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1980년대 방우회 원로 방송인들 / 첫방송터 유허비 건립등

이장춘 2011. 5. 19. 17:00

 

 

 

1980년대 방우회 원로 방송인들 / 첫방송터 유허비 건립등 

 

우리나라에서 방송을 실시한것은

1927년 2월 16일부터다. 처음부터 방송국에

근무하신분은 방송, 기술인 다섯분과 업무요원 몇분이

계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후 우리말 전담방송인 제2방송

체널이 생기고 지역방송이 확장되면서 우리방송인들도 늘어나 

방송국 설립후 18년이 지난 해방 될 때까지 우리방송인들은

상당수에 이르렀고 이분들이 우리 방송을 이어왔다. 그때는

방송국이 출발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라 방송인들은 

대부분 40대 미만이였다.

 

그후 6.25를 거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 1960년대에 이르자 오래된 방송인들은

연세가 들었거나 또는 다른 여러사정으로 방송계를 떠나시는

분들이 늘었고 또 세상을 떠나신분도 종종 계셨다.  이런가운데

방송인들 모임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친목을 위해 출발한 단체가

 1966년에 구성된 방우회 (한국방송인 동우회)이고 이 방우회를

 중심으로 퇴역 방송인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방송역사

 보존이나 방송발전을 위한 뜻있는 일을 벌리기도 했다.

 

그런가운데 몇장의 의미있는 사진을 남겼다.

그때의 감회어린 사진을 보면서  느김이 있어 그 사진을

올려 보았다. 그때는 각 방송사별 사우회가 없었을 때이기도

했지만 아찌되었던  퇴역방송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뜻을 같이 했음을 볼 수있다.

 

 

 

 

1981년 10월 24일 우이동 야유회장에서 만난

퇴역방송인들의 모습이다. 꼭 30년이 지난 오늘은 

 뵈일 수 없는 분들도 많으시다.  사진 뒷면에 성함과 도면이

있어 여기에 옮겨 보았다.  왼편에서 부터 김영철, 서병석, 이범신, 윤기범,

문시형, 박광서, 박중서, 하용득, 최수진, 전옥배, 김창구, 김포천, 송영수, 문돈식,

한재수, 최선욱, 임학송, 박규정, 성기석, 정경순, 박용명, 송정기, 곽진상,

임한규, 이인영, 이두희, 이달형, 정영규, 심재영, 방흥안, 이병섭, 허환,

김기호, 신상운, 신병운, 이현, 김홍태, 이준순, 조병희, 신현석,

김영진, 권혁래, 조규택, 박찬응, 배준호, 김광모, 강찬선,

송영호, 한승은, 양한석, 김석모, 강기경, 한영수,

강래식님등 오랜기간 우리나라 방송을

키워오신 원로방송인들이다.

 

 

 

 

1990년 10월 10일자 연합통신에는

다음과 같은 보도가 있다. 위의 사진은

1981년 10월 24일 촬영했고 그 뒤 1990년에도

우이동 모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연합(聯合)) 원로 방송인들의

모임인 방우회는 13일 하오1시 서울 우의동

  청산휴게소에서 야유회를 개최한다. 이날 야유회에서는

 희수(喜壽)와 고희(古稀)를 맞은 원로방송인에

대한 경로잔치도 베푼다.

희수와 고희를 맞은 방송인은 다음과 같다.

희수 : 이인관(李寅觀), 박종명(朴鍾鳴)

고희 : 유  호(兪 湖), 조종국(趙琮國),

권혁래(權爀來), 정경순(鄭慶淳), 김영진(金永鎭),

이보라(李寶羅), 조성길(趙星吉), 양중석( 梁重錫),

조영휘(趙永輝), 김성재(金聖在),

 

 

 

 

1987년 5월 첫방송터 유허비 건립을 위해

첫삽을 뜨던날 덕수초등학교에 모인 퇴역방송인들이다.

첫 방송터 유허비 건립의 뜻을 모아 그해 방송의 날 9월 3일을

제막식을 가졌다. 제막식에는  방송국을 최초로 설립하는데 기여한

 시노하라의 아들 부부와 일제강점기의 여자 아나운서 고가도

 참여했다. (시노하라는 유허비 제막식이 있기 바로

얼마전 세상을 뜨셨다.)

 

 

 

제막식에 나와 주신분들의 성함을 옮긴다.

박규진, 박경환, 남상국, 김석호, 이춘사, 강정도, 왕종현,

임석규, 이현, 최만린, 유해룡, 송영수, 김창희, 최순용, 김영우, 최수진,

김영효, 강신철, 문제명, 민중기, 이병인, 000, 이용선, 이인관, 시노하라 아들 부부,

고가 도에, 문제안, 김봉렬, 김성배, 조한승, 권오진, 이해상, 곽진상, 김용택, 김영완, 서규석,

 최당, 조종국, 이상만, 문시형, 이인영, 성기석, 김익진, 배준호, 장두원, 이수열, 강찬선, 김영진,

 서명석, 박근주, 한희동, 전옥배, 정항구, 김집, 김덕수, 강신조, 최종채, 김소원, 조남두,

김인태, 조돈준, 박한준, 유경환, 권혁래, 김정현, 천영조, 김명희, 이덕근, 송영호,

김성재, 최학수, 손석주, 최영신, 남학현, 김창구, 김성열(렬), 박찬숙, 박종민,

황우겸, 임택근, 유병은, 최삼경, 이준순, 김상헌, 조부성님등

86분의 퇴억방송인들이 함께 한 사진이다.

 

 

 

그때 첫 방송터 건립에 뜻을 같이 하신 분 가운데

위 사진촬영에서 빠지신분들의 성함을 올립니다. 강신조, 강영숙,권오룡,

김광모, 김덕수, 김봉렬, 김석호, 김순철, 김익모, 김익진, 김재연, 김준문, 남상국,

 남정휴, 남학현, 노정팔, 도태흥, 라은선, 민유동, 문제안, 박영선, 박종민, 박한준, 박호준,

배준호, 서규석, 서명석, 손영호, 신정휴, 심구섭, 이계원, 이범신, 이상만, 이성철, 이시우, 이용실,

이용선, 이용찬, 이인재, 이준순, 이춘사, 이해상, 이혜구, 임석규, 임한구, 장기범, 장두원, 정구호,

정환옥, 조규택, 조병희. 조종국, 조한승, 천영조, 최덕수, 최삼경, 최수진, 최순용, 최장섭,

최창봉, 최학수, KBS ANN실, 한기선, 한영섭, 한운사, 한희동, 함영복, 홍두표,

홍순구, 황병찬, 황선필, 황태영, 고 노창성, 고 시노하라, 일본 조방회, 

실로 일제강점기부터 1987년 그 시절에 이르기가지 모든 퇴역

방송인들이 참여한 의미있는 유허비 건립이었습니다.   

 

 

 

당시의 방우회장 문시형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비문에 남긴 깊은 뜻을 되새겨 볼 필요도 없겠으나

겨레의 마음을 싣는다는 큰 뜻을 우리는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매 오늘의 방송인 특히, PD의 좌우명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첫 방송터' 기념비 이야기를 꺼낸 김에 한가지만 더 강조해 보고자 한다.
너비 5m 30Cm, 가로3m가 넘는 기념비 건립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퇴역방송인의 자발적인 성의로써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출연금에 대한 상한선도 없고 하한선도 없었다.
단 한가지 조흥은행 계좌번호 344-1-008009 방우회란

저금통장 하나가 방우회 회원들에게 알려졌다. 단돈 5,000원에서

 백만원에 이르는, 형편에 따라 '첫 방송터' 기념비 건립 기금이 모아져

그 금액이 무려 1,200만원에 이르렀다. 연인원 122명의 퇴역방송인이

뜻을 모은 것이다. 방우회장이라기 보다 한 PD의 아이디어가

퇴역방송인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참여의식을

고취시킨 결과이다.

 

 

 

1991년 물망비제막식날의 기념사진이다.

 

 

 

여기 모인 방송인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은

못하셨어도 방송과 함께 하셨던 방송인들의 피와 땀으로

오늘날의 우리나라 방송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 발자취를 더듬어

방송역사의 흐름을 압니다. 그때 있었던 그 일들 하나 하나가 이나라

방송역사의 기초입니다. 많은 선배 방송인들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지금도

그때를 예기 하실 수 있는 선배 방송인들이 계시고 또 사진이나 영상물등

기록을 가지신 선배님도 계시는 줄 압니다. 한건이라도 더 소중히

 다루어 후세에 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방송박물관의

꿈이 조속히 이루워져 이런 기록물들이 집대성

될 수 있었으면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대한제국 최초 애국가.mp3

 

 


대한제국 최초 애국가.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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