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간 북한에서의 방송
6.25빌빌 3일도 안되어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간 서울방송은 3개월이 지나
다시 우리 수중으로 들어왔다. 9월 30일 38선을
넘은 UN군이 평양을 수복한 10월 19일을 전후해서
KBS 방송 선발대가 평양으로 출발했다.
유엔군 사령부 심리전국에서
미리부터 북한 땅에서 실시할 자유의 소리
방송계획을 세우고 KBS직원중에서북한에 파견 될
요원을 선발, 전세에 따라 방송요원을 파견키로 했기 때문에
UN군의 평양수복과 함께 방송을 실시 할 수가 있었지만
전기공급이 단절된 상태여서 정상적인 방송실시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 얘기가 다소
엇 갈려 추후 확인코저 함 )
UN군이 자동차에 싫고 다니면서
방송하던 BC-610, 300W짜리 무선송신기를
오야리 송신소에 설치하고 간이식 방송을 할 수있었다.
이때 선발대로 파견된 방송 요원은 엔지니어 김영진, 김주용과,
아나운서 홍용기, 위진록, 유덕훈이었고 또 미군장교 2명과
사병 군속 등으로 구성 되었으며 평양방송국에
근무하던 김일영, 안용금, 이관구등의
협조를 받아 방송을 실시했다.
평양에서 역사적인 첫 방송을 내보낸것은
10월 23일이다. 하루 세 차례 모두 9시간 방송을
실시했고 그 내용은 VOA ( 미국의 소리방송)과 VUNC
(유엔총사령부방송)를 중계방송하면서
자체 제작 방송을 편성했다.
1945년 해방 후 8월 25일을
기해서 방송국간의 남.북간의 방송
전용회선이 끊긴 이래 5년여 만에 우리
방송인이 평양방송국에서 방송을
하게 된 것이다.
11월말이 가까워지면서
선발대로 평양에 파견됐던 김주용,
김영진과 교채하기 위해 강기년이 홍천대위,
최학수 중사와 함게 평양을 향해 갔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져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고
평양에 가 있던 방송대 역시 12월 초 UN군의
후퇴로 철수 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평양방송국에서 근무하다가 우리 방송에 힘을
기울여 준 김일영, 안용금, 이관구도 이때 같이 철수했으며
소련제 송신기도 가져왔다. ( 다음 기회에 더
자세한 얘기를 쓸 것이다.)
한편 원산, 함흥방송국은 박능상, 정종갑,
조동식을 파견해서 복구했고 함흥방송국의
단파방송을 활용해서 한영섭기자의 전황방송이
서울 방송에 보내져 방송되기도 했다, 이들은
11월 19일경 신포에서 미군 LST편으로
부산에 돌아왔다.
한편 방송대의 방송활동과는 별도로 한영섭기자는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취재활동을 했다. 한영섭기자가 서울신문사 정원국 기자와 함께 청진으로 진격중인 수도사단을 따라 서울을 떠난것은 11월 초였다.
생사를 넘나들며 철원, 원산, 함흥, 청진을 거쳐 계속 북으로 올라가면서 취재활동을 하고 전황은 함흥방송국의 단파방송으로 서울 중앙방송에 연결되어 전국으로 방송되기도 했지만 인해전술로 닥쳐오는 중공군 앞에서 11월 22일 청진이 함락되고 UN군이 중공군에게 포위당해 오고가기 어려운 상황속에서 그 유명한 흥남 철수작전으로 돌아왔다.
이때 군과 함께했던 한영섭기자는 취재활동 외에 방송국일에도 도움을 주기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자세한 사항은
최초의 방송 종군기자 한영섭의 6.25전쟁
취재록 클릭 -> http://blog.daum.net/jc21th/17780073에
있고 또 2001년 대한 언론인회에서 발행한 녹취 한국언로사에도 있다.
이 글에 나오는분 가운데 한영섭기자는 KBS보도실장(지금의 보도본부장 전신)을 거쳐 지금은 원로방송인 모임인 방우회 회장으로 계시고, 위진록, 유덕훈 아나운서는 VUNC에 근무하시다가 지금은 미국에 계시면서 KBS사우회 회원이시며 김일영, 이관구님은 KBS에 근무하시다가 지금은 KBS 사우회회원으로 계시다가 세상을 뜨셨습니다.최학수님은 KBS보도부차장 거쳐 문공회 회원이십니다.
끊어진 대동강 다리와 흥남철수작전
북한동포의 목숨 건 남하 행렬 1950년 12월4일 평양을 철수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북한동포들은 이렇게 부서진 대동강다리를 결사적으로
건너 남하하기 시작 했습니다.
흥남철수광경. 흥남부두에 몰려나온 피난민들이 `유엔`군의 `LST`를 다투어 타고 있다.
이 사진은 미공개기록사진 중의 하나다.
6·25전쟁 중 인천항에 정박해 있는 메러디스 빅토리호 - 흥남철수 성공뒤엔 `기적의 배`가...59명 정원 메레디스 빅토리호 피란민 1만4000명 자유의 품으로 인도. 1만4000명의 피란민은
물도 약도 없이 3일간의 항해 끝에 부산항에 닿았다.
불타는 흥남부두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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