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KBS 프로듀서 공개채용 / 김영우, 박종민, 조부성
1927년 이 땅에서 최초로 경성방송방송국이 문을 연 이래 오랜 기간 아나운서나 기술자는 공개채용을 통해서 선발해 왔지만 프로듀서나 기자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고 프로그램 기획, 편성, 제작에 임하는 방송요원을 편성원 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적은 있었어도 이분들은 아나운서 시험을 보고 들어와 프로그램을 제작하거나 재능 있는 인사를 추천 또는 특채 형식으로 선발했기 때문에 공개채용으로 프로듀서를 선발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강압에서 벗어나면서 취재의 필요성을 느껴 해방되던 다음날 구두로 취재명령을 받은 문제안 아나운서가 기자로 활동해서 방송기자 제 1호가 된 이래 방송기자 수가 늘었고 정부수립 이후 기자를 공개 채용으로 선발했지만 이때로 프로듀서를 공개 채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노정팔선생님을 흔히들 PD 1호라고 하지만 그분도 아나운서시험을 통해서 방송국에 들어 와 편성, 제작이 적성에 맞아 그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정부수립 후에는 국영방송시절이어서 일반 공무원이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기획하고 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국영방송이었던 시절이라 방송프로그램은 일반 공무원이 편성, 기획, 제작에 임했습니다. 수시로 옮겨 다니는 공무원의 특성상 전문성도 갖추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늦게나마 방송을 전담할 프로듀서를 선발했습니다. 이때가 1957년 5월이고 이때 방송사상 최초로 선발된 프로듀서는 김영우, 박종민, 조부성님이었습니다. 이분들은 6개월간의 수습과정을 거쳐 처음부터 프로듀서로서의 재능을 발휘하면서 주요 프로그램 제작에 나섰고 방송국을 퇴직 할 때까지 방송을 했습니다.
김영우님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나온 PD로 적극적이고 빈틈없는 자세로 프로그램 제작에 임했으며 아름다움과 예술성을 추구했습니다. 위 프로그램은 일요한담 프 로그램의 현장녹음 모습입니다, 1961년 TV방송을 할 때는 국토의 변모 해 가는 모습을 전해주는 건설의 현장이나, 해외 여행이 어렵던 시절 여행을 자주 다니시던 문제안, 김찬삼님등 체험담으로 들려주는 "관광여행" 등 프로그램을 맡아서 힘을 기울이다가 무대계장을 지내셨습니다. 그 후에도 대공방송 등 여러 부서에서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고 KBS 미술부장을 지내셨습니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건강에 요즈음도 건강관리를 잘 하셔서 80이 넘으셨어도 젊은 모습으로 보입니다.
박종민 PD는 오랜기간 주요 프로그램을 맡아오던 문시형 PD가 1958년 보도로 옮기면서 그 업무를 이어받아 녹음구성 사회탐방을 비롯해서 공개방송 스무고개, 퀴즈 올림픽, 라디오게임, 재치문답등 비중 있는 프로그램을 맡아 유능한 PD로 인정받았습니다. 1960년대에 MBC로 옮겼고 1990년대 세상을 뜨셨습니다. 위의 사진은 1962년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재치문답을 진행하는 장면입니다. 최세훈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았습니다.
조부성 PD는 부지런하고 무슨 프로그램이던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어린이 공개방송 누가누가 잘하나, 무엇일까요. 등의 어린이 프로그램을 비롯해서 어떤 프로그램이던지 잘 엮어갔습니다. 그 시절 KBS 제1방송과장을 하셨던 노정팔님은 “방송과 50년” 자서전에서 “태평로에 있는 대한 공론사 강당에서 공개방송을 하는데 마치 오케스트라 컨덕터처럼 지휘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위 사진은 조부성 PD가 현장녹음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1963년 동아방송 발족시 그곳으로 옮겼다가 1980년 방송 통폐합을 계기로 다시 KBS에 오셔서 정년퇴직했습니다.
강소천, 한국남, 박종민, 이경희, 오승룡
위, 아래는 공개방송을 위해 진해에 갔을때 촬영한 사진입니다. 재치문답박사 이경희 선생님 제공 사진으로 이경희, 한국남, 강소천, 엄익채님 등 재치문답박사와 당대 최고의 인기아나운서 장기범, 임택근, 박종세 아나운서 그리고 이 글의 주인공이자 재치문답 프로듀서 박종민, 조부성, 성우 오승룡님 등이 함께 했습니다. 재치문답과 노래자랑 등의 프로그램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박종세 아나운서가 함께 한 것으로 보아 또 한 프로그램의 공개방송이 있었던 같습니다. 내용을 좀더 보완 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소천, 000, 한국남, 이경희, 박종민, 조부성
그때는 국영방송시절이라 위 세분의 프로듀서는 모두 공무원신분으로 일을 했고 또 일반 공무원으로 다른 업무를 바꾸어 직급과 직위의 승진을 통해서 흔히 말하는 출세도 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방송을 해보겠다고 들어왔기 때문에 직장 생활이 끝나는 날까지 방송인으로 방송일을 하시다가 퇴직 하셨 습니다. 박종민님은 일찌기 세상을 뜨셨지만 김영우, 조부성님은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 하십니다.
왼쪽분은 1938년 아나운서로 방송국에 들어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농구 실황을 중계방송했고 1943년 단파방송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퇴직한 이현님으로 님은 1960년 방송관련단채 일을 하셨고 초대 방우회 회장을 지내셨습니다. 가운데 분은 1951년 임택근, 황우겸 아나운서와 함께방송국에 돌어온 아나운서 강찬선님으로 KBS이사, KBS사우회 회장을 지내셨습니다. 오른쪽분은오늘 말씀드린 김영우님입니다.
위 사진에 관해 김영우, 정규봉, 한동수, 천기태님등이 보이는데 사진 내옹을 잘 몰라 더 확인 해 보도록 하겠다고 써 놓았더니 관주 김광일님이 사진 한장을 추가로 보내 주시면서 설명을 붙여 오셨기에 사진과 글 원문을 그대로 올립니다. 보내주신 사진에는 1975년 함께 연수를 받았던 김광일님을 비롯해서 이서구. 이석우, 김성현, 권용중, 이흥주, 김순필, 임종철, 이준호님이 NHK 중앙 연수원 현관 앞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그 사진 (위의 사진)은 당시 우리는 흑백 TV만 송출하고 있었는데 NHK는 벌써부타 Color 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매년 NHK와 업무 협의를 정례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언젠가 우리도 Color방송을 해야 하기에 Color 방송 대비 연수를 시켜달라고 협조 요청한것이 쾌히 수용되여 그 첫해인 1974년에 1차로 일본에 간 사람들이 일본 NHK 중앙연수소 정문에서 입소기념으로 촬영한 기념 사진 입니다. 그 다음해에 2차로 저(김광일)를 포함한 12명이 다녀온 사진을 첨부에 보내드리오니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2011년 12월 4일 관주 김광일
김영우 프로듀서가 받은 최초의 공개채용 프로듀서 임명장 으로 아래는 김영우님이 쓴 사연입니다. 그 시대의 임명장 모습도 볼견 올렸습니다. 그 시절의 많은 방송인들이 촉탁이나 임시직 으로 채용되었습니다. 후에 정원이 T/O 발생하면 정규직으로 발령됩니다.
강찬선, 황우겸, 이수열, 임택근은 1951년 동기 아나운서 왼쪽부터 이상만, 황우겸, 임택근, 강찬선, 문시형, 이수열, 방흥안, 조부성. 김영우님이 함께 한 사진
2011년 방송의 날 축하연에서 만난 1950년대 방송인들과 함게 한 윤영중아나운서입니다. 왼쪽부터 홍기욱, 조부성, 민병연, 김인숙, 윤영중, 오승룡님입니다
2013년 9월 2일 방송의 날 방송인들과 함께 한 조부성님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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