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방송

아나운서 강찬선, 부산방송 피난시절

이장춘 2011. 6. 21. 03:58

 

 

 아나운서 강찬선 회고록, 부산방송 피난시절

  

평양방송국에서 근무했던 강찬선 아나운서가

1.4후퇴로 유엔군 따라 월남해서 피난살이를 하던중

부산 피난방송국에서 실시한 아나운서 공개채용시험을 거쳐  

다시 아나운서가 되었습니다. 이 글은 그때의 얘기로 1983년

 월간방송 2월호에  기고한 글 중에서 발췌해서

제 자료사진을 활용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족상잔의 비극인 6.25와중에서 유엔군과

국군의 철수길 따라 피난길에 오른 우리들은 그 많은 각종

차량들과, 함정들, 하늘의 뒤엎는 각종 비행기들 동서해안을 제압하는 

각종 함정들을 보유하고 있는 유엔군이중공군에 밀려 쫓겨 간다는 것은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필경 이것은 인해전술로 물밀듯이 밀려오는 중공군을 평양 남쪽으로

일찌감치 유인해 놓고 일거에섬멸 해 버리려는 작전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평양남쪽의중화 부근 아니면 황해도 남쪽의 사리원 부근 아니면 기껏 개성

부근까지만내려가 있으면 일주일 아니면 넉넉히 잡아 한 달 이내에는

 평양으로돌아 갈 것이라고 거의 모두가 믿고 있었다.

 
그러니 남으로 내려간 피난길은 황해도를 거처
 개성으로 서울로 급기야는 부산으로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이와 함께 만주폭격과 북진을 주장하던 맥아더 사령관이 해임되고
 치열한 공방전의 한편에서는 후전을 위한 접촉이 시작되고........
이리하여 평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던 한 가닥 희망은
 점점 사라지고 그것이 32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는 샘이다.

 

 

왼쪽부터 안병원, 강찬선, 이상송, 송영호, 강익수, 유덕훈, 조백봉, 김창구님입니다.

 

 
이리하여 1951년부터 나의 실향 피난민으로서
 좀 더 거창히 표현하면 나의 제2 인생이 시작되었다.
부산 피난시절 미 군수물자를 수송선에 하역하는 소위 부두

노동자라는 것도 해 보았다.  2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는 그 당시

설치되었던 계엄 군법회의에 걸려들어 사형구형->10년언도->형집행정지

이와 같은 과정 속에 부산형무소에서 약 두 달 동안 콩밥도 먹어보았다.

형무소의 감방생활 그것은 정말 희한한 별천지였다.그해 한해 여름은

부산 송도 유원지에서는부산 친척이 경영하는 보트 대여장을

거들어 주며백사장과 바닷물과, 태양빛으로 온몸이

흑인이 무색 할 정도로 검둥이가 되기도 했다.

 

...... 중략…….

 

여름 시즌이 거의 끝날 무렵 어느 날

중앙방송국에서 아나운서를 모집한다고 공고가 났다. 

그때까지 때때로 방송을 들으면서 아나운서들의실력이 저 정도면

나도 한번 해 볼만 하다는 자신이 있었고 또 지난날   김광국같이 대북방송을  

통해   평양집단에  충격을안겨 주어야 겠다는 의구심 같은 것이 발동하여

이에 응모하여 결국 합격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 약 100여명의 응모자중

 합격된 사람이 임택근, 황우겸, 이수열, 그리고 홍일점  

정순형과 함께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때 아나운서 진용은 계장에 윤길구씨를
비롯하여 서명석, 최승주, 장기범, 한희동, 양대석,

양현문,양재현, 이용훈, 김순철, 강익수, 공승규, 그리고

여성으로 김유선,최창숙등 10여명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록하다 보니까. 윤길구, 최승주, 강익수, 양대석등 4명은 이미

고인이 된지 오래고 그밖에 대부분이 뿔뿔이 해어져 지금은

 그 거처를알 수없는 인생무상을 느끼게 된다.

 
당시 정부의 부산환도와 함께 부산 40계단 위
대청동 언덕마루에 위치한 원 부산지방방송국을 점유하고 있던
중앙방송국 직원들은 거의 모두가 피난살이 신세라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셋방살이나 또 방송국 부지 내에 천막을 치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홀아비,
총각들은 방송국을 직장 겸 숙소로 삼아 국수 아니면 안남미 밥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잠자리는 지하 숙직실에, 숙직실이 차고 넘치면 사무실 책상위에
 또는 방송이 끝난 후의 스튜디오에 마련하기가 일쑤였고 그러니까 새벽
 방송 때는 아직도 한쪽 모퉁이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는 친구들의
코고는 소리를 반주로 방송이 나가기도 했고 아나운서 중에도
잠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어 마이크를 잠자리에
끌어다가놓고 방송하는 강심장도 있었다.
 

 
 군복 차림에 "KBS"마이크를
 가슴에 붙이고 고달픈 피난살이에서 나마 40계단
도떼기시장을 누비며 젊음을 불살은 낭만도 있었고 한 토막

로맨스 같은 것도 추억에 남는다. 이렇게 부산에서 아나운서로 재출발한

나는환도후의 정동 방송국, 신축된 남산방송국으로 옮겨가며 아나운서로서의

 분연의 임무수행에 성우들과 어울려 드라마에출연하기도 하고 수필이나 시의 낭독,

독창, 합창 등에 출연하기도 하고 또는 각종 스포츠 중계방송등 말하자면 팔방 미인

격으로 방송에 종사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도 국립 영화 제작소에서 만들어 내는

뉴스영화 국방부에서 제작하는 뉴스영화나 특보 그밖에 문화영화 등의 해설 등

모두 합치면 아마 수백 편에 이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산영화가

양산되던 60년대 초에는 “개봉박두 기대하시라” 로 상정되는

영화 예고편의 녹음을도맡아 실시하며 동분서주

하던 일이 생각난다.

 

  

벽산 우제탁선생님 글 

 

1950-1960 년대 우리 방송현실,,,,

본 "춘하추동방송" 으로 인하여 그 엣날 이야기,,,

사진,,,감회가,,,당시 아나운서에 대한 일반인의 인기,,;
대단,,,홍양보 위진록 등은 un군 총사렬부 방송중게로 인해서 알게

되었고, 강찬선은 영화,,대한뉴-스 에서도,,,1960년대 초,,당시 남산 7 부조에서
근무하면서 12시 뉴-스 시간,,,언제나 시보 직전에 마이크 앞에 나와, 기술 근무자를

초조하게 한 아나운서는 강익수 그리고 강창선은 그 원고가 같은 내용인데도 정확한

 발음에 빨리 읽은 아나운서,,,남산 9 부조,,대북방송에서 간혹 대면,, 옛날 정동,,

그리고 남산 시절,,,우리 방송현실은,,,,? 이제 그사람 그사람들 대부분이

고인되고,,오늘에 크게 변하고 향상된 우리의 생활현실은 옛날 그런

근거 토대로 인하여 이룩된것 이라고 생각해야,,,그레서

"과거역사를 무시하면 내일이 없다" 고 했을 것     

 

 

 

shirleytemple선생님 글  

2012.07.20 00:33

 

부산 피난 시절 부터 방송을

시작 해서 환도후 정동 방송국에서 그때

덕수 국민학교 때에 매일 노래와 연극 대담 등을

어린이 시간 프로 에 했었다.   오늘 이 Blog 을

우연히 보니 옛날 알던 궁금 했던 분들의

사진을 보니 반갑기 그지 없다. 우리

안병원 선생님도 계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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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 한길로 살다가신 강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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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선 아나운서의 평양방송 재직시절 회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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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선 아나운서 방송회고록 / 1964년, 미국의 소리 방송 (VOA)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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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 강찬선의 그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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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화, 외교관 딸 과 아나운서 강찬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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