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택근
대한민국에서 그토록 사랑을 받고 그토록 널리 알려진 사람도 많지 않을 줄 압니다. 1960년대 KBS뉴스시간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 되었던 낮 12시뉴스, 밤 8시대의 공개방송, 수시로 방송되던 빅 스포츠의 중계방송에서는 임택근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부드럽고, 빠르면서도 정확한 발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방송현장 에서 떠난지 36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그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은 임택근 아나운서를 기억하고마침내 2009년 3월 27일 방송인명예의 전당에 올랐습니다.
1950년대 60년대를 통해서 가수나 영화배우등 어느 연예인보다도 모든 국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면서 인기절정에 달했던 임택근 아나운서는 1951년 부산피난시절 대학교 1학년 재학중에 아나운서가 되었습니다. 아나운서를 정상적으로 하려면 대학을 졸업해야 되던 시절이었지만 아나운서 재능을 타고난 임택근은 아나운서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으로 당시의 노청성 KBS중앙방송국장을 직접 찾아가 그 재능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면서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습니다. 실기시험, 필기시험 면접시험을 거쳐 다섯 사람을 선발하는 아나운서시험에 당당히 합격해서 아나운서가 되었습니다.
아나운서가 된 임택근은 재능을 인정받으면서 뉴스나, 스포츠등 고참 아나운서만이 할 수있는 여러방송 프로그램이 임택근에게 배당되었고 청취자들의 관심을 끌었습 니다. 1956년 호주 멜번올림픽이 열릴때는 고참 아나운서를 뒤로하고 장기범 아나운서와 함께 현장에서 멋진 중계방송을 실시해서 청취자들로 부터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KBS가 본격적으로 실시한 노래자랑이나, 스무고개, 아마츄어 쇼 등의 중요 프로그램 사회는 임택근의 몫이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크게 인기를 누린것은 임택근의 인기와 사회솜씨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의 막힙이 없고 유머와 재치가 있었으며 출연자들을 편안하고 즐겁게 하는 사회솜씨는 공개방송을 늘 성공적으로 이끄는 원동력 이어서 임택근 아나운서 사회로 진행되는 공개방송이 있는 날이면 방송국은 방청객들로 혼잡했습니다. 일선장병 위문이나 해수욕장등으로 마이크를 옮겨 공개방송을 할때면 먼길을 마다하고 공개방송 현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960년대 초, 여름 장마철 비가 오는 날 서부전선 해병부대에서 공개방송을 하던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임택근아나운서는 예나 다름없이 즐거운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진흙탕 바닥에서 방청하던 수천의 장병들은 환호를 올리며 공개방송이 끝날 때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1959년 선배방송인 장기범 아나운서가 VOA에 파견되면서 뉴스나 중계방송, 공개방송등 각 분야에 걸처 그의 역량은 한층더 돋 보였습니다. 1956년 멜번 올림픽때는 선배 장기범 아나운서와 함께 중계방송을 했고 1960년 로마 올림픽에는 후배 이광재 아나운서와 함께 중계방송을 실시해서 대단한 환호를 받았습니다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문으로 시작되는 님의 방송을 듣는방송 청취자들은 그 방송에 몰입되면서 애국심이 저절로 용솟음친다는 애기들을 했습니다.
이무렵 KBS아나운서 실장이 된 임택근은 인기 절정에 다달았습니다. 뉴스중에서 낮 12시 뉴스를 가장 중요시하던 시절에 그 뉴스는 임택근의 몫이었고 1961년 말부터 실시된 TV방송의 주요공개방송을 비롯해서 각종 주요 중계방송도 임택근의 몫이었습니다.
MBC, 1961년에 발족해서 아직 자리가 안 잡힌데다가 1963, 1964년 연달아 동아방송, 동양방송이 발족하면서 뿌리가 흔들리게 된 MBC가 임택근을 스카웃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아나운서 실장보다 한 단계 위인 방송부장 직책을 부여하면서 임택근을 MBC로 스카웃 했습니다.
이때가 1964년의 일로 그로부터 MBC의 방송부장으로 MBC 방송의 전반에 걸쳐 힘을 기울였습니다. 처음 직함은 MBC의 방송부장이었고 얼마 안있어 상무를 거쳐 전무가 되었습니다. 1972년 문화방송 와이드 생방송 임택근의 모닝쇼'를 끝으로 방송현업에서 물러나 MBC경영에 참여해서 힘을 기울였지만 기회 되는대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한때는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정치에는 인연이 없었습니다.1980년 격동기에 잠시 MBC, 경향신문 사장 직무대리를 하기도 했지만 얼마 않있어 결국 방송국을 물려났습니다. MBC에서 떠난 뒤에도 EBS에서 방송을 한 적이 있고 2002 월드컵에서 라디오 중계방송 석에 앉은적도 있었습니다.
1962년 그 시대 방송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스러운 제 5 회 방송문화상을 받았고 그 뒤에도 서울시 문화상, 녹조근정훈장, 옥관 문화훈장 등을 받았습니다. 2009년에는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기도 했습니다.
화 보
1961년 5.16이 일어났을 때 5월 17일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5.16지지 시가행진을 했을때는 동대문에서 서울역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서 중계 방송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1961년 12월 31일 KBS-TV가 문을 열 때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송요찬 내각수반, 오재경 공보부장관등 각계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역사적인 KBS-TV방송국 개국행사가 있었고 이 행사의 중계방송 역시 임택근 아나운서가 맡았습니다. 중계방송을 할때 그때 일을 써 놓은 글에서는 난로 불을 피우고 하늘의 별을 보면서 중계방송을 했다고 했습니다. 지붕이 다 되지 않아 중계방송 석에서 하늘이 보인다는 뜻이었습니다.
님은 노래자랑, 스무고개, KBS향연 TV방송의 그랜드 쇼등 중요공개방송 사회는 임택근 아나운서의 몫이었고 공개방송을 할 때면 방청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아 사전에 배부되는 방청권이 턱없이 모자라기도 했습 니다. 방청을 기다리는 청취자들로 방송국 뜰은 가득 찼습니다. 공개방송은 공개홀에서도 했고 이동방송을 하면서도 했고, 일선장병위문공연도 했습니다. 님이 가는 곳이면 어디던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위사진은 이승만대통령이 남산에 있던 안중근의사의 동상을 참배하고 방송국에 들렸을때의 사진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아나운서를 변사라고 했다고 해서 화재거리가 되었지만 임택근 아나운서는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등 역대 집권자들도 그를 아끼고 사랑 했습니다. 관련글보기 아나운서 임택근 http://blog.daum.net/jc21th/17783161 멜번 올림픽과 임택근 아나운서 방송추억 http://blog.daum.net/jc21th/17780286
왕년의 임택근 아나운서 동영상으로 본 최근의 모습 http://blog.daum.net/jc21th/17780794
1962년 KBS 아나운서들의 모습입니다. 장기범 방송과장, 임택근 아나운서를 비롯해서 이광재, 박종세최세훈, 한경희, 배덕환, 최두헌, 홍종선, 김주환, 이규항, 길종휘, 유영옥, 이장희, 최승일, 박노설, 최정현, 송영규, 이병열, 송한규, 김인권 아나운서가 함께한 사진입니다.
임임택근님을 비롯해서 동기 아나운서 강찬선, 황우겸, 이수열, 그리고 방흥안, 이상만, 조부성, 김영우님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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