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음악 백년

JODK 경성방송국에서 대중가요가 처음 방송 되던 때

이장춘 2011. 5. 16. 19:41

 
 

 

JODK 경성방송국에서 대중가요가 처음 방송 되던 때
 

 

현대음악의 선구자 홍난파선생님이

애수라는 시에 곡을 붙여 현대음악을 작곡한것은

 1920년의 일이고 그곡에 김형준의 봉선화 가사가 실린것은

 1925년이었습니다. 이 무렵에 대중과 함께 하면서 노래를 부른이가

 윤심덕이었습니다. 현대음악이 노래로 불린 것은 윤심덕으로 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악과 대중가요 영역의 한계가 없이

유행가, 창가라고 불리던 시절 윤심덕님은 오늘날 성악, 유행가

대중가요 등을 어우르는 모래를 불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윤심덕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던 때는 경성방송국이

시험방송을 할때로 그의 노래는 비록 시험방송

이기는 했어도 방송전파를 탔습니다.

 

 

 

 

1920년에 창간한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윤심덕의 공연을 주선하기도 하고 지면을 할애해서

 널리 알리기도 했습니다. 그때 레코드에 취입한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레코드가  팔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방송국에서 정식 방송을  할 때는 님은

이미 세상에 없었습니다.


윤심덕은 대 스타가 되었지만 얼마 안있어

애인과 함께 현해탄을 건너다가 바다 물속으로 사라

졌습니다. 많은 분들은 윤심덕이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본 사람도 없고 그 뒤에 유럽에서

 윤심덕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어 그의 생사에 관해서는 두고두고

미스테리로 남아서 그의 명성만큼이나 큰 화재거

니다. 어찌되었던 윤심덕은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동안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가

 없던차에 홍난파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동요를 부르던 어린학생 이정숙이 단성사 무대 앞에서

김서정 (김영환)의 무성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곡을 불러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노래가 음반으로 나온것은 1929년의

일이었습니다. 지금 들려오는 노래는 그때 이정숙이

부른 강남의 달입니다.

 

 

 

 

1930년대에 들어 대중가요는 본격화

되었습니다. 레코드가 제작되었고 방송국에서도

대중가요가 많이 방송되었습니다.  잘 아시는 대중가요

황성옛터는 1930년에 전수린님이 곡을 만든 다음 왕평님이

 가사를 써서 이 애리수님이 불렀습니다. 노래가사가 먼저

만들어지고 거기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는 것이

통례지만 황성옛터는 달랐습니다.

 

 

 

 

유랑극단 단원으로 이곳저곳을 다니던

연예인들이 개성에서 머물 때 만월대를 보고 그 심정을

 바이어린으로 연주한 것이 감명을 주어, 같이 다니던 왕평님이

  곡에 맞추어 노래말을 썼습니다.  이 애리수가 단성사에서 이 노래를 

불러 관중들에게 큰 감명을 주고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지만

그로부터 노래는 일제에 의해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노래가 레코드로 된 것은 1932년의 일이고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이 노래는 널리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1933년 제 2방송이 실시 되었을 때

연예, 오락프로그램이 주를 이루웠습니다.

 일반 청취자의 연예프로그램에 관한 관심이 높다보니

라디오수신기를 조속히 보급해서 경영을  개선해야 하는

 방송국 입장에서는 연예프로그램을 중점적으로 편성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제2방송 개국과 동시에 오랫동안 예예 프로그램에

중점을 둔 특집방송이 계속되었고 넓은 장소를 빌려 공개 실연방송도

했습니다. 4월 26일 2중방송이 실시된 3일후의 프로그램을 보면

대부분 연예 오락방송 프로그램이었고 으로 8시 45분부터

9시까지는 강석연이 출연하는 유행가가 방송되었습니다.

 

 

 

 

이때 한참 인기 있던 강석연은  제2방송 

기념 특집방송에서 전수린의 바이어린과 김교성의

클라리넷, 백건의 기타, 문호월의 드럼반주에 맞추어 

 버리지 마라, 그리운 그밤, 남대문 타령, 꽃각시 서름, 15분간에

 이 네곡의 유행가를 멋지게  불러 청취자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받았

습니다. 왕수복, 이난영, 선우일선이 나오기 전 강석연연은

복혜숙과 함께 연극, 영화계에서도 활동했고

 가요계에서도 이름을 날렸습니다.  

 

 

 

 

우리말 전담체널 제2방송이 실시되면서

대중가요의 방송횟수는 많아져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 대중가요의 전성시대를 이루었습니다. 직업가수

1호라고 불리는 채규엽, 왕수복, 선우일선, 이난영, 고복수, 전옥,

김복희, 황금심, 김용환, 강홍식, 최남용,  강석연, 김선초, 김연실,

이화자, 김선영, 남인수, 장세정, 김영춘, 차홍련등 수많은 가수들이

등장했습니다. 1934년에는 왕수복이, 1935년에는 이난영이

경성방송국에 출연해서 일본 전역에까지

그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대중가요의 흐름을 타고

1935년 당시 귄위잡지 삼천리지는 인기투표를

했습니다.여기서 남녀 각각 다섯사람의 가수들을 선발해서

삼천리지에 발표했습니다.  여자부문 1위 왕수복, 2위 선우일선, 3위

 이난영,  4위  전옥,  5위 김복희, 남자부문에는 1위 채규엽,  2위 김용환,

 3위 고복수, 4위 강홍식, 5위 최남용이 발표된 순위안에 올랐습니다. 

 본 블로그 카테고리 사연깊은 옛노래 편에 그 사연과 함께 

노래를 올려 놓았습니다.  김복희의 노래는 저작권

관계로 아직 못 올렸지만 올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 해 보겠습니다.   

 

 

 

 

 

박시춘, 손목인, 전수린, 이교성, 김용환,

김해송, 이봉룡등 이름있는 작곡가도 많았습니다.

이때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작사와 작곡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김용환, 김해송같은 분이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연예프로그램이 큰 제약을 받았고 또 노래가

일본의 전쟁목적 수행에 이용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왕수복처럼

노래부르기를 중단하는 가수도 있었고 그때 마지못해 노래를

불렸던 가수들은 오늘날 친일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다.

 

 

그 무렵에 방송국에서 연예 프로그램을 주로

담당 하신분은 이혜구님선생님이었습니다. 이혜구님은

원래 바이오린을 하신 분으로 현대음악에 조예가 깊으셨지만 그때는

국악, 창이나 민요가 주를 이루던 시절이라 국악이론으로 대한민국의

제 1인자가 되셨고 해방되고 1948년 방송국 문을 나서면서 서울 대학교

음악대학을 창설 해서 음악대학장이 되고 민족음악 국악을 육성 했습니다.

우리나라 방송사를 정리 하는데ㅠ깊은 관심을 가지고 힘을 기울이셨

습니다. 1909년에 테어나 2010년 세상을 뜨셨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