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음악 백년

동요 작곡가 유기흥의 경성방송국 (JODK) 방송 회고담 녹성동요회

이장춘 2011. 5. 6. 02:26

 

 

동요 작곡가 유기흥의 경성방송국 (JODK) 방송 회고담

 

녹성동요회 지휘자

 

유기흥님은 일제강점기 동요 작사,

 작곡가로 1933년 어린이 노래회 녹성동요회를

구성해서 방송 등을 통해 동요보급에 힘썼습니다.

1934년 만주를 포함한 일본전역에 중계 방송된 어린이

 프로그램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얘기는 그때의

 회고담입니다.  지금 들으시는 동요는 1934년

녹성동요회가 부른 가을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동쪽어른 듭신다. 서울 구경 오셨다.

 

서서 서대문 서대문을 열어라

서쪽어른 듭신다. 서울 구경 오셨다.

 

홍띠 들띠 메시고 서울 오셨다.  

홍띠 들띠 메시고 시골손님 구경 오셨다.

기웃 기웃 저 아기 뉘 집 구경 오셨나

 

이 동요는 1930년대 목일신 (睦一信) 이란분이

지은 동요로 기억되는데 나에게는 잊을 수없는 노래이다.

홍띠 들 띠라는 말도 지금은 별로 듣지 못하거니와 그런 띠도

구경 할 수 없다. 이것은 그 당시 어린 아기가 입던 한복에 매던 띠였다.

1933년 나는 당시 녹성동요회 어린이들을 이끌고 음악에 열중하고 있는데

일본인 방송 검열관으로부터 목일신 작사의 서울구경의 서울표기를

 앞으로는 경성으로 고쳐 부르라는 주의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원작대로 부르게 했다 그러자 재차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서울 표기대로 부르게 했다.

이윽고 방송이 끝나자 경찰서에서 호출장이 왔다. 나는

곤욕을 치룰 것을 각오하고 일경에 출두했다. 역시 예정 했던 대로

일경은 갖은 욕설을 서슴없이 퍼 붓고는 다시 부르면 잡아넣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서 나는 그 후부터는 서울구경이란

동요를 레퍼토리에서 빼 버렸다.

 

 

1934년 전 일본에 중계방송된 특집방송을 마치고 촬영한 녹성동요회 사진입니다.

마이크 앞에 앉은분이 유기흥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34년의 일이다.

하루는 국장이 나를 부르더니 녹성동요회로 하여금

 한국동요를 제1 제2방송을 통해 일본 전국에 중계방송 하겠으니

좋은 곡 6곡만 골라서 준비하라고 지시 하는 것이었다. 나는

흥분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고 또 그 당시 평가가

 높던 우리 동요 6곡을 골랐다.

 

6곡 중에는 윤극영의 반달과

나의 창작곡도 끼어있었는데  아무튼

그것들을 골라 가지고 은사인 현제명박사를 방문하여

 의논을  드렸다. 나는 선정된 6곡을 연습하고 보니 너무

 애조 띤 곡이어서 선뜻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랬더니 현 선생님께선 하와이 사람들도 자기민족의 비운을 그들

나름대로 애조 어린음악으로 승화 시키지 않았나. 그러니 어떤 노래든

 개성이 있고 남에게 즐거움을 주면 그것으로 충분한 거야. 하고

도리어 격려 해 주셨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얻어가지고

선정한 6곡을 JODK를 통해 일본과 만주로 방송했다.

 

 얼마 후 미국인 청취자 여성 한분으로부터

 감명 깊게 들었다는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 여성은

 마리아 알렌이라는 여인으로 거기 사진까지 동봉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송한 그 곡들을 보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정말 잊을 수없는 일이었다. 

 

 

 

 

녹성회 동요 가을 1934.mp3

 

 

 

녹성회 동요 가을 1934.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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