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님의 해방될 무렵, 드라마방송 회고록
내가 방송과 인연을 갖게 된 것은
1944년 몇 편의 낭독소설을 쓰면서부터였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던 해 10월, KBS보도부의 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문제안형의 권유로 정동 중앙방송국(6. 25때 소실)
편성부에 들어가서 연예물을 담당했다. 선배인 윤준섭씨와
주로 작가 교섭과 무대중계 편성을 맡았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혼란기라 전화를 가진 작가도
드물었거니와 소재를 알 수가 없어서 원고청탁을 하는데도
적잖이 애를 먹었다. 낭독물은 그런 대로 소설가에게 청탁할 수가
있었지만 드라마 작가는 별로 없었다. 그래도 이서구 ·
박 진 두 분이 간간이 라디오 드라마를 써주었다.
매주 한번씩 15분 짜리 낭독소설 시간이
편성되면서 소설가 몇분에게 원고청탁을 했는데
방송 전날까지 한분도 원고를 보내주지 않았다. 다급해진 나는
직접 원고를 써서 이것이라도 내보내야 되겠다고 부장한테 얘기를
했더니 원고를 읽어본 부장은 작품은 괜찮은데 처음 나가는 것을
국원 것으로 할 수는 없다고 해서 두 번째로 방송이 되었다.
작품 명은「기다리는 마음」. 학병으로 끌려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얘기였다. 그 당시의 부장은 작고한
시인 안서 김 억 선생님. 과장은 수필가로 저명한 청천 김집섭 선생
이었다. 여담이기는 하지만 두분이 모두 술을 좋아해서 퇴근시간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덕수국민학교 건너편에 있던 한평짜리
대포집으로 행차를 했는데 20대인 나는 두분의
귀여움을 받아서 동행하는 영광을 누렸다.
어린이시간을 담당했던 송영호씨도
멤버의 한사람이었고, 일차를 그 집에서 끝내고 나면
이차삼차, 종내는 계동에 살던 부장댁이 아니면
청운동의 과장댁에서 마감을 하곤 했다.
특채 1호, 망나니 작가 1호 해방 직후,
군정시대에는 몇 개의 드라마프로가 있었다.
시간은 30분. 순수드라마인「방송무대」외에 국내외 뉴스를
드라마 형식으로 꾸민「군정청 시간」과 경성전기주식회사의
「경전 시간」, 민족청년단 제공인「민족청년단 시간」등이다. 매주
이 시간을 메워야만 했는데, 앞서 말한 대로 드라마를 써줄 만한
작가가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해방 후 연출을 도맡다시피
했던 김영수씨가 원고를 써댔고, 나도 거들었다.
그리하여 한동안은 둘이서 그 여러 개의
시간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힘이 들긴 했지만 재미도
있었다. 재미란 다름이 아니라, 그때는 작품이 탈고되었다는 부장·
과장의 인정만 받으면 그 즉시 한방에 있었던 서무부에서 원고료를
지불해 주었다. 원고료는 확실하진 않지만 70원인가 7백원인가. 그 재미에
김영수씨와 나는 하루에 두편도 쓰고 세편도 쓴 적이 있다. 쓰기만 하면
원고료가 나왔으니까. 결코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나중에는
바쁘다 보니까 등사판 용지에다가 직접 드라마를 쓰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정동 방송국의 해방 후 특채 1호였고,
등사판 용지에다가 원고를 쓴 망나니 작가 1호였다. 그 당시
성우로, 김 억 부장이 편성한 시낭독시간「다발다발 꽃다발」의
낭독으로 이름을 떨친 조남사는 후에「청실홍실」로 해서 드라마 작가로
변신을 했는데, 그도 한창 바쁠 때는 등사판 용지에다가 원고를 쓰는
재주를 부리기도 했다. 해가 바뀌어 1946년인가, 해방 뒤
1기들이 전형을 거쳐서 입사했다.
노정팔, 배준호, 이영기, 김서봉, 제씨로 기억을 한다.
모두가 젊고 쟁쟁한 국원으로 많은 일들을 했다. 한편으로는
드라마 작가들을 대거 촉탁 형식으로 맞아들였다. 김희창, 이 익(김화랑),
한운사, 이화여대 출신인 미모의 여자 한사람(가정시간 담당). 김희창씨는
해방 전부터 극단에 관여했던 탓으로 깊이 있는 드라마를 썼고,
이익씨는 영화감독에 악극단 운영까지 해서 드라마가
경쾌했으며, 서울대학 불문과 학생이었던 한운사는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드라마를 다루었다.
작품의 이름은 도저히 기억할 수 없지만
그분들로 인해서 편성부 안의 드라마 작가들은 한때나마
그야말로 군웅할거 시대를 이루었다. 이미 그때는 연출에도
이백수 선생과 곱슬머리인 유아무개가 가담하고 있었다.
연극배우 출신인 이백수 선생은 김래성 선생의
「진주탑」등의 낭독으로 청취자들을 매료시키곤 했다.
또 술얘기를 해서 안됐지만 사직공원 뒤에 있던 '대머리집'의 단골로
거의 매일 밤을 젊은 방송인들과 어울렸다. 46년, 47년에 걸쳐서
적지 않은 드라마가 쏟아져 나왔다.
미국인 고문이 쓰기 시작한 미국식 어린이 모험드라마인
「똘똘이의 모험」. 오늘의 구 민과 TV의 이낙훈은 그때 국민학교
아동으로 이 프로에 출연을 했다. 나도 그 중의 한 프로를 썼다.
비록 어린이 상대의 드라마이긴 했어도 시청률은 상당했다.
소 울음소리 대신 ‘피식’소리만 연발
편집시설이 없던 시절이라 모든 드라마는 일단
시작을 해서 도중에 잘못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만 했다.
연출이나 성우들이나 모두가 내노라하는 베테랑들이었는데도
실수가 없으란 법은 없었다. 실수는 효과에도 가끔 일어났다.
지금이야 별별 효과음이 담긴 디스크가 있어서
안 되는 소리가 없지만, 그때는 모든 소리를 사람이 기구를
이용했기 때문에, 소가 '음메…'하고 우는 소리는 붓통을 입에다 대고
불어서 내야 했는데, '음메…' 대신에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연출자는 빨리 '음메'하는 소리를 내라고
손짓을 하는데도 아무리 불어도 어디가 잘못 됐는지,
'피식'하는 소리만 나오는 바람에 웃다가 만 적도 있었다.
군정 때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당시의 좌익 연극인들도 당당히
드라마에 출연을 했다. '고협(高協)'극단의 심 형 일행과 극단은
달랐지만 황 철 일행, 박창환, 박 철, 김선영 등등 뒤에
북한으로 달아나버린 그들도 버젓이 출연을 했다.
작품의 내용이 마음에 안든다고 투정을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들과 잘 아는 김영수씨가
버티고 구슬러서 녹음이 제대로 진행되기도 했다. 김영수씨는
영어를 잘해서 미군 고문관들과도 친했었고 연출 솜씨가 뛰어났다.
마이크 앞에서 대본의 종이를 넘기는 소리를 피하기 위해서
한장 한장을 슬그머니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방법은 그의 창안이었다.
또 욕심이 많아서 넘어오는 드라마 대본 중에서
좋은 것은 자기가 연출하고, 시시한 것은 이백수씨나
곱슬머리인 유아무개한테 시키는 통에 두사람은 늘 투덜거렸다.
방송은 시간이 생명이다. 한번은 이서구 선생의 낭독소설을 받았는데,
스톱워치를 가지고 몇번을 읽어보아도 시간이 넘쳤다.
원고가 길다는 연락을 할래도 안돼서 나는
내 마음대로 원고를 손질할 일이 있었는데 방송을
들으신 선생이 이튿날 화가 나서 달려오더니 이혜구 국장
(이선생과는 친척)방으로 날 불러서 호통을 쳤다. "건방지게 원고를
자르다니." "건방진 건 사과드립니다만 방송을 하다가 중간에서
끊어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이선생은 대답을 안했다.
'며루치 사건'으로 곤욕 치러 나는 또 한번
혼이 난 일이 있었다.
박 진선생이 쓴 드라마였는데, 대사 중에 "러치인지 며루치인지 모르겠지만…"
하는 것이 있었다. 당시의 군정장관이‘러치’라는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들었는지 항의를 해왔다. "일국의 군정장관을 보고
며루치가 뭐냐?" "원고를 청탁하고 내보낸 자가 누구냐?" 나는
그 원고를 읽지 않았던 것이다. 시말서를 쓰고 해결이
됐는지 어쨌는지 지금은 기억이 없다.
사실 나는 한때나마 모든 작들의 원고를
읽어볼 책임이 있었다. 한발 먼저 입사를 했다는 점 하나로
선배도 있는 터에 그 일을 나에게 맡긴 것이었다. 남의 원고를,
그것도 30분짜리 드라마를 하루에 몇번씩 읽는 것은 고역이
아닐 수 없었지만 '며루치 사건' 이후로는 눈을 밝히고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덕에 많은
공부가 된 것도 사실이다.
20대 청년으로 선배들과 함께 보낸 정동 중앙방송국 시절은
언제 회고를 해도 즐거운 추억뿐이었다. 그렇게 즐거운 방송국을
어찌해서 떠났는가.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이관희 초대국장이
부임을 했다. 중국에서 오래 살다가 환국한 분이었다.
뭣 때문인지 항상 권총을 차고 다녔다.
하루는 간부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이 작가들은 웬 이름이 이렇게도 많습니까? 김영수면
김영수고 유 호면 유 호지. 남해인이니 호동아는 다 누굽니까?"
남해인은 김영수씨의 또 하나의 필명이고 호동아는 내 필명이었다.
드라마를 많이 써야 했기 때문에 그 외에도 여러 개의
필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이건 뭡니까? 어째서 원고지에
칸을 꼬박꼬박 메우지 않고 여백이 이렇게도 많습니까?
여길 보십쇼. 등장인물의 이름을 쓰고 멀쩡하게 두칸이나 비워두고
그것도 부족해서‘네’한자 밑엔 한 줄이 주욱 비었지 않습니까?
이게 도둑놈 심보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원고지 빈칸
안 메운다고 호통 중국에서는 무슨 원고를 쓰든
칸을 비우는 법이 없다.
다닥다닥 칸을 메우는 것이 그 쪽의 원고를
쓰는 법이다. 그것만 보아왔으니 드라마 대사 가운데
'네' 한자만 쓰고 비워놓은 것을 보고는 괘씸하다 못해
도둑놈이라고 했던 모양이다.
"인젠 방송국을 떠날 때가 왔나부다…"
며칠 후 나는 김광주 선생의 권유로 경향신문 문화부로
자리를 옮겼다. 작가인 김광주씨는 이국장과 처남 매부 지간이었다.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기나긴 세월, 우리나라 방송드라마의
요람기를 연 작가들 가운데는 고인이 된 분도 있고,
「똘똘이의 모험」에 출연했던 어린이 구 민과
이낙훈은 60을 바라본다.
정동 중앙방송국은 폐허가 되었지만
라디오 드라마는 TV와 맞서서 나날이 청취율을
높여가고 있으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한가지 사실과
어긋난 점이 있으면 내 기억 상실증으로
돌려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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