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방송

1953년, 중앙방송국이 6.25 피난길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때 

이장춘 2011. 6. 19. 05:25

 

   

 

1953년, 중앙방송국이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때

 

 

1.4후퇴로 한강을 건너 전선에서 후퇴를

거듭하던 유엔군이 1월 22일부터 반격을 개시해서

 3월 14일에는 서울이 다시 수복되었습니다. 이에따라

 방송국에서는 그해 6월 17일 서울에 선발대를 파견해서

확성기를 설치하고 가두방송을 실시하는 등 비상방송을

실시하면서 시설복구에 나섰습니다. 사진은 그때

사직공원에  설치된 스피카입니다. 서울 중앙

방송국이라는 큰 글자가 보입니다.

 

 

 

 

1차 선발대에는 이종훈, 김익모, 양중석,

정유언, 진백림, 김성배님 등 기술자와 편성에 이영기,

기자 조한긍, 아나운서에 최승주, 홍용기, 이용훈, 총무 변천수,

박광서, 운전사 김석봉님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8월에는 김영진,

윤헌영, 박경환, 정관영님 등 기술자들이 2진으로 상경해서

환도 후의 방송에 대비 했습니다.

 

선발대에는 이밖에도 통역관과, 이종희 원고 번역관,

미 극동 사령부 심리전국 서울파견대장 Straus중위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중앙방송국이 부산 피난생활을 마감하고

서울로 돌아온 것은 휴전조인을 앞둔 1953년 6월이고 1953년

7월 28일부터 서울에서 정상적인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8월 11일부터는 단파 10Kw송신기가 설치 완료되어

전국방송망의 링크가 구성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아침 5시부터 9시까지

낮 11시부터 2시까지, 저녁 5시부터 12시까지

하루 세 차례 14시간씩 방송을 실시했고 53년 11월

9일에는일부 프로그램 개편에서 마음의 샘터, 사회견학,

가정문예등새 프로그램이 신설되기도 했습니다.

 

원래의 방송국 연주소는 6.25로

완전파괴되어 곁에있던 사무동 대한 방송협회

건물에 임시스튜디오시설을 갖추어 1957년 말 남산으로

옮길 때까지 여기서 방송을 실시했습니다. 지금은 이 건물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민간 빌딩이 들어 서 있고 옛날의 방송국

자리에는 1987년 방송 60주년을 맞아 원로방송인들의

모임인 방우회가 첫 방송터 유허비를 세워

여기가 우리나라 첫 방송 터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방방송국의 방송은 1950년 9·28 수복

이후부터 점진적으로 복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리방송국은 9.28수복당시 청사 현관부분만 파손되었고

건물 여러 곳에 기관포탄 자국만 남아있을 뿐 방송시설은

전혀 피해가 없어 그해 10월 5일부터 방송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리방송국 기술과장을

겸직한 방송과장 성기석님의 회고록이 있어서

다음 회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목포방송국은 해상이동 방송 등으로

기기가 보존되어 1950년 9월 28일 수복 후에

호남동 1번지에서 방송을 했으나 전란 후 재정난으로

방송국의 운영이 극히 어려워 청사마련도 어려워지자

목포방송국을 살리자는 지역민들의 노력으로

방송국을 짓고 방송을 정상화 시켰습니다.

  

광주방송국은 1950년 7월 23일부터

10월까지 약 3개월간 방송이 중단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 된 상태에서 처음에는 임시시설을

마련해서 방송을 하다가 시설이 복구 되고 정규방송을

하게 된 것은 1951년 5월 8일의 일이었습니다. 1951년 10월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광주에서 전국 체육대회가

열렸고 여기에 따른 방송은 광주방송국이

주축이 되어 실시했습니다.  

 

 

 

6·25사변 중 한때 중앙방송국의 역할도 했던

대전방송국은 1950년 7월 15일 피난과 함께 파괴되어

1950년 12월 출력 500w 송신기에 의한 방송이 복구되었지만

다음해인 1951년 1월 5일 다시 기재 일체를 철수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1951년 2월 6일부터 출력 50W로 방송을 시작했고

다음해 11월 출력 10Kw의 시설 증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남한의 중심지역이어서 부산에 중앙방송국이 있던 시절에

대전방송을 키스테이션으로 할 겸 방송의 출력증강을

서둘러 지역국 중에서는 제일 먼저 10Kw출력의

송신시설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구방송국에는 부산 임시정부시절

부산에서가까운 지역에 강력한 출력의 송신소를

 만들어 영남지역을 커버하는 송신소로 삼고자 해서 1952년

 5월 18일 지역국에서는 제일먼저 10Kw송신기를 설치했습니다.

이로서 임시정부 인근 대구와 지리적인 중심지 대전, 서울을 연결하는

 대출력 시스템이 구축 되었습니다.대구보다 광주에 먼저 10Kw를

설치해야 된다는얘기가 있어서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청주방송국이 1951년, 3월에

시설복구를 하면서 방송이 재개되었고

강릉방송국은 1951년 8윌 소 출력인 20W에 의하여

가두방송을 실시하다가 다음해인 1952년 7월 20일에

호출부호 H1KR, 주파수1080khz 출력 50W로

방송이 증강되었습니다.

 

 

지역국중에서 제일 늦게 복구된 방송국은

춘천방송국으로 1953년 9월 초만 해도 방송국장

 문돈식님이파괴된 방송국에서 혼자 방송국을 지키다가

 9월 중순 기술과장김성열님, 기술 고세혁님이 발령 받아

9월 말경부터이동방송을 하면서 방송국 복구에 힘을 쓰게

되었습니다. 실제 정규방송은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실시되었습니다.

 

 

전쟁중에 세워진 제주, 남원방송국은

오랜세월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해 왔고 남원방송국은

 2007년에 통합되었지만 제주방송국은 제주방송총국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방송을 합니다. 6.25피난방송국 부산은

서울환도가 있은 바로 그해에 국제시장 화재로

모두 불타 새로 지어야만 했습니다.

다음회에세 얘기하겠습니다.

 

 

KBS연주소에 도착한 선발대입니다.

(1951년 8월 22일) 앞줄 왼쪽부터 조한긍기자, 통역관,

이종희(원고 번역관), Straus중위  (미 극동 사령부 심리전국

서울파견대장 )변천수, 이종훈 가운데줄 왼쪽부터 운전수,

양중석, 한사람건너 최승주아나운서, 김석봉, 이영기,

박광서, 경찰, 뒷줄 왼쪽부터 김익모, 진백림,

정유원, 김성배님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6.25노래.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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