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금강산” 노래비와 노래가 제정되던 때
우리나라에서 북한이 제일 가까이 잘 보이는 곳 서해안의 최북단에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있다. 금강산은 보이지 않아도 개풍군과 연백평야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세워진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앞에서 눈앞에 전개되는 북한땅을 바라보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그리운 금강산"을 듣는다.
그리운 금강산 노래가 제정된 것은 올해로 꼭 50년(2011년 현재)이 되었다. 좋은 노래를 제작 보급하던 KBS는 6.25가 일어 난지 11주년을 맞아 통일을 열망하는 국민들의 뜻을 담아 세계적인 명산 금강산노래를 제작하기로 했다. 시인 한상억 선생님에게 가사를, 최엉섭 선생님에게 곡을 의뢰해서 제정된 노래는 이해 6.25를 계기로 노래가 방송전파를 탔다.
이때 KBS 음악담당 책임은 고 조백봉님으로 뒷날 DBS 동아방송이 탄생할 때 음악과장을 지냈다. 그때의 음악담당 PD, 소프라노 김명희 여사님은 그때 그 기억을 되살리며 일생동안 이 노래를 즐겨 부르신다. 올해 86세(2011년 현재)이신 김명희 여사님은 각종 행사나 결혼식 등의 모임에서 부른 횟수만 해도 수백 회를 불렀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 들려오는 노래는 김명희여사가 70세 되던 해 1995년, 일본에서 열린 국제 행사장에서 불렀던 노래다. 우리국민이 제일 선호한다는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하신 한상억, 최영섭 선생님이 강화분들 이어서 강화군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북한이 제일 잘 보이는 곳 그리고 관광객이 많이 찾는 강화 평화전망대에 노래비를 세워 유명가수들의 노래를 저장 해 놓고 관람객이 직접 선택해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이 노래로 더 유명해진 시인 한상억선생님은 1992년 11월 9일 세상을 뜨셨지만 최영섭선생님은 오랜 세월 훌륭한 작곡가로, 지휘자로 활동을 하셨다.
그리운 금강산
작사 한상억 작곡 최영섭 노래 김명희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이천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그리운 금강산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더럽힌지 지 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비로봉 그 봉우리 짓밟힌 자리 흰구름 솔바람도 무심히 가나 발아래 산해만리 보이지 마라 우리 다 맺힌 원한 풀릴 때까지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 가본 지 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있는 강화 평화전망대애 관한 얘기는 아래 글을 클릭 하셔서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있는 제적봉 http://blog.daum.net/jc21th/17780816
산들걷기 카페에 있는 글 인용 2011년 10월 23일자로 올라있음 http://cafe.daum.net/hikluv/KbJq/5045?q= %B1%D7%B8%AE%BF%EE%20%B1%DD%B0%AD%BB%EA%20%B3%EB%B7%A1%BA%F1 강화 평화전망대 안에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있다. 이노래를 작사한 고(故) 한상억 선생(양도면 도장리)과 작곡가 최영섭 선생(1961년도 작곡, 화도면 사거리)이 모두 강화출신인 것을 계기로, 전망대 내 북한땅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노래비를 세웠다. 노래비는 높이 3.5m, 바닥 면적 10 평방m의 석조물로 만들었으며, 상단에는 통일의 염원을 담아 비상하는 날갯짓 모양의 조형물을 올렸다. 노래비 앞에는 높이 90cm의 쇠기둥 3개를 설치, 기둥에 장착된 버튼을 누르면 바닥의 야외용 스피커를 통해 조수미, 박인수, 플라시도 도밍고 등 국내외의 유명 성악가가 부른 다양한 '그리운 금강산'을 감상할 수 있다. [가사 : 韓相億]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이천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더럽힌지 몇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비로봉 그 봉오리 짓밟힌 자리 흰구름 솔바람도 무심히 가나 발아래 산해만리 보이지 마라 우리 다 맺힌 원한 풀릴때까지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가본지 그 몇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탄생 1961년 최영섭은 인천여고 음악교사였다. 그때도 이미 작곡 실력을 인정받아 여기저기 작곡 의뢰가 많았다. 지금부터 40년 전인 1961년, KBS는 조국강산을 주제로 한 노래의 제작을 기획했는데 이때 KBS의 동요작곡가 겸 PD인 한용희에게서 작곡 의뢰가 들어왔다. 조국의 산하를 愛讚(애찬)하고 6·25 11주년을 맞아, 멀리 중국·러시아·북한 등지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는 뜻 있는 곡이어야 했다. 당시 그곳에 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KBS 電波(전파)뿐이었다. 최영섭은곧 바로 한상억을 찾았다. 선생님, 뭐, 강산을 주제로 한 좋은 詩가 없습니까? 왜 없겠어. 밤낮 강과 산, 바다에 관한 詩만 써온 내가…. 염려 마. 그렇잖아도, 당신이 가곡에 써 먹을 詩를 부탁할 때가 됐지 싶었어. 준비해 놓은 게 있어. 1주일 이내로 줄게 약속대로 그 1주일 후 詩를 받았다. 詩 그리운 금강산은 최영섭의 가슴을 진하게 두들겼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러면서 선율이, 막힘 없이 떠올랐다. 하룻밤 만에 곡을 끝냈다. 그뿐인가 피아노 반주곡, 관현악 반주까지 작곡을 끝냈다. 맘에 들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치는 작업을 거듭하는 최영섭으로서는 하룻밤에 작곡을 끝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운 금강산 만큼은 단 한번의 가필도 없었다. 신들린 듯 긁었다. 그리운 금강산은 최영섭이 작곡한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 11곡 중 하나였다. 당시 작사료는 2000원, 요즘돈 35만원 정도였다. 한상억은 광복 전 이미 금강산은 너더댓 번이나 다녀 와서 금강산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다. 詩人 한상억의 관심사는 평생 산과 강, 바다였다. 그리고 눈내리는 밤의 초가, 대숲에 이는 바람, 봄날, 산등성이에 피는 꽃들을 미치게 사랑했다. 갈데 없는 서정시인이었다. 최영섭은 본인의 작품 600여 곡 중에서 한상억의 가사가 60곡쯤 되며 특히그리운 금강산은 작곡가 최영섭의 오늘이 있게 한 1등 공신이라고 말한다.
작사자 한상억의 작고 1994년 6월 어느 날. 아침 8시께 작곡가 崔永燮에게로 전화가 걸려 왔다. 지난밤의 폭주로 아직 머릿속이 띵했다. 여보세요... 여기, LA입니다. 최영섭 선생님 되십니까? 예, 그래요... 저는, 한상억씨 아들입니다. 아이, 그렇습니까. 반가워요. 한선생님, 건강 괜찮으시죠? …. 저, 저의 아버님이 지난밤에 돌아가셨습니다. 최영섭은 순간,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전화를 쥔 손아귀가 스르르 풀어져 나갔다. 아니 불과 열흘 전, 함께 서울 여의도 뷔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던 그가 죽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한상억은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사자. 최영섭의 단짝이자 세상살이의 길동무가 쓰러진 것이다. 40년 전, 작사자 한상억과 작곡자 최영섭은 그리운 금강산을 만들면서 남북통일에의 염원을 가득히 담았다. 그러나 40년이 흐른 지금도 남북통일은 한갖 신기루일 뿐이다. 이 가곡의 작곡 당시 서른 안팎이었던 최영섭은 이제 일흔 둘이 됐다. 작사가 한상억은 이 세상에 없다. 무심한 세월만 흘렀을 뿐이다. 그리운 금강산이 오랫동안 우리 국민들의, 애창가곡 1위여서 물론 기쁘다. 그러나 정작, 작곡자인 나는 실상 이 노래가 하루라도 빨리 흘러간 옛 노래가 되길 바랐다. 통일이 돼 동강난 조국의 산하가 하나로 이어져, 아, 옛날, 이런 슬픈 노래도 있었구나하는, 과거형이 됐으면 했다. 한상억과 최영섭의 만남 작곡가 최영섭과 詩人 한상억과의 인연은 1953년께, 인천에서 시작됐다. 그때까지도 6·25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절절했다. 그때 최영섭은 스물 넷, 한상억은 서른 여덟이었다. 최영섭은 인천여고 음악교사였다. 여기다 한국음악협회 인천지부장, 인천교향악단 지휘자, 인천시 합창단 지휘자이기도 했다. 어느 날, 문화계 인사 모임에서 두 사람은 조우한다. 한상억이 대뜸 최영섭에게 물었다. 고향이 어디죠? 강화 화도면입니다만… 역시…, 아까 얘길 하는 걸 들으니, 꼭 내 고향 말씨 같아 물었는데, 맞구만요. 반가워요. 난, 바로 그 이웃 동네 양도면에서 태어났소. 아~하~하. 정말 반갑습니다. 둘은 이내 가까워진다. 한상억은 부자였다. 인천상업학교 출신으로 은행원도 하고 정미소도 가지고 있었다. 교사로 어렵게 사는 최영섭을 物心양면으로 도왔다. 최영섭이 음악회 개최 등으로 돈이 필요할 때마다 얼마간 보탰다. 한상억은 기독교인으로 장로였다. 그런데도 최영섭이 선생님, 술이나 한 잔 하시죠? 하면 두말없이 응했다. 술은 안 마셔도, 반가운 사람과 한잔 술을 놓고 마주 대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기 때문이다. 당구장에도 이따금씩 갔다. 한상억의 당구실력은 초보였다. 도사급인 최영섭과는 애초부터 게임이 안 되는 데도, 싫은 내색 한 번 안 내비치고 당구를 쳤다. 두 사람은, 1962년 나란히 경기도 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한상억 선생은, 전자회사에 다니는 아들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다. 10년 가까이 살았지만, 정이 안 드는지 툭하면 서울에 왔다. 서울보다는 시골, 우리의 산과 강, 바다를 실컷 둘러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한상억은 서울에 오면 어김없이, 최영섭을 불렀다. 나이차를 느끼지 못할 만큼 단짝이었다. 1972년, 남북적십자 회담 때, 북한에서의 공연에서 테너 안형일이 부른 가곡 그리워라 두고온 그 사람들도 한상억의 詩를 최영섭이 작곡한 것이다. 그런 한상억의 죽음은, 두고두고 최영섭을 우울하게 만든다. 한상억의 마지막 고국 나들이도 따지고 보면, 고국의 산과 강, 바다 때문이었다. 심장판막증에 시달리던 한상억이 아들의 지극 정성으로 병원 치료를 받아 90% 완치가 됐었다. 그러자 고국을 무척 가고 싶어 했다. 담당 의사는 너무 무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고국 나들이를 허가했다. 그러나 담당 의사의 충고는 무색했다. 한상억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알았는지, 다시 못 올 모국 산천임을 알았는지, 고국의 산과 강, 바다를 미친 듯이 헤집고 다닌 것이다. 미국에 되돌아간 지 열흘 만에, 76세로 세상을 마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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