와 회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 방송인이 말하는 8. 15의 패망의 날! ( 1 )


 


 1945년 8월 15일 ! 해방되던 날
조선방송협회소속직원은 모두 천여 명에
 달했습니다. 그 가운데 일본인은 281명이었습니다.
전국에 흩어져 살던 이 분들은 전쟁이 끝난 후 27년이 지난
 1972년부터 조방회라는 모임을 갖고 1년에 한 번씩 각지를 돌아
다니면서 모임을 가져왔고  1977년에는 많은 분들이단체로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옛날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해방되기전  방송국

근무하던 때를  회상하는 책을 쓰기로 해서

20여명으로부터 원고를 모아 1981년  JODK

조선방송협회 회상기라는 책을 냈습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회원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게 되어  금년 ( 2007년 )들어  자료와
하시던 일들을 평소에 인연을 맺어왔던  방우회 ( 한국
방송인 동우회 )에  넘기면서 조방회는 해체되었지만  
이 분들이 써 놓으신 책 회상기를 통해서 스스로
겪은  일들을 후세에 전하고 있습니다.
 
 
아나운서 다카하시 기요시 (高橋 凊) 회상기
 
 
1945년 8월 15일! 그날은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로 작열하는 태양이 대지를 불태울 것 같았다.
그날 마침 오랜만에 휴가를 얻은 나는 평소 같으면  싸인  피로를
풀기 위해 늦잠이라도 자고 있었겠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아침일직부터 잠을 깨어 불안한 마음으로
 오직 정오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린다는 것이 이렇게 초조하고
길게 느껴진 적이 있었을까. 그 정도로 강렬한 불안과
긴장을 느끼게 한 사태가 시시각각 닥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전날 도쿄중앙 방송국은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내일 15일 정오 중대한 방송이 있으니 반드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 거듭 반복했다.
 
그것을 듣는 순간 내일의 중요방송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이미 며칠 전 특수한 분야의
소식통으로부터 가까운 시일 내에 그와 같은 방송이
 행해 질적이라는 예측 가능한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방송국 안에서는 엉뚱한 예측이 난무하고 있었지만 진상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설사 안다고 했어도  당시 상황에서는
입 밖에 낼 수 없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여담이지만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임이
틀림없다는 예측이 지배적이 엇다. 그 의견을
한층 결정적인 것으로 한 것은 “내일 중요방송에 내일
대소 ( 對 蘇 )선전포고가   행해지면   즉시   국민사기를
앙양시켜야 하니 방송시간을 준비 해주기 바란다.” 는
 군 보도부로부터 요청이 있었던 것이다,
 
이 요청을 받고 편성과 에서는
예정된 프로그램을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인들은 비장함과 긴박감속에서 내일의 방송을
대비하고 있는 반면 조선인 아나운서들은 냉정한 태도로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와 같은 태도를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일본인들에게는
 전혀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앞에서 말한
의견에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아마 정확히 말해서 내일의 중요방송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내용을 말 할 수 없는 특수한 사정이 있었는데
정보를 제공 해준 인사의 신분에 중대한 위협이 가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개와 같이 입을 굳게 다물고
일본인들의 빗나간 예측을 들으면서 죄송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진상을 고하는 방송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드디어 그 순간이었다.
정오시보가 울리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소개
아나운서에 이어  천황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생각한대로 포츠담 선언에 대한 항복의 조칙이었다.
천황의 방송은 15분이 못 미쳐 끝났다.
 
악몽 같은 태평양 전쟁은 여기서 끝난 것이다.
조선 독립운동의 공로자 여운형에게 협력하고 있던
나의 친구가 극비로 들려준 정보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그도 항복 선언을 천황이 직접 발표할 줄은 몰랐던 같다.
나도 의표를 찔렸다.  설마 그렇게까지 한 줄은 몰랐다. 어쨌든
전쟁이 끝났다는 현실감은 암흑 속에서 번쩍이는  햇빛 아래로
뛰쳐나오는 듯 한 환희와 해방감을 맛보게 되었다.
 
그것도 나의 자유의사에 의한 지극히
솔직한 만세를 절규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칙어방송에 이어 계속되던 임시방송이 돌연 중단
되었다.“ 송전기 고장인가.” 하고 생각하며 2분, 5분, 10분을
기다렸다.   그러나 방송은 중단된 채였다. 불안한 예감이
스쳐갔다. 이와 동시에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 졌다.
 
시끄러운 군중들의 함성과 기분 나쁜
징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내가 살고 있는 신당동
동쪽 20-300m동쪽 조선인 마을에서 군중들이 쏟아져 나와
함성을 지르며 수많은 군중들이 징을 쳐대고 있었다.
 
또한 함성을 지를 때 마다 모두가 나무대기 같은
 물건을 높이 들고 흔들었다. 그 끝은 빛나는 태양빛을 받아
빛나는 태양빛같이 번쩍이고 있었다. “ 저것은 무엇일까? 잠시
생각 했지만 모르겠다. 예상대로 조선인들은 오늘의 해방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조선인 아나운서들이
취한 태도에도 분명히 그것이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층에서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층 일반대중들까지 이토록 알고 있었다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그것은 아마 나의 인식부족인지 모른다.  30여 년간 일본의 악정에
 시달려온 그들의 비분과 저주는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미. 영. 소 3국수뇌가 얄타 섬에서 회담하고
얄타선언을 채택 했을 때 조선은 일본 항복 후 독립을
인정한다는 것을 명시했다.  틀림없이 이 같은 사실이
모든 조선인들에게 은밀하게 전파되었던 것이다.
 
그 염원을 이룰 수 있는 첫걸음이 일본의 항복이엇기
 때문에 일일 여삼추 그날을 기다리던 그들에게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과감하게 그 사실을 알린 것이 아닐까?  일반대중들의
 재빠른 반응을 보면 납득이 가는 부문이다.
 
....중략...... 이날 다카하시 기요시는 방송국까지 가는데
어려움은 겪었지만 결국 방송국에 도착 했다는 얘기 입니다.
 여기서부터 얘기를 이어 보겠습니다..,,,,
 
언덕을 올라 방송국 현관 앞에 도착했다.
그러자 조금 전에 본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고  그 옆에는
대한빈국 임시정부 假방송소라고 크게 쓰인  현수막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방송국 안으로 들어서자 조선옷을 입은
 사람들로  각 방에서 붐비고 있었다. 그 때문에 대단히
실어하는  마늘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들은 나를 검문하거나 제지하지 않고
못 본체 했다. 바로 내가 소속된 제1방송부에 들어가니
그곳에서 조신인은 보이지 않고 대신 국장이하 모든 직원들이
 빽빽이 앉아 있어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용하게도 왔네요. 시노하라 국장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오는 도중의 얘기를
간단히 한 후 방송국 접수경위에 대해 물었다. “정무총감으로부터
정식으로 접수허가를 받았다고 하네. 억지로 반항 해 보아야
직원들의 신변에 위협을 가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라......
 
” 국장은 매우 유감스러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 허가를 입증할만한 서류를 지참 했습니까?” “ 아무것도 없어
 진위 확인을 하려해도 총독, 정무총감, 국장에서 부장까지 전부
행방불명이야. 텅 비었어“ ”그야말로 무정부 상태 아닌가요?
“ 화가 나기 전에 열린 입이 닫히지 않았다.
 
평소 총독부 깊은 곳에 들어앉아 육군대장
계급장을 배경으로 가들막대던 아배총독을 비롯해
수뇌부가 존망의 위기에 닥치자 미련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조선에 있는 동포들의 안위는 안중에 없고
어떻게 되어도 모르겠다는 것인가. 이미 경찰이 없어지고,
또 정부마저 없는 상태로 상황은 발전 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방송을 재개해 민심의 동요와 불안을
제거해 주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접수했는데 그들은 왜 ?
방송을 시작하진 않는가요? “운영방침 때문에 다투고 있는
것 같아.  그러나 시작한다고 해도 일본어 방송은 절망적이야.”
국장은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렇게 된다면 뜻밖의 혼란을
피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설마 그들이 그것을
 바라고 있지는 않겠지만......” “모르겠어.
그들이 흥분상태라서…….”
 
국장 말대로 이런 경우 감정적으로 흐르기 쉽다.
그들 중에도 대국적인 견지에서 이성적으로 사태를
수습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면 감정이 지배된 행동으로
 결정이 날 경우 훨씬 더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또 그것이 대세를 점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조방회 세번째 모임이  1975년 11월 9일 히로시마에서 있었습니다.
 
 
얘기가 너무 길어서 제가 요약해서 설명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다카하시님의 이 뒤의 얘기는 천왕 항복방송이
 끝나고 접수소동으로 여섯 시간의 방송이 중단 되었다가 저녁 7시 20분부터

방송이 재개 되면서 다가하시 경무부장의  짤막한 담화가 방송되고 또 다카하시 기요시  

아나운서 자신이 경무부장의 원고를  근거로 10분 방송 량의 원고를 작성해서 경무부장의

동의를 받아 경무부장 명의로 방송함과 동시에 제 2방송으로만 방송되던 조선어 방송을  

 이계원 아나운서가이  원고를   조선어로 번역해서 제1방송에서도  방송 하게 되면서

 이 방송이 조선인의 이해를 구하는데 도움을 주어 조선인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등 좋은 결과를 가져 왔다는  얘기가

있는데 얘기가 너무 길어  줄입니다.

 
이 얘기를 옮기면서 생각나는 것은
우리 선배 방송인들은 그날 방송이 중단되었다는
얘기가 없고 목총을 든 청년들을 16일 아침에 출근하면서
 처음으로 보았다고 했으며 일본군이 들어 온 것도 16일 오후라고
되어있는데 다카하시가 말한 천왕 항복방송이  끝난 후 여섯 시간의
방송중단이 있었다는 점과 이계원 아나운서가 제 1방송에서 우리말
방송을 했으며  한국인 청년들이 15일에도 방송국에 왔다는 내용등은
그때의 현장에 있었던 우리방송인들의 얘기와는 거리가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다음 회에서는 방송국 간부로 근무하시다가
 일본으로 가신 분들의  얘기를 옮기겠습니다.
 

조방회가 1993년 10월 31일 오오사카, 다카노산에 있는 절에서
단파수신사건으로 곤욕을 겼으셨던 성기석선생님을 비롯해  청진방송국 폭파로 

세상을 떠나신 방송인들의 명복을 비는  천도제를 올리고 찍은 사진입니다.  방우회

 (한국방송인 동우회) 문시형 회장님과 이인관(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세번째) 왕종현,

김봉철 ( 뒷줄 왼쪽첫번째,  두번째)님이 이 모임에 같이 하셨습니다.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왕의 육성방송을 듣고
비통해 하는

일본인들  모습입니다. (1945년 8월15일)

 

 

 

조국의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만나는 이마다 서로부둥켜 안고 목이 터져라 해방 만세를

 외치면서밤이 되어도 흩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45년 8월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미영중소 연합군에게 항복을
발표하자 8월 16일부터 서울 광화문 네거리등 잔국에서 
시민들의  환호가 울려퍼졌습니다.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옥고를 치루던 성기석님이 8.15

조국 해방으로 만기 2개월을 남기고 1945년 8월 16일서대문 형무소를

 나오시는 장면입니다. ( 기를 높이 드신 분이성기석님입니다.) 다른분은

 옥중 사망 했거나 이에 앞서 옥문을 나오셨습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 화보

 

1941년12월7일(일요일) 새벽 6 시(하와이현지시각)

( 한국,일본은 12 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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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년 12 월 7 일 새벽 6시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기 위하여

일본 항공모함에서 출격하는 제 1진 183 대 전폭기들을

송영하고있는 모습.

항공 모함은 하와이로부터 440 Km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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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포드섬을 중심으로 줄을 지어 정박해 있는 미 전함들이

일본 전폭기들의 공격 목표였었다.

1941 년 12월 7일은 일요일이었었다.

수병과 군인들은 외박 나갔거나 늦잠 자는 날이다.

 

아리조나호 전함이 화염에 쌓여 폭발하고 있는 모습을

포드 섬에 있는 미 해군 비행 기지에서 수병이

어리벙벙해 하면서 바라보고있다.

곧 바로 비행기지에 있던 미해군 전투기 33 대가 폭파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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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조나 호 전함이 피격 당한 직후 첫번째로 찍은 사진.

검은연기가 하늘로 치솟고있다. 이해할수 없는 상황에

어리둥절해 하는 미군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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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랜드 호 전함이 연기를 기둥처럼 뿜으며 폭발하고 있다.

오른쪽에 소방선이 기름 바다인 진주만을 헤치며 전함으로 달려 가고있다.

 

부두에 있는 폭탄 저장고가 공격을 받아 폭발하고 있고

오른쪽은 전함 네바다 호가 불길에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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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버지니아 호 전함이 피격 당해 옆으로 기울어 침몰하는

중이고 나란히 서있는 테네씨호 전함도 불길에 쌓여있다.

구조 보트가 한사람을 물에서 건저 내고있다.

 

펜실바니아호 가 대파 된채로 기울어저있다.

일본 전폭기의 일방적인 기습 공격에 공습은 일본측 대승으로 끝났다.

천만다행인 것은 항공 모함 세척은 모두 태평양에서

근무 수행중이어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

 

공습이 끝난후 일본측 피해는

잠수함 한척과 전폭기 360 대중에 겨우 29 대 만이 격추 되었을 뿐이다.

 

반면에 미국측 피해는

전함 6 척 침몰, 전폭기 164 대 소실,

해군 2008명 전사, 육군 218명 전사,

해병대 109 명 전사, 민간인 68명 사망, 부상자 1178 명이었다.

 

진주만 공격은 미국인들만 경악 시킨게 아니었다.

평화 회담을 하러 워싱턴에 머물던 일본 대표들도 몰랐었고

일본의 우방인 히틀러도 알지 못했던 초특급 비밀 작전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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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최후의 일본인 방송인들

http://blog.daum.net/jc21th/17780045


경성방송국 일본 방송인이 말하는 8. 15의 패망의 날!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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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방송국 일본 방송인이 말하는 8. 15의 패망의 날!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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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기술간부가 쓴 항일 단파방송 사건

http://blog.daum.net/jc21th/17780692


동영상, 일제강점기 한국에 있던 일본방송인들

http://blog.daum.net/jc21th/1778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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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 화보

1941년12월7일(일요일) 새벽 6 시(하와이현지시각)

( 한국,일본은 12 월 8일)

 

첫번째, 두번째, 네번째, 5번째, 일봅번째 사진은 없음

 

 

 

 

 

 

 

 

 

 

 

 

 

 

 

 

 

 

 

 

벗 꽃이 질때 여.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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