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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2,000대 시절의 생활과 방송

이장춘 2011. 2. 19. 17:42


 
라디오 2,000대 시절의 생활과 방송
 
 
 까마득한 옛날 얘기이군요.
라디오가 2,000대밖에 안되던 시절 !
8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 시대를 사시던
분들이 지금도 생을 이어가시는 분들이 계시고
 지난 80년 동안 그분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변해도 너무 변해 버렸습니다.
 
 

 

 

 
1924년 12월 10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험전파를 발사하던 시절에 라디오가
다섯 대가 있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어쨌든 그 시절에는
 시험방송에 직접 쓰이는 라디오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광화문에 있는 체신국에서 전파를 발사하고 그것을 충무로에 있는
 미스코시 백화점(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서 사람들이

모여 스피카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환성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방송국이 문을 열 때까지
시험방송, 라디오강습회, 부녀견학단 등의 이름을 통해서
 방송이 무엇인가를 알렸습니다. 이런 일은 체신국에서도 했고
준비 중이던 경성방송국에서도 했지만 신문사나 라디오
상회에서  중점적으로 했고 또 이런 일에 체신국이나
준비 중이던 방송국에서 지원했습니다.
 
신문사에서 이 일을 한 것은 처음에는
방송국을 스스로 새워보려는 계획으로 했고
또 개인이 방송국을 세울 수 없고 컨소시엄으로 한다는
 결정이 내려 졌을 때는 앞으로 있을 방송주주가 된다는 생각이나
신문의 보급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방송을 듣기위해서 또는
 라디오 만드는 기술이나 수리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모여 들었습니다.

 

 

 

 

 

시험방송 때나 부녀견학단에는
수천명식 모여 들었고 라디오 기술을 배우는
강습회에는 100명 내외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이 땅에 방송국이 처음 들어 올 때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라디오를 구입할 능력을
갖은 사람들은 많지를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근목피로 생활해야 했고
 1년 12달 쌀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거의 없던 시절에
라디오 한 대 사려면 혼자서만 들을 수 있는  싼 광석라디오를
사더라도 쌀 세가마니 값을 주어야 되고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좋은 라디오를 사려면 쌀 50가마니값이 넘는 돈을 주어야
되었으니 라디오를 사고 싶은 마음 간절해도
그것을  선뜻 살 수가 없었습니다.
 
 


 

 

방송을 할 즈음에 책정된 청취료도
한 달에 2원을 내야 했기 때문에 3개월분이면
살 한가마니 값이니 이 시대에 라디오를 갖는 것은
 큰 부자가 아니면 어려웠습니다.
 
1927년 2월 16일 기해서 정식으로 방송을 했지만
 2월 20일까지 라디오를 갖은 사람은 1, 440명밖에 안되었고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사람은 275명밖에는 안되었습니다.
 
방송을 실시했어도 라디오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라디오나 청취료가 큰 부담이었지만 방송도
 큰 문제였습니다. 1Kw출력으로 경기도에서도 먼 거리에서는
 듣기가 어려웠는데다가 들리는 곳에서도 일본어 방송과 우리말 방송을
 같은 채널에서 방송하면서 일본어방송  2시간에 우리말 방송 1시간
그것마저 좋은 시간은 일본어 방송을 하고 우리나라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방송은 듣기도 불편한 시간에 넣어 놓으니
 방송을 듣고 싶은 생각이 적어졌습니다.
 
그러자 방송국에서는 방송설립에 힘을 기울였던
 기술부 노창성님을 총무부로 소속을 바꿔 라디오 보급에
전력투구 하게 해서 다소의 효과는 보았지만 이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어서 방송국이 문을 연지 얼마 안 되어 이사장이
 바뀌고 직제를 개편해서 사람을 줄이고 방송 부장이던 미스나 카를
비롯해서 초기의 방송인이 물러나야 하는 환경이 조성되어
직원들의 불안감은 더욱더 높아가면서 방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노창성님은 라디오 보급과
경영에 힘을 기울였고 이러는 과정에서 라디오 상회의
 육성과 라디오수리 기술자의 양성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과 관련해서 라디오 상회가 나오고 지금으로
말하면  라디오 학원 같은 것도 생겨났습니다.
 
이운선님은 동양라디오 상회를 만들어
국산 보급형 라디오를 만들어 싼값으로 팔았고
조광운님은 동국무선이라는 학원을 세워 라디오 무선 전기
기술보급에 나섰으며 이 학원은 조선무선중학교 시절을 거쳐
광운 전자 전문대학 그리고 지금은 광운대학교로 발돋움했는가 하면
 또 조광운님에게 아이디어를 얻은 김연준님은 한양공과대학을 세워
 오늘날의 한양대학교 기초를 쌓았습니다. ( 이 부문은 동국무선
야간부를 다니셨던 노익중님,  조광운님과 관계가 있었던
정항구님의 말씀을 토대로 썼습니다. )
 
 


 

위 왼쪽분은 방송국이 처음 문을 열부렵 동양라디오 상회를 경영하면서
보급형 라디오를 판매하신 이운성님이고 그 다음은 경성방송국 개국때 라디오 보급에
힘을 기울인 신경석님으로 1960년대 속초방송국장을 하셨습니다. 오른쪽 두번째는 
 올해 100세인 이혜구님으로 1932년부터 방송하셨지만 아직 생존 해 계십니다.
오른쪽분은 김문경님이고요.  아래 사진은 위의 이운성님이 동양라디오를
경영하실때  직원들과 함께한 사진입니다. (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 


 

 


 

어쨌든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 방송을 정식으로
내 보낸 지 2년 8개월이 지난 1929년 9월말경이 되어서야
라디오는  만 ( 10, 000 ) 대가  되었고  그때 그 기념행사를   가졌습니다.
이때 노창성님은 ( 둘째 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이미 중견사원이
되었고 개국 무렵 업무요원으로 들어오신 신경석님도
1960년대까지 방송국생활을 하셨습니다.

 

 

 

 

 

아래사진은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상회 광고 사진을
KBS방송 박물관 학예사 서용석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다음기회에 또 말씀드리기로 하고

수정 해야 할 사항이나 보완해야 할 사항이

 있으시면 연락 부탁드리면서그 시대에 보급된 라디오와

스피커 몇 종류를 올려 드리겠습니다. 다음 라디오는

 방송국에서 보유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개인이 보유한 것입니다.


 

 광석라디오 ( 장도형님 소장품) 


 광석라디오 ( 장도형님 소장품)  

 

 전기용 삼구 라디오 AC레프랙스 스타일 가로 45cm, 세로 21cm,  깊이 22cm, 


전기용 사구 라디오 가로 43cm, 세로 24cm,  깊이 23cm, 

전기용 5구 가로 30cm, 세로 44cm,  깊이 28cm,
 

전기용 6구 라디오 슈퍼 헤테로 타임 가로 35cm, 세로 60cm (안테나 포함),  

깊이 15cm, 라디오 윗 부문에 달린 것은 이 라디오의 안테나입니다. 

 

 

 

 

 

 

 

방우회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